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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지개문화읽기

김수용 감독의 <시발점>에 나타난 탈이성애규범성을 향한 남성들의 욕망

by 행성인 2013. 7. 18.

김경태 (동성애자인권연대)



1960년대 후반, 김수용 감독은 일련의 작품들, 즉 <안개>(1967), <피해자>(1968), <시발점>(1969) 등을 통해 여성과의 정상적인 성적 결합에서 이탈하는 남성들을 탐구했다. 당시 박정희 정권 체제하에 고도성장의 동력으로 강조된 근대적 가부장의 엄격한 이성애규범성은 그 기준에 부합하지 못하는 많은 남성주체들을 남성성이 결핍된 남성, 혹은 여성화된 남성으로 낙인찍었다. 이성애적으로 보이고 이성애자가 되기 위한 이성애규범성의 지령에 따르면, 재생산이 가능한 섹슈얼리티에 대한 위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다시 말해 순수하게 이성애적인 것으로서의 재생산이 가능한 섹슈얼리티를 재현하기 위해서는 두 개의 명확하게 대립적인 성이 필요하다. 동성애뿐만 아니라 일부다처제와 삼각관계처럼 표준에서 벗어나는 섹슈얼리티 형태들은 보다 쉽사리 폐기될 수 밖에 없다. 물론 두 개의 대립적인 성은 서로가 서로에게 이끌리는 남자와 여자가 만나야 완전한 것이며, 남성과 여성이 명확하게 정의되어 있어야만 한다. 이때, 이성애규범성은 특정 사회가 여성성보다는 남성성을 어떻게 규정하고 있느냐에 따라 정의 내려지는 경향이 강하다. 따라서 주도적 남성성에 발생하는 균열은 고착된 이성애규범성의 붕괴를 알리는 첫 번째 신호이다. 


김수용 감독은 그런 이성애 규범이 부과하는 남성성에 어긋나는 남성들을 영화 속으로 소환해 이성애적 관계에서 수동적이거나 나아가 동성 성애적 욕망까지 표출하는 불온한 인물들로 묘사한다. 여기에서는 앞서 언급한 영화들 중, 한국영화 최초로 동성 성애 장면이 삽입되어 있는 영화인 <시발점>을 통해 이성애규범성에 대한 저항의 몸짓으로만(!) 존재할 수 있던, 그리하여 엄격한 검열의 잣대를 피할 수 있었던 동성 성애가 동시대의 풍경과 어떻게 조응하며 새로운 남성성의 구축에 대한 의지를 표명하고 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이청준의 단편소설 ‘병신과 머저리’를 영상으로 옮긴 <시발점>은 의사인 ‘영훈(신성일)’과 그의 동생인 화가 ‘상훈(이순재)’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상훈은 애인과의 관계에서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다 결국은 다른 남자에게 그녀를 빼앗기고 만다. 한편, 영훈은 자신의 실수로 죽어버린 어린 환자에 대한 자책감으로 더 이상 환자를 돌보지 않고 술에 의지하며 과거 일제 강점기 학도병 시절 만주 전투에서 낙오되었던 경험을 바탕으로 소설을 쓰는 일에 몰두한다.  



영상 1


이 영화는 남성들과의 권력관계에 초점을 맞춰 탈이성애규범적인 남성성을 확립하고 있다. 남성 주인공들에게는 여성을 향한 적극적인 구애행위는커녕 부정적인 교합작용조차 부재하고 있다. 대신 남성성의 회복에 대한 의지는 그림을 그리거나 소설을 쓰는 등의 예술 창작의 태도로 승화되어 있다. 어느 날 밤, 상훈의 애인인 ‘혜인’이 자신을 스토킹해 오던 남자에게 강간/삽입을 당할 위기에 처한다. 이를 저지하려는 상훈에게 스토커는 혜인을 먼저 안아보라고 조롱하지만 머뭇거리던 그는 그 스토커의 강간을 방조한 채 달아난다(영상 1 참조). 후에 혜인이 자신을 강간한 남자와의 결혼을 결심하면서, 이 영화에서 강간이 가진 의미는 범죄의 테두리를 벗어나 ‘여성에 대한 가장 적극적인 구애활동’, 즉 이성애적 결합을 위한 남성성의 가장 극단적인 표출로 전유된다. 따라서 상훈이 그 강간 현장으로부터의 무책임한 도주는 그러한 강인한 남성성의 강요에 대한 거부의 몸짓이자 자신만의 남성성을 지키려는 발악이다.   



