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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지개문화읽기

<비토루소>를 통해 미국 성소수자 문화정치사 리뷰하기

by 행성인 2013. 7. 18.

웅 (동성애자인권연대)


으레 운동의 역사를 다룬 다큐멘터리라면 문제의 배경과 더불어 구호가 만들어지고 조직되기 까지의 과정에 대한 정보를 제공할 것이라는 기대가 따르기 마련이다. 하지만 좀 더 주의를 기울인다면 주장의 명분을 넘어 증언과 기록을 통해 운동의 구호 속에 스며들어 있는 삶의 주름들이 관객의 눈을 사로잡을 것이다. 이를 고려한다면 관객들을 단순한 기록 관찰자로 평가할 수는 없을 터, 매순간 투쟁해야만 하는 삶의 기록을 보고 듣는 관객의 위치는 생존자의 증언, 희생자들의 기록들에 노출될 수밖에 없다. 구호에 아로새겨진 슬픔과 분노는 어쩌면 시공의 거리를 가로질러 지금 여기 있는 우리를 가능케 했는지 모른다. 더욱이 그것이 침묵과 망각 속에 있던 목소리들일 경우, 영화를 보는 행위는 그 자체 만으로 이슈에 동참하는 집단적 실천으로 가치매겨지기도 한다. 관객들은 그들로부터 비판적 거리를 두면서도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필름의 리듬과 호흡을 같이하면서 타인의 삶에 귀 기울이고 나아가 자기 삶을 반성하며 현재를 재고할 수 있게 된다.


올해 영화제에 선보인 <비토>는 20세기 중반 이후 미국의 성소수자 운동의 궤적을 소재로 하는 작품이다. 제프리 슈바르츠(Jeffrey Schwarz)가 2011년 감독한 다큐는 비토루소(Vito Russo, 1946-1990)의 삶을 골자로 성소수자 운동을 술회한다. 왜 루소인지에 대한 질문은 차치하더라도, 왜 이제와 과거의 운동가를 다큐로 제작한 것일까? 물음들을 심중에 담아 아래 쓰여질 문장들은 영화 리뷰의 테두리 안팎에 걸치게 될 것이다.


  영화 <비토>영화 <비토>


비토루소의 이름에는 게이운동가, 에이즈운동가, 방송인, 학자, 문필가 등의 다양한 이력이 따라붙는다. 이른바 전방위적인 플레이어인 셈인데, 그의 생애 역시 몸담은 분야만큼이나 역동적이다. 가령 게이로서 비토의 삶은 스톤월항쟁과 성소수자해방운동, 에이즈 위기와 투쟁의 역사에 걸친 20c 중후반 미국의 성소수자 역사 위에 있다. 더불어 영화연구자로서 비토가 주목한 영화 속 동성애자의 모습은 그보다도 훨씬 이전인 에디슨의 영화발명시절부터 60년대까지 아우른다.

 

한 세기에 걸쳐 있는 그의 활동영역을 한 작품에 담기 위해 감독은 인터뷰 영상, 회고, 방송자료, 영화자료 등 영상기록들을 콜라주 한다. 루소를 주인공으로 삼고 있음에도 감독은 그의 개인사에만 초점을 두기보다 생애전반에 걸쳐있는 운동과 연구의 이력을 당시 성소수자 문화사에 편집해 넣는 명민함을 보인다. 이른바 <비토>에는 비토루소의 생애와 동성애자 해방의 투쟁사가 날실과 씨실처럼 직조되어 있다. 경찰이 수시로 이반바를 습격하여 동성애자들을 체포와 구류의 대상으로 낙인찍고 연일 동성애를 비난하는 미디어와 영화가 생산되는 환경 속에서 그의 생애는 투쟁으로 구축되어있고 투쟁을 통해 단단해져 간 공동체의 일원으로 자리매김한다. 그런가하면 줄곧 파트너와 동료들을 집에 초대해서 파티를 열고, 파트너 수가 자유의 척도와 비례한다는 시대정신 아래 활발하게 교제를 즐겼던 그의 '편력'은 이후 성소수자운동의 주축 활동가로서 운동을 조직하는 '활력'으로 이어진다.

