세하 (동성애자인권연대 웹진기획팀)
처음 글을 쓰기로 마음을 먹고, 리스트를 작성했다. 고른 책들은 모두 두서도 순서도 없었다. 하지만 그중에서「소녀, 소녀를 사랑하다」라는 책을 가장 먼저 집은 것은, 신의 계시 같았다.
「소녀, 소녀를 사랑하다」
이야기는 리자의 편지로부터 시작한다. 두 사람의 첫 만남과 조심스럽게, 그러나 확실히 사랑을 키워가는 모습, 그 와중에 일어나는 서로 향한 갈망과 갈등, 그릇된 판단으로 인한 어리석은 실수, 그리고 성난 파도처럼 밀어닥치는 편견과의 싸움으로 이루어져 있다. 단순히 두 어린 소녀의 사랑만을 이야기한 것이 아닌, 우리 사회 '학교'라는 공간 안에서 편견에 맞서 싸워나간다. 또한, 이야기 내내 편지는 결국 보내지 못할 것이라고 몇 번이고 적어 내려가면서 자신의 내면과의 갈등을 계속하여 반복하여 성장해나가는 것을 보여준다. 그리고 편지는 전해지지 않지만, 둘은 그보다 더욱 단단한 끈을 잡는다. 비록 이야기에 등장하는 고난은 두 사람이 원해서 맞게 된 역경이었던 것은 아니지만, 아직도 수많은 두려움과 불안 속에서 전전긍긍하고 있는 내게 언젠가 이것들을 극복할 때가 올 것이라고 얘기해주는 듯 했다.
책을 읽어나가는 동안 리자와 애니, 두 사람은 내게는 꿈과 현실의 경계선을 넘나드는 것처럼 보였다. 한 마디로 꿈같이 느껴지는 열정적인 사랑과 그 사랑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을 왔다갔다하는 것과도 같이 보였다. 그리고 그 경계 선상에서 흔들리고 갈등하고 또 웃음 짓는 모습은 곧 어미의 품을 벗어나 세상 밖으로 모습을 드러낼, 닭이 되기 전의 병아리와도 같았다.
이것은 내가 아직 누군가를 깊게 생각해본 적이 없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으나, 아마 두 사람이 서로 보는 시선이 너무 순수하게 느껴졌기 때문일 것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두 사람이 맞서 나간 사회의 시선과 편견들은 그런 내 가슴을 또다시 격하게 뛰게 하기도 했다. 두 사람을 향하는 차가운 시선과 말들이 나를 향하는 화살과도 같아, 불안해하고 두려워하고 또 분노하고 한편으로 슬펐다.
그리고 나는 이제까지 '낫다'라는 말이 이토록 차갑게 느껴진 적이 없었다. 병원을 가면 된다, 나을 수 있다는 교장 선생님, 샐리, 리자 엄마의 입에서 나오는 그 말들이 마치 얼음을 만지듯 너무나 차가웠다. 그를 통해 내가 이제까지 그 말의 따뜻한 이미지만을 봐왔다는 것을 알았다. 책이라는 간접적인 매체를 통해 전달 받은 내가 이러했듯, 두 사람은 더 큰 아픔을 느껴야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몸이 떨렸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아직 내 문제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무성애자라는 내 정체성을 깨달았지만, 밖으로 나가볼 생각도 하지 않고, 그저 겁을 잔뜩 먹고 움츠리고 살아가고 있다. 이렇게 되어버린 것에는 가장 믿을 수 있는, 믿어보고 싶었던 사람이 내 커밍아웃을 장난으로 여겨 그냥 넘겨버렸던 일을 겪고 난 후 더는 앞으로 나갈 생각을 하려고 하지 않고 있다.
결국 나는 이야기 속에서 스티븐슨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무지에 사로잡혀서 스스로 더 깊은 곳으로 숨어버리는 짓을 반복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나와는 달리 두 사람은 자신의 앞에 닥친 고난과 역경 앞에 맞섰고 끝에는 편지가 아닌 전화로 서로의 끈을 붙잡음으로써 나아갔다. 이런 모습에서 나는 얼마 전, 시인의 집 카페에서 느꼈던, 내 안의 무언가가 채워지는 그 따스한 감각을 다시 한 번 체험할 수 있었다. 스스로 자신하기는 아직 힘들지만, 아마 나도 앞으로 나아갈 준비를 할 수 있지 않을까. 물론 내 경우는 사람을 향한 신뢰의 문제이므로 리자와 애니의 경우와는 엄연히 다른 것이지만, 언젠가 '사랑으로 이겨'낼 수 있는 날이 오게 되리라 믿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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