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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성인 활동

[활동가 연재] 상임활동가의 사정

by 행성인 2024. 11. 24.

 

기획의 말

2024년 한 해 동안 '상임활동가의 사정' 연재를 시작합니다. 행성인 네 명의 상임활동가들은 종횡무진하며 단체 안팎에서 활동을 하는데요, 한 달 동안 어떤 활동을 해왔는지, 무엇을 보고 어떤 것들을 고민하고 있는지 함께 만나봅시다.

 

 

지오

 

행성인 책읽기 소모임 완독에서 〈소년이 온다〉를 함께 읽었어요.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을 축하하는 특별 선정 도서였죠. 사실 책을 산지는 좀 오래되었는데 막상  손이 잘 안 가는 책 중 하나였거든요. 완독에 다른 분들도 비슷한 마음이었더라고요. 5.18에 대해 이미 알고 있고 읽고나면 마음 안좋아질 게 뻔한데 꼭 읽어야 할까? 같은 마음에 차일피일 미뤄왔더라는 말이죠.

 

그런데 읽기를 참 잘했습니다. 5.18이라는 잔혹한 사건 안에 사람이 있었다는 걸 느낄 수 있었어요. 과거의 일이 아니라 지금까지 이어져 흐르고 있는 일이란 것도요. 

 

마음은 아프지만 따뜻함이 함께 남습니다. 끝까지 읽고나면 누군가를 같이 애도하고 있다는 기분이 들어요. 

 

밑줄 그은 문장들이 많지만 하나만 뽑아 나눕니다. ‘꽃 핀 쪽으로’라는 구절이 시처럼 예쁘고 통곡같이 시려요.



6장 꽃 핀 쪽으로, p.192

 

너하고 나하고 둘이서, 느이 아부지가 있는 가게까지 날마다 천변길로 걸어갔제. 나무 그늘이 햇빛을 가리는 것을 너는 싫어했제. 조그만 것이 힘도 시고 고집도 시어서, 힘껏 내 손목을 밝은 쪽으로 끌었제. 숱이 적고 가늘디가는 머리카락 속까장 땀이 나서 반짝반짝함스로. 아픈 것맨이로 쌕쌕 숨을 몰아쉼스로. 엄마, 저쪽으로 가아, 기왕이면 햇빛 있는 데로. 못 이기는 척 나는 한없이 네 손에 끌려 걸어갔제. 엄마아, 저기 밝은 데는 꽃도 많이 폈네. 왜 캄캄한 데로 가아, 저쪽으로 가, 꽃 핀 쪽으로. 

 

 

 

오소리

 

매년 11월이 찾아오면 컨디션이 안좋습니다. 몸도 안좋고 마음도 울적해집니다. 그러다보니 일도 손에 잘 안잡힙니다. 올해도 역시나 그랬구요. 그래도 올해 11월은 예년에 비해 유독 행사가 많았어서 정신없이 지내다보니 빠르게 지나간 것 같네요. 

 

11월의 슬럼프는 2015년부터 시작됐습니다. 정확히는 16년이라고 해야겠네요. 15년 11월에 사랑하는 친구 크리스를 떠나보내고 그 다음해부터 시작됐으니까요. 벌써 9년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아물지 않는 상처가 되었습니다. 거기에 3년 전 11월에는 사랑하는 후배 이슬이 마저 먼저 떠나보내버렸어요. 저에겐 참 잔인한 11월이지요. 출근길, 운전을 하며 나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고 있기도 하고, 문득 문득 울컥하기도 합니다. 자책과 한탄을 하며 어떻게 여기서 벗어날 수 있을까 지난 9년 동안 고민해왔지만 여전히 답은 찾지 못했어요. 

 

11월 20일은 트랜스젠더 추모의 날(TDoR)이었습니다. TDoR 을 기념하며 16일, 이태원 광장에서는 집회가 열렸습니다. 연수를 떠나보낸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비까지 추적추적 내려 무거운 마음으로 참여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집회는 힘 있게 진행되었습니다. 먼저 떠나보낸 이들을 기억하면서도 옆에서 함께 살아가는 이들을 돌아보며 서로 격려하는 시간이었습니다. 답은 여기 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 힘들더라도 주변 사람들에게 위로 받으며 그저 견뎌내는 것이죠. 상처는 사라지지 않을지언정, 내 곁에 나와 관계 맺는 사람들이 있기에 상처를 끌어안은채 나아갈 수 있게 해줍니다. 이러한 생각을 담아 ‘추모’와 ‘곁을 지킨다’는 것의 의미에 대해 참세상에 기고하였습니다. 

 

🔗[소소부부의 Love Wins - 치열했던 삶을 추모하고 그 기억으로 잇는 간절한 삶] 

 

끝으로 얼마 전 요즘의 제가 위로 받은 노래가 있어 노래 가사를 공유합니다. 