 

특히 게이해방전선(Gay Liberation Front; GLF)의 흥망성쇠는 루소 생애에 굵직한 시기로 배치된다. 영화는 스톤월 이후 대표적인 운동단체였던 게이해방전선의 기록필름들을 삽입하여 활동의 현장을 보여준다. 가령 이들의 대표적인 활동은 ‘점거’였다. 'Zaps'로 일컬어진 그들의 시위방식은 모니터링을 통해 혐오발언이 생산된 언론사와 공공기관을 떼로 찾아가 구호를 외치며 춤추고 노래하는 것이었다. 영화는 잡지 Harper's 에 조셉 앱스타인의 동성애혐오적 발언('내게 힘이 있다면, 동성애자들을 지구 밖으로 날려버리겠다.')이 실리면서 잡지사를 점거했던 이벤트나 동성결혼에 대한 뉴욕시 직원의 비난에 남녀 동성커플인형들을 각 한 쌍씩 위에 올린 케이크를 들고 사무실을 점거한 영상을 보여준다. 소방서(firehouse) 건물을 렌트하여 본부로 삼았던 게이해방전선의 투쟁은 인정과 동화의 요구를 넘어 고용차별과 동성결혼반대 등 사회적 차별에 대해 반대운동을 벌이며 사회변혁을 지향한다.

 

그러나 단체는 내부 분열을 피할 수 없었다. 72년 집회영상은 불화가 과열되는 당시 분위기를 전한다. 여기에는 당시 사회를 보았던 비토의 당황하고 실망하는 모습 또한 고스란히 전달된다. 드랙퀸과 레즈비언페미니스트의 분노어린 발언들이 시위참가자들의 야유 속에 묻혔던 상황은 게이해방전선의 운동이 특권적인 게이들의 손아귀 아래 놓였음을 보여주는 단면이다. 분열이 극에 달해 아수라장이 된 시위장을 (당시 게이 사우나에서 줄곧 공연을 가졌던) 여가수 벳 미들러(Bette Midler)가 한순간 정리하는 장면은 흥미로웠지만, 게이해방전선은 74년 방화 소실된 그들의 소방서 본부처럼 해체일로를 걷는다.

 

게이해방전선의 해체 이후 영화는 다시 루소의 생애로 돌아온다. 분열과 불화 이후 에이즈위기를 맞는 성소수자운동의 정황을 설명하기보다 이로부터 거리를 둔 채 그가 천착한 영화연구에 초점을 맞추는 것 또한 작품 속 하나의 터닝 포인트이다. 동성애자운동을 따라 길거리로 나온 카메라는 다시 그들의 공간으로, 그의 '벽장'으로 침잠한다.

 

어린 시절부터 영화에 매혹되어 시네필을 자처해온 루소는 뉴욕 현대미술관에서 영상자료를 담당하면서 수많은 영화들을 섭렵할 수 있게 되고, 필름 속 동성애자들이 재현되어온 모습들을 연구주제로 다루기에 이른다. 81년까지 10여 년 간 연구해온 그의 연구 결과물은 단행본 The Celluloid Closet으로 출간된다.

