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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지개문화읽기

발아하는 커뮤니티 불야성 - 성소수자 커뮤니티 산보하기

by 행성인 2016. 1. 30.


웅(행동하는성소수자인권연대)



* 표제이미지 출처: 6699press,『여섯』중 (링크: http://6699press.tumblr.com/)



1

지난 8월, 미술잡지 <아트 인 컬처> 온라인 기사[각주:1]는 성소수자 콘텐츠 전문 예술 공간의 증가를 다루며 성소수자 커뮤니티의 상기된 분위기를 시의성 있게 포착한 바 있다. 말마따나 2015년은 타임라인을 다시 그려보고 싶을 정도로 성소수자 관련 행사와 콘텐츠가 쏟아져 나왔다. 물리적 공간은 일상의 리듬을 바꿨다. 7월 초 프라이드페어를 갔다 청량엑스포의 <Qbject>에 전시된 굿즈며 출판물들을 보고 며칠 뒤 플라토 미술관에서 열린 엘름그린&드라그셋 전시 <천 개의 플라토 공항>에 트루바다(Truvada) 약통 이미지를 보고 혼자 키득거린 기억, 10월 어느 날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열린 <올해의 작가상 2015> 전시에 '사각지대'를 찾는 오인환 작가의 작업을 보고 이태원으로 넘어가 햇빛서점을 들러 책구경을 한 뒤 클럽에서 정신줄을 놨던 동선은 그간 주말 저녁에 국한되었던 종태원의 지도를 다시 그리게 만들었다. 평일에도 낮이면 허핑턴포스트코리아의 ‘Gay Voices’ 섹션을 비롯하여 SNS에 번역·공유되는 해외 LGBTIQ 뉴스를 구독하고, 팟캐스트를 틀고 ‘로맨스는 없다’를 정독하며 하루를 마무리한다. (책상 위엔 갓 번역된 퀴어 이론, 성소수자 인권 서적들이 쌓여만 가고...) 2015년은 부스마다 진열된 상품들의 퀄리티가 부쩍 높아진 해이기도 했다. 여느 해보다 참가단체가 많은 퀴어퍼레이드는 ‘굿즈’의 향연이 펼쳐졌다. 프라이드페어에서는 부스마다 던지는 야들야들한 서비스멘트에 얇은 지갑을 탈탈 털었다. 게이 타깃 속옷 쇼핑몰에서는 SNS에서나 몰래 보던 근육 오빠들이 탄력 터지는 윤곽으로 팬티 사라고 달콤한 눈길을 던진다. 바야흐로 성소수자 사회에도 핑크산업의 기운이 감도는 걸까.


일련의 변화는 소싯적 품었던 풍경과 사뭇 다른 모습이다. 한때 게이성년이 되면 빌라와 크루즈에서 뷔페처럼 사람들을 골라서 만나리라 꿈꾼 적이 있다. 기업화될 핑크산업을 미리 개탄하며 나는 속물이 아니라 가르마 타던 철없던 시절도 있었다. 근미래적 전망은 비슷하지만 다른 그림으로 현실이 되었다. 4백미터짜리 크루즈는 없지만 4인치 스마트폰 잭디와 그라인더로 사람을 고른다. 찜질방과 사우나라는 옵션도 있다. 나도 모를 어딘가엔 퀴어빌라가 있을지 알 수 없지만, 가까운 거리에 살고있는 몇몇 성소수자들은 십시일반으로 공동주택을 계획하고 실행에 옮긴다.[각주:2] 어떻게 밥벌이라도 하면 좋겠다는 소망이 고민의 순위권에 벗어날 여지가 없는 작금의 현실에서 영세한 커뮤니티 환경은 녹록치 않다는 생각도 든다. 혹여 남한의 정세처럼 국내 성소수자 사회도 양극화가 극심해져 다른 계급과 계층이 향유하는 성소수자 문화를 가늠조차 못하는 건 아닐까? 너무도 좁은 나의 퀴어라이프가 접근하지 못하고 있는 장소들도 많을 것이다. 다른 성별과 성적 지향 커뮤니티의 동선 또한 나와 다를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만나 관계를 맺고 동질성을 공유하는 커뮤니티의 범주, 우리의 공동체란 대체 어떻게 정의내릴 것인가.

 

쉽게 답이 나올 것 같지 않은 질문은 피하자. 적어도 여기서는 비교적 좁은 범주의 커뮤니티를 이야기하고자 한다. 커뮤니티는 관계와 접근성을 전제로 하며, 그 형성에는 인정과 지속의 욕망이 선결적으로 투여된다. 더없이 엉성하고 주관적인 관점은 최근 커뮤니티의 변화일면을 다루는데 한계와 의미를 모두 가질 터. 그렇다 하더라도 언급된 커뮤니티의 비일관성이 초래할 간극들, 커뮤니티 내부에 미처 포착하지 못한 풍경들과 얼굴들의 자리는 남겨두고 싶다.

 

철부지 로망의 답 없는 미련의 심연에 빠져들 만용은 잠시 접어두고, 여기서는 최근 커뮤니티 내부에 생산·제작문화가 가시화된 배경과 주목할 만한 결과물들을 나누면 좋겠다. 소소한 재미가 발견되는 최근의 경향은 소소함의 규모를 넘어 예전과는 다른 퀴어 라이프와 마인드를, 생애리듬을 형성한다. 커뮤니티의 변화를 논하려니 적잖은 무게감이 느껴지는데, 재차 반복하지만 이 글은 가벼운 접근을 추구한다. 객관적인 평가보다는 주관적인 경험과 감상에 기댈 것이며, 총체적인 조감도식 접근보다는 경향의 면면을 다루는 스트리트뷰 같은 글을 예감한다. 날도 추운데 두서없는 수다의 장이나 열어보자.