 영상2


<시발점>에서 영훈이 자신을 주인공으로 해서 쓰고 있는 소설에는 일본인 상관 ‘다나카’와 동료 한국인 ‘기무라’가 등장한다. 기무라는 절뚝거리며 대열에서 뒤처지고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상관 다나카는 그의 엉덩이를 매질한다. 후에 밝혀지듯, 다나카는 납득할만한 표면적인 이유 없이 마치 새디스트처럼 상습적으로 기무라를 괴롭힌다. 뒤이어 영훈을 지목하여 그에게 몽둥이를 넘긴다. 그의 명령에 따라 영훈은 있는 힘껏 기무라의 엉덩이를 때린다(영상 2 참조). 그런데 이것이 영훈의 꿈으로 밝혀지면서, 그의 기무라를 향한 무의식적 욕망이 드러난다. 그렇다면 과연 영훈은 다나카의 새디즘적 욕망과 동일시하며 기무라를 학대하고 싶었던 것일까? 이에 대한 확답을 내리기 위해서는 우선 기무라의 욕망부터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다. 


다나카의 괴롭힘에 기무라는 매번 끝까지 용서를 빌지 않으면서 더 많은 매질을 자초한다. 기무라에 따르면 그것은 일본인 다나카로 환유된 군국주의나 악에 대한 승인을 거부하려는 (소극적이고 수동적인) 저항의 몸짓이다. 그리고 다나카가 그의 사과를 통해 얻고자 하는 것은 더 큰 쾌락이다. 새디스트는 맞는 것을 즐기는 매저키스트가 아니라 매질을 극단적으로 거부하고 두려워하는 사람에게서 진정한 쾌락을 느끼기 때문이다. 결국 침묵하며 묵묵히 매를 맞는 그에게 다나카는 항복하고 만다. 새디스트로서의 그는 기무라가 주도하는 매저키즘적 상황에서 결코 괘락을 찾을 수 없음을 인정한 것이다. 엄밀히 말해, 이 매맞는 상황을 온전히 통제하고 있는 주체는 다나카가 아니라 고통-쾌락이라는 매저키즘적 요소(군국주의에 대한 저항이라는 자기만족)를 획득한 기무라이다. 따라서 앞서 영훈이 기무라에게 매질을 한 것은 그가 새디스트이기 때문이 아니라 기무라가 주도하는 동성애적인 매저키즘적 상황에 합류하여 쾌락을 느끼기 위해서이다. 이청춘의 원작소설에서는 그가 직접 매질을 하지는 않지만, 그 ‘기이한 싸움’을 구경하며 ‘이상한 흥분과 초조감에 몸을 떨면서 더 세게 더 세게라고 매질을 재촉했다’고 쓰여 있다. 즉 여기에서 그가 고통-쾌락을 느끼기 위해 동일시한 것은 매를 때리는 쪽이 아니라 매를 맞는 쪽이다.  


한편, 기무라가 매맞는 동안에 그의 엉덩이는 클로즈업을 통해 자주 노출된다. 그리고 매질이 끝나고 시간이 흐른 시점에서는 다나카가 그의 아픈 엉덩이를 손바닥으로 장난스럽게 때리는 희롱을 하며 자신이 준 약은 잘 바르고 있냐며 묻는다. 이처럼 영화는 매저키즘적 욕망에서 출발해 기무라의 대상화된 엉덩이에 리비도를 집중시켜나가며 그를 둘러싼 성적 긴장감을 축적해간다. 또한 이것은 곧이어 나올 항문 성교의 복선 역할을 한다. 

   


영상 3


만주 전투에서 살아남은 그 세 사람은 산속 동굴 속에서 함께 고립된 생활을 하게 된다. 그 밀폐된 공간에서 '엉덩이'를 둘러싼 욕망은 보다 뚜렷해진다. 다나카는 영훈을 덮치려다 실패하고 그 대신 다리를 다쳐 저항이 여의치 않는 기무라의 항문에 삽입한다(영상 3 참조). 그것은 곧 부상당한 기무라의 '쓸모'가 되어 그가 생명을 부지할 수 있는 유일한 근거가 된다. 상훈이 강간당하는 혜인을 지켜보기만 했듯이, 영훈은 성적 노리개로 전락한 기무라를 방관하고 있을 뿐이다. 그는 다나카처럼 기무라의 항문에 삽입하며 동성 성애적 욕망을 적극적으로 드러내지도 못하고, 다나카의 성기를 기무라의 항문에서 떼어놓지도 못한다. 물론 자신의 항문을 그들에게 허락하지도 않는다.

