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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지개문화읽기

우리도 당당한 고객님, 핑크 산업

by 행성인 2013. 7. 18.

재성 (동성애자인권연대)



1) 핑크 산업


‘핑크 산업(Pink Industry)’은 성소수자를 상대로 비즈니스를 영위하는 모든 종류의 산업을 통칭하는 말이다. 성소수자는 사랑하는 사람의 대상만 다를 뿐 다른 모든 사회, 경제적 요소에서는 이성애자와 차이가 없다는 것에 비추어, 핑크 산업 역시 이성애자가 영위하는 모든 종류의 산업군에서 함께 존재하고 있다.

 

▲ 게이 크루즈선에 승선한 관광객. 이 게이 크루즈선은 2010년에 부산항에 입항하기도 하였다.


핑크 산업은 성소수자 권리보장 운동의 역사와 그 궤를 같이한다. 성소수자를 상대로 한 본격적인 비즈니스가 태동한 것은 제 2차 세계대전 종전 후 전역한 남성 동성애자 군인들이 집단 거주촌을 형성하였던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였다. 수많은 남성 동성애자들이 일거에 유입되면서 이들의 커뮤니티 형성에 필요한 각종 업종에서 성소수자를 상대하는 비즈니스의 수요가 급증하기 시작하였다. 초창기 게이바와 게이클럽으로 시작된 샌프란시스코의 핑크 산업은 이후 남성 동성애자 상대의 부동산 중개업자, 식료품점, 레스토랑 등 주로 생활밀착형 업종 위주로 빠르게 성장하며 샌프란시스코가 남성 동성애자의 거주지로서 정체성을 확립할 수 있는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


1960년대 샌프란시스코를 기점으로 미국의 성소수자 권리보장 운동이 시작되며 핑크 산업은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우선 성소수자를 대상으로 여론을 결집하기 위하여 주로 잡지 형태의 성소수자 미디어가 등장하기 시작하였고, 샌프란시스코를 위시한 캘리포니아 주 일대에서만 활성화되었던 핑크 산업이 전 미국으로 확산되기 시작하였다. 1968년 뉴욕의 ‘스톤월 인(Stonewall Inn)’이라는 게이바에서 경찰의 남성 동성애자 단속에 항의하는 ‘스톤월 항쟁’이 일어난 후 뉴욕은 샌프란시스코와 함께 성소수자 권리보장 운동의 거점으로 부상하였는데, 현재도 여전히 그러하지만 당시에도 뉴욕은 세계 금융의 중심으로 수많은 남성 동성애자 금융인들이 활발히 활동하고 있었다는 것에서 출발, 성소수자를 대상으로 한 개인 재무 컨설팅업이 핑크 산업의 한 축으로서 이 시기에 시작되었다.


이후 1970년대에 들어 서유럽 국가들에서도 본격적으로 성소수자 권리보장 운동이 시작되며 그 동안 사회에서 가려져 있었던 성소수자들의 존재가 드러나기 시작하였고, 자연스레 이들을 상대로 하는 핑크 산업이 이들 국가에서도 꽃을 피우게 되었다. 아시아에서는 태국이 성소수자에 대하여 개방적인 문화를 바탕으로 1980년대 초 최초로 핑크 산업이 시작되었고, 이후 대만, 일본, 한국 등에서도 1990년대부터 성소수자 권리보장 운동이 시작되며 핑크 산업 역시 태동하게 되었다.


성소수자의 권리가 어느 정도 보장된 국가의 경우 핑크 산업의 규모는 대개 해당 국가 GDP의 3~5%정도로 추산되고 있다. J.P 모건에서는 미국의 핑크 산업 규모가 약 5천억 달러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바클레이스 은행에서는 2006년 영국의 핑크 산업 규모가 700억 파운드(약 1천억 달러)에 이른다는 보고서를 발간하였다. 동성결혼이 합법화된 14개국의 핑크 산업의 규모는 약 1조 달러로 추산되고 있는데, 이것은 국가를 이룰 경우 2013년 1분기에 추정한 GDP기준 인도네시아(9,463억 달러)보다 크고 한국(1조 2,585억 달러)보다는 조금 작은, 세계 16위의 경제 대국에 해당하는 규모이다. 2013년 미국의 성소수자 대상 자산운용 전문 업체인 ‘LGBT 캐피털(LGBT Capital)’사는 동성결혼이 합법화된 14개국을 포함한 전 세계 핑크 산업의 규모는 약 3조 달러로 추정되며, 가장 빠르게 성장하고 있는 시장은 중국이라는 보고서를 발간하였다.