 

2

생각해보면 이전에도 이벤트와 콘텐츠들이 없던 건 아니다. 20여 년 전 <버디>를 거론하며 한국 성소수자 문화생산물의 역사를 되짚지 않더라도 출판물들은 꾸준히 나오고 있다. 구호가 들어간 버튼과 스티커, 재생지 연필 제작은 사업기획에 노상 체크해두었던 항목이다. 굿즈 역시 이전에는 ‘기념품’과 ‘상품’이라는 익숙한 이름으로 유통되었다. 대관절 굿즈로 새롭게 명명된 동기는 무엇이었을까.

 

낯선 언어를 살피기 위해서는 커뮤니티 바깥의 정황도 짚어낼 필요가 있다. 제작문화의 발흥은 비단 성소수자커뮤니티만의 현상이 아니다. 코믹월드나 팬덤시장 같은 하위문화에 자체적으로 제작·유통되던 굿즈가 보다 많은 사람의 입안에 오르내리기까지의 과정을 살피기 위해서는 몇몇 기점들을 돌아봐야 한다.

 

2010년 이후 미술시장의 냉각으로 2-30대 작가들의 미술계 진출이 가로막히면서 현장에는 눈에 띄는 변화들이 발생했다. 일례로 ‘신생공간’은 지난해 청년미술집단의 주요 키워드로 부상했다. 공간마다 다른 모델과 운영방식이 있겠지만, 미술계가 망하고 젠트리피케이션이 가속화되면서 사회진출은커녕 들어앉을 자리도 막힌 이들이 자력갱생으로 확보한 임시 공간 정도로 이해할 수 있겠다. 서울의 서남-동북 축에 산재한 장소들은 영세하고 한시적이지만, 스마트폰 앱 기반의 사회관계망으로 구축된 새로운 문화지형도는 유저들의 미감과 생(태)계 스타일을 조직해갔다.

 

(역시나 단편적인 기술일 테지만) 헤쳐모여를 반복하는 이들의 작업은 미술과 디자인, 문학과 연극, 음악과 퍼포먼스 등 온갖 문화예술장르에 포진되어 있다. 더러 생계를 위해 외부 비정규 용역으로 벌이를 삼기도 한다. 삶과 작업의 분절과 불일치 속에서 이들은 시간을 조율하고 유통과정 자체를 모델링한다. 어쩌다 한방은커녕 입성할 갤러리나 직장도 바늘구멍이 되어버린 판국에 박물관 소장품용이나 소수의 ‘금수저 컬렉터’를 상대로 작품을 생산하는 건 투자부담이 클 뿐 아니라 확률도 떨어진다. 하여 수익을 고려하지 않은 단발성 프로젝트나 접점이 높은 대중시장을 소비층으로 맞춰 제작·판매를 수행한다. 그 사이 하위문화의 기운이 문화·예술언어로 침투한다. 기념품도 작품도 아닌 것 같지만 다시 보면 둘 다 갖다 붙여도 될법한 이것을 두고 작가를 위시한 힙한 많은 피플들은 ‘굿즈’라 호명한다. 2015년 10월에 열린 <굿-즈> 전이나, 11월 이틀간 진행된 제7회 <언리미티드 에디션–서울아트북페어 2015>는 열광적인 호응과 대기인파를 기록하며 성황리에 막을 내렸다. 이는 파국이 되어버린 미술·출판·디자인 생태계에서 생계의 활로를 찾는 작가·제작자들에 동류의식을 느끼고 영감을 얻으며 헬조선 청년들의 감각을 공유할 수 있는 자리였다는 데 의의가 있다.

 

끝 모를 불황과 붕괴하는 예술시장의 반대급부처럼 문화·예술 향유의 접근성은 영세하나마 ‘만만해졌다.’ 세상의 망조에 익숙해지면서 어쩔 수 없이 자생을 택해야 하는 환경이 성긴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참여의 문턱을 낮춘 셈이다. 다분히 주관적인 해석일지라도 아주 틀린 이야기는 아니다. 중요한 건 변화한 환경 위에 하위문화의 언어가, 사회적 소수자들의 목소리가 틈입할 가능성이 높아졌다는 점이다.

 

‘창의적 하층계급(creative underclass)’[각주:3]이라고도 불리는 이들 문화·예술생산주체는 신자유주의경제 예술의 창의성을 착취하고 수탈하는 상황의 잔인성에 발 묶여 있다. 전지구적 자본시장의 반대급부로 지자체 마을재생사업에 동원되어 지가를 높이는데 활용되기도 한다. 하지만 저마다 처한 상황은 불평등한 사회관계, 지배도덕, 경제권력에 도전하고 저항하는 태도를 이해하는 데 시사점을 준다. 문화생산주체들의 사회적 몸부림은 빈곤과 수치심을 영속화하려는 외부의 불평등한 사회구조와 혐오의 기류를 의식하지 않는다면 불가능한 변화이다.

 

 

3

이들이 사회운동과 동류의식을 공유할 수 있었던 운동생태계의 변화 또한 주지할 필요가 있다. 보수정권의 오랜 집권 속에 진보정치와 이념운동은 ‘종북’과 ‘좌빨’에 대한 검열로 패퇴했다. 끝 모를 위기를 맞고 있는 사회운동진영에는 새로운 언어와 조직구조가 요청된다. 사회 불합리한 제도와 인식에 대한 투쟁은 빈곤과 장애, 이주민, 비정규노동자, 철거민 이슈와 같이 바닥에서 그러모아진 생존의 언어로 동력이 모였고, 풀뿌리운동에 결합하는 문화·예술생산주체들의 새로운 행동이 주목을 받았다.