 

라즈 요세프에 따르면, 남성 동성애자들은 서로 다르게 항문과의 관계성을 가진다. ‘항문애(anality)’는 남근적 남성성의 파괴라는 측면에서 그들에게 중요한 부분이다. 항문 성교에서 동성애자들은 남근적 지배와 권위의 판타지와 완전히 반대되는 거세와 수동성을 경험한다. 삽입당하는 수동성을 통해 남성 동성애자 주체는 남근적인 남성 육체의 위반과 전복을 경험한다. 따라서 남근적 남성성은 그 수동성을 거부해야만 남성 동성애에 존재할 수 있다. 더욱이 군부대와 같이 강한 남근중심적인 공동체에서 여성처럼 삽입을 당하는 것은 남성으로서의 죽음을 의미한다. 


기무라는 순순히 엉덩이를 다나카에게 내주지만, 단순한 매질이 아닌 성기의 삽입을 허락하면서 그 의도와 내포적 의미는 전혀 달라진다. 저항의 의지를 불태우며 엉덩이의 매질을 견뎌냈던 기무라가 마침내 저항을 포기한 채, 오로지 생존을 위해 모든 굴욕을 감내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한다. 그는 자신의 이러한 태도가 진리이며 더 순수한 모습이라고 스스로를 합리화 한다. 그러나 살고자 하는 욕망으로 항문을 다나카에게 내맡기는 순간, 남근적 남성성의 상실이라는 상징적인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다. 반면에 영훈은 기무라처럼 성적 욕망의 관계망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지도 않으면서 일본의 군국주의에 대한 저항의 몸짓도, 살아남고자 하는 처절한 몸부림도 보여주지 않는다.


이제 이들의 동성애적 관계에서 치욕스러운 부분은 동성 성애 자체가 아니라 동성 성애에서의 ‘피삽입자’라는 수동적인 역할을 맡는 다는 것이다. 가부장 사회에서는 그 능동적 남성성을 포기하지 않을 때에만 동성애가 허용될 수 있다. 아마도 영훈이 그 삽입/피삽입의 유희에 동참하지 않는 것은, 다나카와 기무라의 외양적 동성 성애에도 불구하고 그 내면에 거세된 남성과 남근적 남성이라는 역할 구분이 이성애규범성을 반복 및 변주하고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욕망은 이미 ‘이성애규범성으로 인해 굴절되어 있다. 아무런 성애적 전희도 없이 항문에의 삽입에만 몰두하는 다나카의 일방적 쾌락과 삽입당하는 자로서의 쾌락을 부정한 채 그것을 살아남기 위한 굴복으로 취급하는 기무라의 불쾌는 모두 영훈의 지향점과 어긋난다. 거기에는 영훈이 꿈꾸는 탈이성애규범적인 새로운 남성성이 개입될 여지가 없기에 삽입하느냐, 혹은 삽입당하느냐의 동성애 게임에서 스스로를 격리시키며 선택을 유보하고 있다. 

 

결국 이 영화 속 소설은 쓸모가 없어진 기무라를 다나카가 직접 죽이고 영훈이 그런 다나카를 처치하는 것으로 결말을 맺는다. 영훈이 두려워 한 것은 그 ‘쓸모’가 자신에게로 전이되는 것, 즉 애정 없는 삽입을 위한 도구로 전락하는 것이다. 사실 그가 시급하게 단죄해야할 대상은 주체할 수 없을 만큼 강한 남성적/새디스트적인 성욕을 분출하는 다나카였다. 영훈은 ‘같이 살자. 난 아직도 네가 필요하다’라는 다나카의 적극적인 구애에도 불구하고 그를 사살한다. 물론 그런 다나카의 욕망에 부합하며 부적절한 관계를 맺은 기무라에게도 일말의 질책은 필요했다. 영훈은 상훈의 바람과 달리 기무라를 직접 자신의 손으로 죽이지 않고 죽게 내버려두는 선택을 하면서 기무라에 대한 복잡한 애증의 감정을 드러낸다.  


동생 상훈이 이성 성애를 선택하지 않은 것처럼, 형 영훈은 동성 성애를 선택하지 않는다. 그들은 영화 속에서 그 누구와도 섹스하지 않는다. 그들의 행동반경 안에서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것은 그들의 텅 빈 성적 욕망, 혹은 부정성(否定性)이나 지향성으로만 존재하는 성적 욕망이다. 그것은 이중의 부정이라 볼 수 있는데, 능동적 삽입을 통한 남근적 남성주체의 완성을 거부하면서 동시에 피삽입으로 인한 내면적 여성성의 외화나 여성적 지위로의 하락 가능성도 거부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기존의 이성애규범성 안에 갇힌 남성성에서 벗어나 새로운 남성성을 구축하기 위한 최소한의 윤리적 선택이다. 



● <시발점>은 한국영화VOD(http://www.kmdb.or.kr/vod/vodMain.asp)에서 볼 수 있습니다. 이 글에 삽입된 동영상은 스트리밍을 캡처해서 사운드가 불완전합니다. 양해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