세계의 핑크 산업 규모



2) 핑크 산업의 주요 분야


핑크 산업은 이성애자가 영위하는 전 산업군에서 함께 존재하지만, 2000년대 이후 가장 빠르게 성장하고 있는 산업군으로는 웨딩, 관광, 금융, 패션산업이 있다.


▲ 뉴욕 맨해튼의 전경. 뉴욕에서는 수십 곳의 성소수자 대상 개인 재무 컨설팅 그룹이 수만 명의 성소수자 고객들을 대상으로 토털 재무 컨설팅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 웨딩


동성결혼이 합법화된 국가의 경우 동성 커플의 결혼과 관련된 업종은 국가의 전 산업군 중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산업군 중 하나이다. 동성결혼이 합법화되었다는 것은 기존 결혼 관련 업체들에게는 새로운 블루오션의 시장이 열렸다는 것을 의미하고, 새롭게 비즈니스를 시작하려는 성소수자들에게는 이전에는 없던 신시장이 개척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영국의 경우 2005년 ‘시민 동반자법’이 발효되어 동성 커플의 결혼식이 가능해지면서 성소수자 대상 웨딩 시장은 연평균 60%이상의 초고속 성장을 지속하고 있다. 성소수자들의 경우 이성애자에 비하여 결혼식을 성대하게 진행하려는 욕구가 크다고 알려져 있으며, 따라서 동성결혼이 합법화된 국가들의 웨딩 업계에서는 ‘이성애자 커플 둘보다 게이 커플 하나가 수익이 더욱 높다’는 것이 불문율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 관광


이성애자들에 비하여 높은 소비성향을 가진 것으로 알려진 성소수자들의 경우 여가 혹은 자아실현의 목적으로 여행에 대한 수요 역시 높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미국의 경우 적어도 수천 개의 게이 관광 취급 여행사들이 동남아시아의 태국에서부터 서유럽의 네덜란드에 이르기까지 성소수자에 대하여 관용적인 국가들을 여행하는 관광상품을 취급하고 있다. 게이 관광이 이성애자들의 관광과 다른 것은 여행 국가 주요 도시의 게이바, 게이클럽 등 게이 씬을 둘러보고 최소 하루 이상의 일정을 두고 성소수자 문화를 즐길 수 있도록 구성되었다는 것이다. 가장 빠르게 성장하고 있는 산업군은 중산층 이상의 남성 동성애자를 상대로 한 ‘게이 크루즈’로, 미국의 경우 싱가포르, 홍콩, 상하이 등 세계의 주요 항만으로 통하는 크루즈 라인을 확보하여 정기편을 운항하고 있다.


> 금융


금융산업이 고도로 발달한 뉴욕에서는 수십 곳의 성소수자 대상 개인 재무 컨설팅 그룹이 수만 명의 성소수자 고객들을 대상으로 토털 재무 컨설팅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이러한 컨설팅 그룹에서 일하는 컨설턴트는 대부분 고객들과 같은 성소수자로, 고객들은 이성애자 컨설턴트를 대할 때보다 더욱 편안한 마음으로 상담에 임할 수 있어 만족도가 대단히 높은 편이라고 한다. 동성결혼이 합법화된 국가들의 경우 이러한 재무 컨설팅은 주택 구입 컨설팅, 자녀 입양에 따른 양육 및 교육비 컨설팅, 은퇴에 따른 은퇴 컨설팅, 이혼에 따른 재정 자문 등 이성애자의 그것과 완전히 동등한 수준으로 고도화되어 있다. 이러한 서비스를 이용하는 남성 동성애자 커플의 경우 대부분 중산층 이상의 고소득 직장인이나 전문직종 종사자가 많은 것으로 알려져 있어, 성소수자 대상 개인 재무 컨설팅 그룹은 세계적인 금융위기에도 불구하고 흔들리지 않는 탄탄한 기반을 자랑하고 있다.