 

비교적 역사가 짧은 성소수자운동은 사회적으로 성소수자가 가시화되지 않은 한국사회에서 통신커뮤니티의 형성과 함께 수면 위로 올랐다. 게토의 변태성행위자라는 가십거리로 온갖 오욕을 뒤집어쓴 성소수자 역사에서 운동은 태동부터 쉽지 않았지만, 그마저 이념의 질곡이 깊이 패인 한국사회에서 자율주의, 주변운동으로 치부되기 십상이었던데다 그마저 성적 뉘앙스와 질병에 대한 편견으로 오염되곤 했다. 하지만 주변적인 위상은 경직된 운동권문화로부터 자유로운 분위기를 누릴 수 있었고, 이는 새로운 조직모델을 고민할 토양으로 기여했다. 운동 내부 일부 경직된 도덕주의와 커뮤니티 안의 자기검열을 제한다면 성소수자운동은 자신의 성적 감수성을 드러내는데 여느 사회집단보다 적극적이었고, 커뮤니티 언어와도 밀접했다. 위기의 사회운동 속에서도 성소수자운동은 부침과 산재한 난관의 틈바구니에서도 해외 성소수자인권소식을 접하고 내부 역량을 키우면서 성장 기반을 닦았다. 그리고 최근 성소수자 커뮤니티의 이슈와 감수성이, 서사와 담론들이 성소수자 대중과 스파크를 내기 시작했다.

 

기실 지난 한해 성소수자 커뮤니티에는 출판, 디자인, 전시, 상품, DIY 등 생산물과 더불어 이들이 유통될 수 있는 채널들이 여느 때보다 질적·양적 풍요를 누렸다. 성소수자가 운영하는 공간들이 생활지도를 새롭게 짜나가는가 하면, 크고 작은 단위들이 친목모임부터 점조직, 생산 집단, 활동단체에 이르도록 만개했다.

 

커뮤니티 내부 상이한 집단들이 접점을 찾아 생산물을 만들어온 현상이 비단 최근 부각된 건 아니다. 이미 전부터 성소수자인권단체들을 중심으로 문화콘텐츠들이 기획되고 생산되었다. 영화와 책은 인권운동과 문화·예술생산을 접목하고, 이슈와 대중 간 접점을 찾는 대표적 콘텐츠였다. ‘소셜펀딩’은 콘텐츠를 생산하기 위해 커뮤니티에 사업을 소개하고 내부 자원을 모아냈던 익숙한 방식이었다. 이는 행사도 예외가 아니다. 대중후원체제로 운영되는 퀴어문화축제는 두말할 나위가 없거니와, 3회를 치러낸 <레드파티>는 무겁기 쉬운 HIV/AIDS이슈를 커뮤니티 관련단체들과 게이포털, 클럽과 퍼포먼스 팀, 개별 이벤트 기획자들이 공동으로 준비하는 모금이벤트다. <레드파티>는 ‘노는 게 기부다’ 라는 기치 아래 클럽파티와 캠페인의 형식으로 이슈를 환기하고 수익을 HIV/AIDS인식개선과 감염인 후원 사업에 연결시킴으로써 이슈와 흥미를 모두 확보한 프로젝트로 자리매김한다. 그리고 많은 이들이 기억하는 2014년 시청농성은, 상이한 커뮤니티 단체와 구성원들의 참여를 통해 5일여 간 매일 수백 명의 참여 속에 다채로운 구호와 얼굴들을 만들어냈던 집단행동으로 성소수자 정치운동 역사에 기록된다.

 

이전부터 진행되어온 커뮤니티 내부의 프로젝트들로부터 최근의 제작문화를 어떻게 변별할 수 있을까. 그 하나가 제작 주체의 위상인데, 단체를 경유하지 않거나 단체가 주최하지 않더라도 개별 문화생산주체들이 두각을 보인다는 점이다. 이들은 능동적으로 단체의 네트워크와 자원들을 활용함으로써 상호 간 관계망을 넓히고 성장을 도모한다.

 

성소수자 커뮤니티의 문화접근성은 단지 기성 예술가나 디자이너, 전문가 집단이 사회의식을 갖고 문제에 개입했다는 취지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보다 주목할 점은 멤버십을 기반으로 하는 성소수자 단체 안팎 구성원들의 욕구표현이 다양해진 것이다. 커뮤니티 내부 제작문화의 증대는 정체성과 성적지향의 언어들이 부단하게 생산되고 누적된 경험이 만들어낸 자신감의 발로로 읽어낼 수 있다. 각기 분야에서 활동 중인 개개인의 위치는 회원과 비회원을 넘나드는 네트워크를 만든다. 디자인, 출판, 미술 등 기본적인 문화·예술분야 뿐 아니라 웨딩, 요리, 홈 데코, 미용, 의료 등 생활전반 분야에 진출한 성소수자들의 커뮤니티 기여 역시 높아졌다. 단지 콘텐츠뿐 아니라, 사업장을 확보해서 성소수자를 주요 고객으로 삼고 성소수자 친화적인 업소라는 입소문을 타며 알음알음 고객을 모으는 식당과 카페, 헤어살롱들이 종로와 이태원, 홍대 등지에 지도를 그려간다.

 

대표적으로 9월 초 개업한 햇빛서점은 ‘게이책방’을 표방한다. 성소수자를 주제로 내건 비치자료 중에는 국내외 코믹과 소설, 잡지 뿐 아니라 인권단체의 보고서와 자료들도 눈에 띈다. 오프라인 동네책방이라는 간판은 문화제작자와 성소수자단체를 엮어 동네주민을 비롯한 방문객 일반을 매개하는 허브의 성격도 일임한다.[각주:4]  

 


햇빛서점(좌)과 햇빛서점 부채(우) (출처: 햇빛서점 페이스북 페이지)



지역특성상 서점이 위치한 우사단로는 클럽과 바들이 집중되어 있는 ‘호모힐’에 근접해있는데, 이태원에 거주하는 많은 퀴어 주민들과 서점-클럽의 동선을 고려한 것으로 추측한다. 특기할 점은 햇빛서점을 비롯한 대부분의 성소수자 커뮤니티 기반 프로젝트나 사업들이 상설로 운영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가령 햇빛서점의 사업주는 주중에 햇빛스튜디오를 별도로 운영하여 디자인 작업으로 생계를 잇는다. 커뮤니티규모가 성장하고, 수요를 충족하는 시설과 사업들이 생산된다 하더라도 시간적·물리적 제약은 여전히 성소수자로서 온전한 일상을 영위하기에 부족함으로 다가온다. 물론 제한된 조건이 생산자 개별에게 전담할 과제는 아니다. 커뮤니티의 성장에는 제도를 요구하고 지역 내 목소리를 높이는 시도들이 바탕 되어야하기 때문이다.