 

🎵 

만약 내가 만약

털끝만큼이라도 달랐다면

뭐라도 바뀌었을까

하는 생각

언제쯤 그만둘 수 있을까요

만약 내게 만약

털끝만큼이라도 만약에

나에게 잘못한 게 있다면

그건 아마도

당신을 만난 거겠죠

  • 장기하 「뭘 잘못한 걸까요」 中

 

내게 잘못이 있다면 그건 우리가 만난 거에 있겠다며 탓을 돌려봅니다. 우리의 만남이 잘못이 되지 않도록, 함께 화이팅하면 좋겠습니다. 

 

함께 화이팅 할 수 있는 동료들의 존재가 참으로 소중합니다. - TDoR 집회, 행성인 단체 사진

 

 

 

 

행성인 웹진에 몇 안되는 열혈 독자들이 있다. 나에게 열혈 독자라 함은 모든 기사를 읽었다고 알리며 감상과 피드백 주는 사람들, 상임활동가 이야기를 보면서 안부를 묻는 사람들, 이 글 쓴 사람 누구야? 이 글 저렇게 내도 괜찮아? 를 묻고 의견을 내는 사람들이다. 나만 그런 경험 하는거 같지는 않고, 두루 행성인에 글을 쓴 이들이라면 반응에 신경을 쓰는거 같다.

 

올해 신설한 코너는 지금 독자님이 읽고 있는 '상임활동가의 사정'이다. 바쁜 동료들 붙잡고 안식월에도 근속휴가에도 쉬면서 쓰시라 최고독촉 코너 되시겠다. 지난해까지 상임활동가들이 하는일은 많은데 티안내면 회원들도 모르니까 이렇게라도 웹진에 이름과 필적을 남기시라 기획했다. 

 

이 코너를 올해까지만 할까 생각했는데, 상임활동가여러분이 더해도 좋지 않겠냐고 제안을 줬다. 그동안 펑크도 안내고 꾸준히 잘 올리지 않았냐고... 참 나. 마감일이나 잘 맞춰주면. 

 

해서 독자님의 피드백을 기다립니다. 이 코너 내년까지 더 해볼지, 아니면 수고했습니다 박수칠때 코너 접으시죠 일지, 여러분의 반응 보고 판단에 참고하려고 합니다. 좋아요든 댓글이든 환영합니다. 

 

그래서 이 코너 없애면 뭘 시작할 거냐... 몰라... 일이 밀린다...

 

* 웹진 팁: 글에 종종 달리는 비밀댓글은 대부분 '글을 잘쓰시네요, 오늘 하루도 행복하세요!' 류의 시덥지근한 내용의 자기계정 홍보다. 이게 뭔지 궁금해하길래 알려드림

 

 

 

호림

 

지난 11월 9일부터 17일까지 남아프리카공화국 케이프타운에서 열린 일가 월드(ILGA World) 컨퍼런스에 다녀왔다. 무지개행동 집행위원으로 담당하고 있는 동아시아 반차별과 평등 네트워크(East Asia Alliance for Equality and Anti-Discrimination)의 동료들과 함께, 한국과 일본, 대만의 현황을 알리고 다른 국가와 지역의 단체들과의 협업의 기회를 알아보기 위한 목표를 가진 출장이었다. 

 

 

일가 아시아 컨퍼런스는 여러번 가봤지만, 일가월드도 처음, 아프리카 지역을 가보는 것도 처음, 이동에만 꼬박 하루씩 걸리는 원거리 출장도 처음이었다. 한국 참여자는 나 혼자였지만, EA Alliance 동료들과 오래 얼굴을 본 아시아 지역 활동가들이 함께라 외롭기는 커녕 매일매일을 시끌벅적하게 보냈다.

 

일가 월드 컨퍼런스 마지막 날, 아시아 지역 동료들과 함께

 

그런데, 이번 컨퍼런스처럼 우리 모두가 당면한 위기와 어려움을 강조하는 성소수자 국제 컨퍼런스는 처음이었다. 그동안 내가 참여해 본 행사들의 일반적인 톤앤매너는 ‘그동안 세계 곳곳에서 이뤄낸 성취를 함께 축하하면서, 그럼에도 남은 과제들에 주목하며 함께 더 큰 변화를 만들어 가자’는 진취적이고 희망적인 톤이 대부분이었다. 항상 비슷비슷해서 관성적이라고 느껴질만큼 당연한 분위기라 이번 일가 월드 컨퍼런스의 공기가 의미심장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전세계적인 반-권리(Anti-rights), 반-젠더(Anti-gender) 움직임의 조직화, 그동안 성소수자 권리 증진의 흐름을 이끌어 온 주요 서구 국가들의 우경화,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분쟁과 학살까지. 우리가 통과하고 있는 지금의 시기가 전세계 성소수자 운동 모두에게 어려운, 그래서 각자의 자리에서 더 힘을 모으고 확장해 나가야 하는 국면임을 깊이 생각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