> 패션


전통적으로 성소수자 종사자가 많은 것으로 알려진 패션산업은 핑크 산업의 하나의 축을 이루고 있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그 위상이 높다. 성소수자, 특히 남성 동성애자의 경우 이성애자 남성에 비하여 의상 및 패션잡화 구입에 평균 30%이상 많은 지출을 하고, 트렌드에 특별히 민감한 것으로 알려져 있어 패션업계에서 이들은 브랜드의 성패를 알 수 있는 바로미터이자 주 마케팅 타겟으로 여겨지고 있다. 이 외에도 남성 동성애자인 남성복 디자이너를 위한 게이 모델 에이전시, 성소수자 디자이너를 양성하는 패션 스쿨 등 패션산업에서의 핑크 산업은 가장 다이나믹하고 다양한 형태로 진화하고 있다.


3) 한국의 핑크 산업


한국의 핑크 산업은 최근에 이르기까지 표면으로 드러나지 않은 미지의 영역이었다. 유수의 은행들이 보고서를 발간할 정도로 외형적으로 거대하게 성장하였을 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널리 인정된 서구의 그것과는 달리, 한국은 ‘동성애’를 터부시하는 사회 분위기, 상대적으로 결속력이 약한 성소수자 커뮤니티 등의 원인으로 인하여 핑크 산업에 대한 공개적 언급은 시작되지조차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하지만 한국에서도 1970년대부터 서울의 낙원동과 이태원에 위치한 소수의 게이바들을 필두로 초기 형태의 핑크 산업이 태동하기 시작하였다. 1990년대 초반 성소수자 권리보장 운동이 시작되며 이러한 술집과 클럽 위주의 핑크 산업 규모는 점차적으로 확대되기 시작하였고, 2013년 현재 이들 주요 게이 씬에서는 적어도 수백 곳의 게이바와 클럽들이 성업중에 있다. 성소수자 전용의 커뮤니티 웹사이트, 속옷 및 성인용품 판매점 등 업종의 다양화 역시 분명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 2013년 퀴어문화축제는 사상 최초로 비 성소수자 커뮤니티, 그것도 지역의 비즈니스 이익을 대변하는 커뮤니티의 지지 속에 성대하게 개최되었다.



지난 2013년 6월, 홍대에서 열렸던 퀴어문화축제는 그동안 숨겨져 있었던 한국의 핑크 산업이 사회의 전면으로 드러날 수 있는 작은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이 축제는 사상 최초로 성소수자 커뮤니티가 아닌 비 성소수자 커뮤니티(홍대 걷고싶은 거리 상인회)의 지지를 얻어 성사되었다. 행사장 주변의 음식점, 술집 등 각 업소들에서는 축제를 지지한다는 의미의 무지개 깃발을 내걸어 수많은 성소수자 고객들을 흡수하였다. 이것은 단순히 비 성소수자로서 성소수자를 지지한다는 원론적인 차원을 넘어서, 비즈니스적 측면에서도 성소수자 고객들을 편견없이 상대하는 것이 이익이 된다는 것을 비 성소수자 커뮤니티가 인지한 결과라는 점에서 이전의 지지와는 다른 것이라 평가할 수 있다.


‘핑크 산업’의 정의가 ‘성소수자가 영위하는 모든 종류의 산업’이 아닌 ‘성소수자를 대상으로 비즈니스를 영위하는 모든 종류의 산업’이라는 것을 곱씹어 볼 때, 핑크 산업의 양적, 질적 성장을 위해서는 성소수자 커뮤니티뿐만 아니라 사회 전반의 동성애와 성소수자에 대한 인식이 제고되어야 한다는 것은 자명하다. 이번 퀴어문화축제를 통하여 하나의 비 성소수자 커뮤니티가 성소수자를 존중하는 것이 보편적인 인권 증진이란 명분뿐만 아니라 자신들의 이익에도 부합하다는 것을 인지하였다면, 그것이 둘, 셋, 나아가 사회 전반이 되도록 하는 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또 다른 과제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