 

기업화가 되기도 전에 불황폭탄을 맞은 한국사회 핑크산업은 소상공인들이 스마트폰 네트워크를 활용하고 본업과 조율을 맞추며 연대를 기반으로 각개의 활로를 찾아나간다. 이는 행사와 문화생산물도 마찬가지다. 성소수자 커뮤니티 문화를 대상으로 기획된 전시들은 커뮤니티의 현재를 드러냄과 동시에 공간의 새로운 윤곽을 그려간다. 일련의 프로젝트들은 프로파간다보다 성소수자문화의 메시지 전달 프레임과 유통방식에 관심을 갖는다. 가령 ‘청량엑스포’는 지난 한 해 성소수자를 주된 키워드로 삼아 전시와 기타 프로젝트들을 기획하고 진행했던 신생공간이다. 전시공간과 성소수자 커뮤니티가, 비-지속적 미술종사자들과 커뮤니티 구성원들이, 활동구호와 굿즈가 교차하며 상호 매개하는 작업들은 성소수자커뮤니티의 새로운 단면들을 시각화했다. 7월에 진행된 <Qbject>는 성소수자 커뮤니티 군소 단체들에서 제작한 굿즈를 전시함으로써 성소수자 사회의 단면을 조망한다. 성소수자 그룹별로 물품들을 신청 받아 페어의 방식으로 현장에서 전시·판매했던 행사는 특정 장소에 성소수자들의 참여와 대중의 구매를 연결하는 유통플랫폼의 기능을 실험했다는 점에도 의미를 둔다. 두 달 후 진행된 <A Few Feet Away>는 성소수자가 외부 기획자로 참여하여 성소수자 작가들을 섭외하고 성소수자 하위문화의 경향들을 작업으로 선보이는 전시라는 점에 커뮤니티 굿즈로부터 의미를 탐색했던 이전의 피상적 접근보다 좀 더 밀착된 기획을 선보인다. 스마트폰 어플리케이션 기반의 만남, 혐오세력의 가시화 등 현재 성소수자 사회를 관류하는 키워드는 SNS를 통해 지속적으로 환기되었던 터라 비당사자들에게도 그리 어색하게 다가오지 않는다.[각주:5]



청량엑스포 <Qbject>(좌), <A Few Feet Away>포스터(우) (출처: 청량엑스포 트위터)


 

출판물과 방송 또한 다양한 매체를 아우르며 성소수자 커뮤니티 지형을 탐색한다. 미술평론가 임근준(이정우)은 인천문화재단에서 2014년 진행한 무지개다리사업의 일환으로 ‘여섯 빛깔 무지개’ 팟캐스트를 진행했다. 레즈비언활동가, 법조인, 게이 언론인, 드랙·MTF트랜스젠더 퍼포머, 후죠시 예술가, 게이 영화감독, 만화가, 번역가, 문필가 등 각개의 성소수자/지지자들을 인터뷰한 방송은 기획자가 밝히듯 섭외부터 성소수자 사회의 협조가 필요했던 작업이다. 성적지향과 성별정체성, 활동분야와 시대적·세대적 구성을 의식적으로 배분한 방송은 커뮤니티 역사를 되짚으며 최근의 새로운 면면을 살피는 시도로서 올 초 동명의 저서로 출간되었다. 1세대 성소수자 인권활동가로서 성소수자 사회의 역사를 관류했던 진행자와 현재 커뮤니티 구성원으로 활동 중인 일원들의 만남은 현장과 이론을, 이슈와 역사를 상호 보완하는 시너지를 낸다.


 

(출처: 미술·디자인 평론 블로그_임근준(이정우)의 현대미술과 디자인 이론에 관한 비‘일반'적 메모)

 


‘관계’의 측면에서 6699프레스가 지난 11월 제작·출판한 『여섯』은 ‘디자이너, LGBT 서점지기, 소상공인, 사진가, 기자, 작가, 음악가, 만화가 등으로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는 작가들이 커밍아웃 이후 ‘게이–친구’라는 주제를 짝꿍 둘만의 이야기에 담아 다양한 방법과 온도로 표현했다'는 제작 동기를 통해 커밍아웃 전후의 소통방식에 초점을 맞춘다. 『여섯』은 '커밍아웃'이라는 으레 상투적으로 생각하기 쉬운 주제를 다룬다. 하지만 커밍아웃 이후 관계가 더 깊어진다는 만고불변의 진리를 활용, 관계와 맥락을 부각시켜 인터뷰와 편지, 에세이, 사진미션, 랜덤채팅, 코믹 등 프로젝트 작업으로 전개하는 구성상의 영민함을 보인다.

 

‘여섯 빛깔 무지개’와 같이 음성 매체를 활용하면서 지역과 커뮤니티에 다른 접근을 시도하는 작업도 있다. 2005년부터 음성방송을 제작해오고 있는 레주파는 라디오방송 ‘L양장점’을 마포지역에 수년째 진행 중이다. 알다시피 마포구는 2012년 말 마포레인보우주민연대가 게시한 현수막 철거사건으로 곤욕을 치른 지역구다. ‘지금 이곳을 지나는 사람 열 명중 한 명은 성소수자입니다.’, ‘LGBT, 우리가 여기 살고 있다.’ 문구를 일방적으로 삭제한 지역에 방송을 송출함으로써 성소수자 주민으로서 존재를 직접적으로 드러내고 지역의 일상에 침투하는 셈이다. 지역의 성소수자 존재를 드러낸다는 공통된 맥락에서 레주파는 지난해 비온뒤무지개재단의 이반시티 퀴어문화기금을 지원받아 5년간 진행해온 ‘보이스 커밍아웃’의 음성들을 온라인 아카이브 ‘기억의 지도’로 담아내기도 했다.