 

루소의 연구는 잊혀있던 필름의 조각들을 재조합하여 셀룰로이드에 각인된 벽장, 전형화된 동성(연)애자의 역사적 계보를 재구성하는 것에 다름 아니었다. 그의 연구를 반영하는데 있어 감독은 영화의 특성을 십분 살리는데, 영화는 30년대 이전부터 60년대에 이르기까지 필름 속 동성애자의 모습들을 하나하나 수집하여 짤막하게 편집하여 조합한다. 이른바 문자로 쓰인 영화 속 동성애자 재현의 역사를 다시금 영상으로 탄생시키는 것이다. 이른바 '영화 속 책'에 가까운 액자형 구성으로 <비토>는 영화의 발생부터 등장하는 필름 속 동성애자의 모습을 압축적으로 전개한다. 초기 심미적이고 독특한 말투를 사용하며 소심하고 색골의 기질을 노골적으로 보이던 동성애자의 이미지는 30년대 대대적인 검열 아래 사라지고 암시적으로만 드러나게 된다. 이후 세계전쟁과 이데올로기 대립이 강화되면서 동성애자의 이미지는 경계 위에서 경계를 어지럽히는 존재로 자리매김하며 사이코패스, 범죄, 복수, 오염의 표상으로서 도덕적 여과망에 걸러진다. 영상을 통해 소개되는 시각자료들은 비영어권 관객들에게 문자적 설명보다 쉽게 다가오는 이점을 갖는다.

 

그에게 집필의 시간은 심정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어려운 시절이었을 터, 영화는 집필에 필요한 시간과 돈을 벌기 위해 사우나 카운터를 보던 비토의 ‘흑역사’ 또한 조명한다. 젊은 시절 쾌락의 장소였던 사우나가 후일 생계를 위한 장소로 자리바꿈하는 지점이 그의 어느 생애보다도 절절하게 다가왔던 것은 나의 개인적 감상일까. 산산이 부서진 성소수자 운동에 실망과 좌절을 겪고 운동판과 거리를 두면서 연구의 시기로 눈을 돌린 그는 운신의 폭을 좁히지만 여전히 공동체 한가운데 있다. 과열된 불화에 튕겨나갈 수밖에 없었던 말의 파편들은 필름파편들로 치환되어 모자이크처럼 하나의 작품아래 꿰어진다. 동성애자들의 얼굴들을 발굴하고 그러모아 재조합하는 비토의 연구는 애초 3년을 예상했지만 연구의 결과가 나오기까지는 10년을 훌쩍 넘겨야했고, 연구가 완성된 후에도 출판사들의 연이은 거절에 맞닥뜨려야 했다. 어렵사리 출간된 The Celluloid Closet 은 베스트셀러로, 이른바 대박이 난다.

 

이후 그는 전국을 순회하며 대학과 극장에서 강연을 이어가고 미디어에도 손을 뻗어 활동의 폭을 넓힌다. 일찍이 영화에 그려진 여배우들의 디바적 면모에 열광하고 동성애자들의 재현양상에 열정적으로 가져온 비토는 투쟁하는데 있어 미디어의 중요성을 느꼈던 것이다. 그는 배우 릴리 톰린(Lily Tomlin)과 친분을 쌓으며 그녀의 커밍아웃을 지지하는가 하면, WNYC TV방송에서 자신의 프로그램 <Our Time>을 진행하고, 85년에는 GLAAD(Gay and Lesbian Alliance Against Defamation)를 결성하여 주류 미디어에서 LGBT가 어떻게 재현되고 있는지를 모니터링한다. GLAAD 미디어 어워드는 방송과 미디어, 영화 속에서 성소수자들이 어떻게 재현되고 있는지를 모니터링하고 시상하는 미국 내 대표적 행사로 지금까지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사회운동과 방송을 병행하면서, 혹은 방송을 통해 사회운동의 장을 넓히고 사회운동을 방송으로 옮겨내는 비토의 팔색조적 활동 가운데 다시금 영화는 비토의 개인사, 애인 제프리 세빅(Jeffrey Sevick)과의 관계를 삽입한다. 그러나 그들의 행복도 잠시, 세빅이 에이즈합병증으로 사망하고, 그 또한 85년 감염이 되면서 다시금 영화는 비토의 액트업 활동에 비중을 옮긴다. 구성원의 목소리를 높이기 위해 중요한 것이 여론형성이고, 따라서 매체가 운동의 주요한 수단이 될 수 있음을 이미 간파했던 루소의 활동은 당시 칼럼니스트이자 극작가이고 액트업의 또다른 설립자인 래리클래머(Larry Kramer)를 비롯한 많은 활동가들의 입장과 뜻을 함께한다. 그럼에도 자신의 아픈 몸을 보이면서 방송을 중단하지 않고 시위현장에서 목소리를 높인 루소는 여느 활동가들보다 열성적이었고 에너지가 넘쳤다고 동료들의 입으로 평가된다. 마지막방송을 하던 그의 모습은 에이즈합병증으로 죽음의 문턱에 서있지만 중단 없이 녹화를 끝낸 그의 근성으로 각인된다.