 

성소수자의 목소리를 지역에 틈입시킨 작업은 지역과 성소수자, 지역과 커뮤니티의 접점을 시도한다. 선언과 구호들이 옹기종기 모여있는 풍경은 광장에 모인 대중집회를 연상케 한다. 하지만 목소리의 집적으로 그친 작업이 추후 어떻게 전개되거나 활용될 것인지 단서를 찾기란 어렵다. ‘여섯 빛깔 무지개’ 역시 다양한 분야의 성소수자 플레이어들이 이야기하는 이슈와 활동, 유흥과 인권운동 사이 유기적 매개항과 연결고리를 찾아내는 시도는 독자의 몫으로 남는다.


 


기억의 지도 페이지 이미지 (출처: 비온뒤 무지개재단) 이미지를 누르면 페이지로 이동합니다.

 


기억의 지도를 포도알 까먹듯 알알이 클릭해서 저마다 다른 톤의 목소리를 듣는 재미에도 불구하고, 침전물처럼 남는 감상은 ‘나는 내가 자랑스럽다’는 다소 싱거운 자긍심 고백이 구호가 갖는 ‘착한’ 성격만큼이나 단조로운 느낌을 피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예의 따뜻한 기운은『여섯』의 저변을 얕게 흐르는 감수성이기도 하다. 작업들은 커밍아웃 전후 관계의 지층을 다각도로 드러내지만 매체를 통해 직접적인 소통이 유발할 수 있는 갈등이나 심적 피로를 유보한다. 여기서 매체는 중요한 기능을 한다. 소통에 색을 입히지만 직접적인 접촉으로부터 소통의 거리를 확보함으로써 갈등이 초래할 불화의 정동을 중화시키고, 서로에 대한 차이의 인정과 이해의 과정을 심화하여 자기 고백의 기술을 증폭하는 것이다.

 

상호인정과 이해가 소통의 기본전제일지라도 관계맺기를 시도하는 과정에 불화는 피할 수 없다. 커밍아웃 역시 매끈한 사회의 지배담론에 균열을 내고 스스로 낯선 존재임을 드러내는 공적인 행위라는 점에 불화를 전제한다. 위의 작업들 역시 지난한 갈등과 충돌, 협상과 이해의 과정을 견뎌낸 결과물임엔 이견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커밍아웃은 선언 너머 갈등과 긴장, 단절과 설득, 협상과 이해의 과정이 반복되는 관계의 정치를 예고한다는 점에 '결과'로만 자리매김할 수 없다. 불화 자체를 드러내거나 쟁투하는 목소리의 골을 더듬는 시도는 과정을 기술하는 것부터 협의와 이해의 경계를, 서로 다른 언어와 언어 사이 침묵의 간극을, 관계 너머의 문턱을 드러내며 '지속'을 예비해둔다. 그런 점에서 위의 작업들은 ‘우리가 여기 있다’는 단순한 테제의 집적으로부터 ‘다르지만 서로를 이해하고 관계를 쌓아가는' 방식으로 서사를 확장한다. 하지만 갈등의 불편함이 성급한 봉합으로 갈무리되지 않기 위해서는 예의 서사들이 기록되는 과정과 그 형식을 파악하고, 대기를 울리는 목소리들의 파장이 어떻게 전달되고 있는지 비판적으로 읽어내는 작업 역시 수반되어야 한다. 이는 독자의 역할과 더불어 해석들이 소통할 수 있는 공론장의 형성이 중요할 수밖에 없는 까닭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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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소수자 의제가 가시화되고 표현의 당위만큼이나 욕구도 높아진 사회분위기는 커뮤니티의 가시적 성장에 동기를 부여한다. 정치의제와 문화생산그룹이 교차하고 상호개입하면서 운동의 언어가 세련되어지고, 문화생산에 정치적 해석과 재생산이 가능해진 결과 단체운동과 커뮤니티 성장이 쌍끌이로 이뤄진다. 공동체 내부 다양한 구성원들이 접점을 찾아 드러내는데 있어 멤버십단체는 관계망을 제공할 수 있는 플랫폼의 가능성을 타진한다. 성소수자인권운동과 커뮤니티의 오랜 간극에도 불구하고 암암리에 몸과 마음으로 결속되어온 관계들이 활동과 프로젝트로 가시화되는 중이라고 보면 될까.

 

기실 근래 설립된 커뮤니티 내부 활동단체나 진행된 연구사업 역시 각기 다른 전문성과 모델들을 모색하고 제 역할을 찾아나간다. 가령 친구사이가 발주하고 성적지향·성별정체성 법정책연구회(SOGI)가 조사수행한 <한국LGBTI 커뮤니티 사회적 욕구조사>(2014)[각주:6]는 커뮤니티 구성원들의 욕구가 티핑포인트를 넘겼음을 육안으로 확인시켜준 기념비적 자료로 평가된다. 이후에도 SOGI는 입법, 정책, 연구 활동과 활동가 대상 교육을 수행하는 전문가 연구·활동 집단으로서 역할을 확장한다. 한편 커뮤니티 내부 멤버십단체인 한국게이인권단체 친구사이의 합창단 ‘지보이스’와 언니네트워크의 ‘아는언니들’은 소모임 기반의 문화 활동으로 시작하여 성소수자문화행사 뿐 아니라 연대활동에도 두각을 보이며 단체의 간판으로 자리 잡았다. 비온뒤무지개재단이 집행하는 기금지원 사업은 커뮤니티 구성원들의 번역과 출판, 전시 등 군소집단의 영세적인 프로젝트들에 경제적 자원을 제공한다. 지난 해 설립한 신나는 센터가 7월 11일 하루 동안 진행한 ‘프라이드페어’는 성소수자 커뮤니티 내부의 문화생산물 유통의 규모를 가늠할 수 있는 자리였다. 그런가 하면 온라인에 똬리를 튼 레인보우스토어는 점차 취급하는 상품의 품목들을 늘려가고 있다. 청소년성소수자위기지원센터 띵동의 경우 성소수자상담과 아웃리치 뿐 아니라 ‘드림프로젝트’를 통해 청소년 성소수자들이 인권감수성을 높일 수 있는 사업을 자발적으로 기획하고 실행하도록 지원했다. 이들 ‘신생’ 단체들은 근래 백화제방하는 소규모 프로젝트들의 활로를 모색하며 커뮤니티 생태계에 자양분을 공급한다. 여기에 국내 진출한 몇몇 외국기업을 위시한 성소수자 친화적 기업은 회사 비전에 성소수자 인권을 명문화하여 실천한다. 이들은 성소수자 혐오 반대를 천명할 뿐 아니라, 사업 후원자로서 파트너십도 수행한다. 러쉬의 경우 다수의 성소수자 노동자들을 고용하고 직원들의 참여를 바탕으로 성소수자 인권캠페인을 상시 진행한다. 성소수자 친화적인 회사 방침과 실천이 성소수자 인력을 끌어 모으는 셈이다.

 

문화생산의 확장 외에도 커뮤니티 내부에 성소수자 언어의 결이 분화되는 것 또한 작년 한 해의 큰 변화다. 성소수자로 통칭되어 가시화되었던 LGB외에도 트랜스젠더, 젠더퀴어와 무성애자, 인터섹슈얼에 대한 당사자목소리가 근래에도 없던 건 아니지만, 지난해에는 커뮤니티와 소모임들이 결성되어 집단행동과 구호들을 내걸기 시작했다. 해외이슈의 접근도가 높아지고 커뮤니티 내부 성소수자 이슈에 대한 이해도가 깊어지면서 심층적으로 분화되는 언어는 성소수자 당사자들을 통해 발화되고 체현된다. 낯선 언어들을 체화함에 따라 설명하는 경험의 프레임이 달라지고, 경험을 하는 몸 또한 다르게 의미 부여된다. 몸이 접촉하는 관계 또한 확대된다. 게토의 동료들 뿐 아니라 가족과 ‘일반’ 친구로 소통의 대상이 확장되면서 성소수자에 대한 접근과 울림이 커진다. 타인을 대함에 있어 인권감수성 또한 커뮤니티 구성원이 갖춰야할 덕목으로 자리 잡고 있다. 상이한 위치 사이에 빈번히 벌어졌던 집단적인 논쟁들 뒤에는 항상 비하적 언어에 대한 자성과 주의가 따른다. 다양한 구성원이 가시화된 가운데 집단의 관계설정을 재구조화하는 공동체의 노력일 것이다. 지배언어를 분절하여 자신의 것으로 전유하는 시도들은 일상에 망각되었던 차별감수성을 다시금 일깨우고 목소리의 지분을 요구하기에 이른다. 그 과정에 커뮤니티 문화생산의 기류는 새로이 깨우친 언어들과 접점을 찾아 다양한 목소리와 얼굴들을 표현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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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합적인 성소수자 커뮤니티의 성장환경 속에서 생산물들도 과정부터 결과물에 이르기까지 상이한 관점과 목소리들이 다양한 형식으로 집적되어 유통경로를 확장하는 경향을 갖는다. 최근 앞으로프레스의 독립잡지 <뒤로>는 일련의 변화들을 단적으로 함축한 결과물이라는 점에 표본으로 삼을 만하다. 앞으로프레스의 일원이 남성동성애자인권단체 회원이라는 점은 단순한 프로필로 남지 않는다. 인권단체 멤버십을 갖는 출판·디자인 종사자로서 <뒤로>의 제작자는 단체 소속 활동가, 회원 등 단체 내부 인맥부터 법조인, 미술가, 기자, 등 외부의 인적 자원까지 망라하여 십분 활용한다. 그간 성소수자 인권운동의 생산물들을 디자인해오며 쌓았던 관계가 상호 협업가능성을 높인 것도 기획에 작지 않은 밑천이었을 것이다. ('앞으로'는 <한국 LGBTI 인권현황 2014>를 디자인한 바 있다.) 소셜펀딩을 통해 커뮤니티 자생적인 자본을 응집할 수 있었던 것도 네트워크 활용방법의 주요 지점이다. 자력갱생이 불가능한 사회에서 십시일반의 미덕은 커뮤니티 생산경제에 모델이 된다.

 


<뒤로> 표지

 


결과물의 구성도 눈에 띈다. <뒤로>는 잡지의 형식을 빌어 인터뷰, 카툰, 라이트노블, 소설, 설문조사, 문화비평, 논픽션, 미술, 디자인, 출판을 아우른다. 잡지제작을 위해 후원을 조직하고 후원자 리워드로 족자와 가방, 향초와 포스터, 성병 엽서 등을 생산한다. 일련의 굿즈 세트는 교육적이고 실용적이며 동시에 쾌락지향적이다. 굿즈를 패키지로 제작한 점은 단순한 백화점식 나열을 넘어 앞으로프레스의 브랜딩 전략으로 봐도 무방하다. 요컨대 <뒤로>는 압도적인 표지만큼이나 변화한 커뮤니티환경을 단적으로 표상하는 야심찬 결과물이다.