 

젊은 시절 파트너 수를 성적 해방의 지수로 받아들일 만큼 왕성했던 그의 에너지 넘치는 친화력과 나서기 좋아하는 성정은 영화연구를 거치며 성소수자 운동의 리더십으로 연결된다. 한편 어린 시절부터 길러온 영화에 대한 사랑과 열정은 이후 연구의 동력이자 운동에 미디어를 활용하는 지략으로 이어진다. 어쩌면 영화는 그의 개인적 면모와 공적 역사가 적절히 결합된 ‘롤모델’이라는 점에 착안했는지 모른다. 2차 여성해방운동의 기치였던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다’ 문구처럼, 영화는 루소의 생애를 성소수자 역사에, 운동을 선택할 수밖에 없도록 만든 배경에 접목시킨다. 이는 운동이 운동의 틀 안에서만 읽힐 수 없음을, 삶이 투쟁이 될 수밖에 없는 환경 속에서 운동은 삶의 방식일 수밖에 없음을 보여주는 대목일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의 삶과 운동의 역사를 교차시켜 읽어내는 독법을 주지하며 처음 제기했던 물음과 마주해야 한다. 왜 이제와 비토루소를 이야기하는가? 에이즈 위기가 훨씬 지난 지금, 미연방법원에서 가족보호법을 위헌으로 판결하고 동성결혼이 제도적으로 인정되는 국가와 지역들이 늘어나고 있는 지금 왜 과거의 성소수자 운동가, 에이즈 운동가를 이야기하는가? 특히 서구의 동성애자운동이 낯선 국내의 관객들, 연일 성소수자 혐오적인 보수진영의 구호와 점차 조직을 넓혀가는 LGBT운동이 맞서고 있는 한국사회에서 과거의 미국 활동가를 주제로 다룬 영화는 어떻게 읽힐 것인가? 필사적인 운동의 경험을 갖고 있지 않은 젊은 세대들에게 운동의 역사를 알리고 자신의 삶을 일궈내는 시도들이 중요함을 일깨우고 싶었다는 감독의 의도를 문자 그대로 해석하여 낡은 교훈 정도로 받아들이는 것은 성급한 봉합이 될 것이다.

 

영화는 사회적 배제와 소외, 낙인으로부터 비롯한 분노와 슬픔을 어떤 방식으로든 풀어내야 했던 시절, 운동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절박함의 기억을 전달하기 위해 비토루소라는 걸출한 인물을 지렛대삼아 조직과 전략의 과정을 보여줄 수 있었다. 비토루소의 특정 인물에 시선을 둔다면 학식과 리더십을 겸비한 운동가에 대한 낭만어린 향수에 응할 수 있을 것이고, 투쟁의 역사에 집중한다면 면면이 이어져온 성소수자운동에 동참하라는 메시지를 발견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들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보다 근본적인 읽기의 시도가 요구되지 않을까. 이를테면 과거의 호흡을 현재로 끌어내는 작업을 통해 우리의 삶이 역사 내부에 역사 자체로서 구축되고 있음을 깨닫는 것, 타인의 삶을 어떻게 읽을지 고민하고 지금 우리의 삶을 어떻게 일궈야 하는가에 대한 지속적으로 반성과 고민을 실천하는 것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