 

<뒤로>의 제작과정은 최근 성소수자 문화 사업이 구축되는 과정의 척도라는 인상을 심어준다. 최근 모금을 마감한 키라라의 음반작업이나, 현재 모금중인 페미니즘 시각예술 매거진 <소문자에프>도 같은 소셜펀딩 서비스를 통해 밑천을 모은다는 점에 공통적이다.[각주:7] 창간호 주제로 삼은 ‘군대’라는 키워드 아래 다양한 접근과 매체, 표현방식을 담는 구성과 유사하게 <소문자에프>도 잡지의 성격에 부합하듯 ‘페미니즘 시각예술’의 키워드로 ‘포토그래피, 도예, 판화, 일러스트, 카툰- 등을 비롯한 다양한 장르의 예술 작품들부터 –에세이, 비평, 창작소설, 창작시’ 에 이르는 다양한 분야를 아우른다. 이들 프로젝트는 출판과 음반이라는 1차 제작 뿐 아니라 후원답례품 또는 제작기금 마련을 위한 수익사업으로 굿즈를 제작하고 판매함으로써 커뮤니티 내부 생산물을 보탠다는 것까지 공통적이다. 상대적이겠지만 이전보다 큰 액수의 사업자금을 커뮤니티로부터 후원받아(<뒤로>와 <소문자 에프>는 1천만원을 후원목표금액으로 삼았다.) 주요 결과물 뿐 아니라 사이드 굿즈까지 제작하여 판매와 유통을 꾀하는 방식은 영세한 공동체로부터 압축적인 브랜드 패키지를 산출하는 하나의 패턴이 되어가는 듯하다. 현재 이들의 후원목표금액은 대부분 100퍼센트를 상회하며 높은 성공률을 보이는데, 이는 커뮤니티의 문화적 표현의 갈증과 수요가 컸음을 방증하는 것이 아닐까?

 


<뒤로>(좌), <소문자에프>(우) 리워드 한눈에 보기 그래프 (출처: 텀블벅 페이지)

 


<뒤로> 창간호는 상이한 저자들의 프로필과 관점이 다양한 매체를 구사함으로써 잡지의 윤곽을 그려나간다. 목차를 넘기며 훑어보자. 섹시한 오빠의 ‘따뜻한’ 화보로 시작되는 잡지는(‘The Service’) 성소수자 개별의 아련한 회상들로 이어지고(‘예비역의 사정事情’) 개인적인 이야기들은 곧장 설문을 통한 집단인식과 경험의 집적으로 수치화된다(군대에서 남자끼리: 경험담과 경험 사이). 슬슬 달아오르는 군대 내 ‘부농’한 인식의 지평은 오픈리 게이 작가가 구현한 사각지대의 프라이빗한 미술언어로 구현되는가 하면, 문학적 감수성으로, 입자가 부서질 것만 같은 화보의 애수어린 내무반 감수성으로 형상화된다.(‘문화적인 사각지대 찾기-오인환 작가 인터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소설’, ‘외박’) 그리고 한 번의 변주. 트랜스젠더와 군대, 젠더불일치와 국가의 젠더프레임 강제를 다룬 알고리즘은 기억 속 내무반의 애틋한 심상을 깨뜨리며 흐름에 긴장을 주고(‘너의 몸을 보여라 너의 성별은 국가가 정한다’), (남성)동성애와 젠더, 군대와 여성성, 게이의 남성성 사이 혼성성을 드러내며 미국의 게이 육군장관 탄생기로, 헬조선 동성애자 군인의 향수어린 희비극에서 진짜사나이 판타지에 대한 사회비평으로, 군인페티시를 접목한 라이트노블로 이어진다(‘신성한 사랑의 군대-’, ‘‘게이 육군장관’이 탄생하기까지’, ‘핑퐁’, ‘진짜 사나이가 본 <리얼입대프로젝트-진짜 사나이>’, ‘Militagram’, ‘정신교육(情身敎育, 3411)-밀리터리 페티시즘’, ‘뻐꾸기 중령님’). 화보 모델의 헐벗은 실루엣처럼 잡지 목차의 울퉁불퉁한 등고선은 오래 각인된 군대 체제 위에 차별과 배제로 점철시켰던 존재들을 비평적 날을 세워 귀환시키고, 비평적 관점과 더불어 군대와 함께 존재했지만 언급되거나 인정받지 못한 채 아스라이 사라질 뻔했던 내무반전설, 군대판타지, 동성성애를 발굴한다.

 

군대와 동성애라는 상투적인 키워드에도 불구하고 잡지는 오랜 상투성 아래 묵인되었던 서사의 다양한 결들을 살려낸다는 점에 의미가 깊다. 하지만 구성상의 다양한 소재와 관점에도 불구하고 의아한 점은 있다. 군대를 주제로 삼는 잡지, 단체와 네트워크 인적자원을 충분히 활용했던 잡지였음에도 <뒤로>는 어떤 연유에선지 군형법 제92조의 6에 대한 이야기가 일절 들어가지 않는다.[각주:8] 무거운 이야기에 대한 경계였을까, 직구보다는 다양한 결의 서사들을 집적하고 싶었던 것일까.

 

사소한 기획의 문제일 수도 있겠으나, 언급한 질문은 커뮤니티 성장을 목도하면서 드는 복잡한 심정에 가닿는다. 그간 성소수자를 매 정책마다 배제하는 지자체와 중앙정부를 봐왔다. 몇몇 지자체와의 공조가 혐오세력의 압력에 깨지고, 성소수자친화적인 정책을 입안했던 정치인들은 지지를 철회하거나 노골적인 반대를 표시하고 있다. 총선을 앞둔 현재 차별선동세력은 동성애지지 정치인을 색출하는 캠페인을 진행 중이다. 더구나 지역 교회들은 성소수자 친화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던 지역구 국회위원들을 타깃으로 삼아 위해와 협박을 불사함으로써 의원들의 정치적 입장을 위축시킨다. 일례로 군형법 제92조의6 폐지 법안을 대표발의했던 진선미의원은 얼마전 아프리카TV에서 방송된 BJ 망치부인의 생방송에 출연하여 동성애 합법화 국회의원이라는 선동에 "그분들이 이야기하시는 군 형법에 대해 나는 동성애가 처벌의 대상이 아니라는 거지 (동성애를) 권장하는 것이 아니다" 라는 수세적 발언으로 성소수자 이슈를 함께 나눈 활동가와 커뮤니티 지지자들에게 유감을 안긴 바 있다.  

 

성소수자의 목소리는 커지고 있지만, 다른 편으로 성장하는 커뮤니티만큼 차별선동세력도 세를 키워나간다. 아니, 지배권력을 등에 업고 정교계를 막론하는 성소수자 차별선동은 커뮤니티의 성장을 뛰어넘는다. 그리 긍정적이라고 평가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커뮤니티의 성장은 차별선동세력들의 저질 난동과 충돌하고 경쟁해야하는 그림으로 대중에게 비쳐지기 쉬운데, 이는 보기에도 아름답지 못하다. 두 세력이 짝패처럼 묶여 취급되는 것은 자존심상할 일일뿐 아니라 소모적으로 악순환할 수밖에 없다. 편치 않은 접근이 될지라도 이슈에 대한 구호와 문화적 표현 사이의 긴밀한 상호 번역이 시도되지 않는다면 각개의 활동들은 밖으로 표출되기 전에 자족적인 효과에 그칠 공산이 크다.

 

그렇다고 성장하는 커뮤니티에 어떻게 정치적 구호를 아로새길지를 고민하는 방향은 다시금 커뮤니티와 운동언어의 구분을 반복하는데 지나지 않을 것이다. 방향은 그려나가기 마련이라지만, 일단은 커뮤니티의 호흡과 함께하면서 어떤 접점을 찾아야 할지, 변화하는 커뮤니티에 귀 기울여 채록한 목소리를 어떻게 다듬어낼지는 성소수자 인권운동이 이슈의 결을 넓히고 공감을 얻기 위해 계속적으로 가져가야 할 고민일 것이다. 민감하고 무거운 사안에 이들은 어떤 목소리를 내고 있는지, 각자의 경험을 어떻게 교차·가공시켜 드러내는지를 살펴보는 시도들은 생산 작업만큼이나 중요한 과제이다.

 

성소수자 커뮤니티 문화생산자들이 창의적 하층계급의 넓은 범주에 걸쳐있다고 할지라도 이들은 기존 예술·문화 생산자들이 지자체 문화 사업에 활용되며 땅값을 높이던 것과 다른 영역을 점한다. 작업을 기획하고 네트워크를 활용하여 사람을 모아 생산방식을 모델링하는 시도들은 커뮤니티의 외형, 커뮤니티 내부의 브랜드와 시장을 형성하는 기예에 가까운 과정이다. 커뮤니티 외부 다양한 분야의 협동조합과 재단, 지역이나 단체 등과 공조하고 협업하며 사업 방식을 다각도로 모색하고 규모를 넓히는 시도는 커뮤니티의 외연을 탄탄히 확장하는 과정에 연대와 결속을 높인다. 커뮤니티 일원이자 이웃으로서, 동료이자 당사자일 수 있는 생산주체들의 작업은 성소수자의 언어가 생성되고, 새로운 경험들이 접점을 찾는 커뮤니티의 현재와 복잡하게 연결되어 있다. 추상적인 개념으로만 유통되기 쉬운 커뮤니티를 구체적인 일상의 소통과 관계가 만들어지는 장소성으로 끌어올려야 하는 과제는 구성원들이 향유하는 문화와 사회운동이 함께 도모해야할 터. 과제들이 항목처럼 나열되는 건 아직 접점을 찾지 못했다는 뒤늦은 반성의 뇌까림인지 모르겠다. 어쨋든 중요한 건 커뮤니티 안팎으로 씨앗들이 본격적인 발아를 시작하고 있다는 지금, 좀 더 활발한 커넥션이 이뤄져야한다는 것이다.



P.S 반성을 풀어내려면 일단 관계부터 좀 맺어야 할 것 같다. 뭉친 고민을 문장으로 풀어내는 동안 키라라의 음악을 듣고 게이밤을 태운다. (게이밤은 <뒤로>소셜펀치 리워드 품목에 있는 향초다. 소개 문구에 따르면 합방 택일에 켜놓을 것을 권한다...) 이러라고 받은 향초가 아닌데. 글을 쓰면서는 ‘게이밤’의 향이 좀 더 강했으면 좋겠다는 아쉬움도 생긴다. 이건 기분 탓이겠지.

 







  1. ‘한국 미술계에도 ‘여섯 빛깔 무지개’ 뜰까?- 청량엑스포, 기와하우스, 햇빛서점 등 LGBT 콘텐츠 전문 예술공간 급증‘ http://www.artinculture.kr/online/2610 [본문으로]
  2. 최근 일군의 성소수자들이 '뚝딱뚝딱 티격태격 "무지개하우스" 만들기' 공동주택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며칠 전 시작된 텀블벅 모금 페이지에 사업 내용이 설명되어 있다. 링크참조: https://www.tumblbug.com/rainbowhouse [본문으로]
  3. 서울시립미술관 <서브컬처: 성난 젊음>(2015.6.30-8.30) 전시도록 중 신현준, 「젠트리피케이션, 창의적 하층계급 그리고 자립」 참조. [본문으로]
  4. 햇빛서점은 지금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진행 중인 <서울바벨>(2016.1.19-4.5) 전시에 참여하고 있다. [본문으로]
  5. < A Few Feet Away > 에 전시되었던 작업들역시 앞서 이야기한 서울시립미술관 <서울바벨>(2016.1.19-4.5) 에서 전시 중이다. [본문으로]
  6. 보고서는 아래의 링크에서 내려볼 수 있다. http://sogilaw.org/39 [본문으로]
  7. <뒤로>의 텀블벅 모금 페이지 링크는 https://tumblbug.com/duiro 키라라의 텀블벅 모금은 1월 31일 종료되었다. 링크: https://tumblbug.com/kiraramoves <소문자에프> 창간호 제작을 위한 텀블벅은 2월 17일까지 진행된다. 링크: https://tumblbug.com/smallletterf [본문으로]
  8. 군형법 제92조의 6은 군인 또는 군인에 준하는 사람에게 항문성교나 그 밖의 추행을 한 사람은 2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고 규정한다. 여기서 ‘추행’은 합의에 따른 성적 접촉을 포괄해, 동성 사이의 합의된 성행위를 인정하지 않는 반인권적·반동성애적 조항이라는 비판을 받아왔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