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수 (한국HIV/AIDS감염인인권연합 KNP+)
연재의 말 게이들은 외계에서 온 것 같다. 그래서 지구에 여행 온 외계인의 삶을 기록하는 심정으로 이 글을 쓴다. 참…이 나이에 글을 쓸 줄이야, 가 아닌 예전부터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이제야 풀어 보는구나, 하는 가벼운 마음으로 남자로서가 아닌 게이로서의 내 삶을 솔직하게 기록해 본다. |
1992년 말에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해는 김영삼이 삼당 합당을 해서 신한국당의 대선후보가 된 해였다. 나는 부산으로 내려가서 찜질방에서 매점을 시작했다. 그리고 부산 범일동의 단란주점에서 두 번째 애인을 만났다. 그는 안경을 쓴 귀여운 범생이 스타일 친구였는데 재미교표 3세였고 부산대학교의 교환학생으로 와서 하숙을 하고 있었다.
그는 대담하게도 나에게 먼저 프러포즈를 했는데, 내가 자기가 좋아하는 스타일이고 맘에 든다며 보자마자 사귀자고 했다. 그래서 나도 오케이를 했고 그가 있는 하숙집으로 놀러 가곤 했다. 그러다가 내가 사는 자취방을 빼고 그의 하숙집에서 둘이 동거를 시작했다. 그의 애무는 나를 녹이기에 충분했고 나는 그로 인해 처음으로 탑과 바텀이란 용어를 알게 되었다. 그가 바텀이라고 해서 내가 탑을 했는데, 20대의 혈기 왕성한 그는 매일 밤 내게 섹스를 요구했다. 그렇게 1년여의 동거가 지나고 나니 나는 체력적으로 방전되어 버렸다. 그에게 결별을 요구했지만, 그는 죽어도 못 헤어진다고 했다.
결국 나는 몰래 캐리어에 짐을 싸고 쪽지 한 장을 두고 도망치듯 집을 나왔다. 그리고 부산을 떠나 근교 도시로 가서 목욕탕 매점을 하면서 지냈다. 그리고 그곳에서 운전면허를 취득했다.
1995년. 그 해는 내게 잊을 수 없는 사건이 있었던 해다. 부산 근교의 도시에서 다시 부산으로 업장을 옮겨서 목욕탕 매점을 하고 있을 때였다. 내가 일하는 목욕탕에 그들이 찾아왔다. 그들이 타고 온 차에는 ‘보건소 공무차량’이라고 적혀있었다. 두 명의 공무원이 내가 일하는 업소에 찾아온 것이었다. 당시에는 휴대전화가 거의 없을 때여서 나에게 바로 연락하지 못하고 당시에 내가 지내고 있던 형 집에 가서 내가 일하는 곳을 알아본 모양이었다.
두 명의 공무원은 나에게 찻집에 가서 이야기를 좀 하자고 했다. 나는 아무 영문도 모른 채 그들을 따라갔다. 그들은 내게 이렇게 말했다. 보건소에서 관리해야 되는 질환에 걸렸는데 그게 에이즈라고. 그때 나는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고 가을하늘이 참 높고 푸르구나, 하는 생각만 했다. 예비군 훈련을 갔을 때 헌혈을 하면 오전만 하고 일찍 보내준다고 해서 헌혈을 했었는데 거기서 양성이 나온 거였다.
그들은 나에게 ‘이건 잘 먹고 잘 지내면 아무렇지 않은 부자 질병이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하지만 나는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고 차츰 그들의 말도 들리지 않았다. 그냥, 세상의 끝에 혼자 서있는 느낌이었다.
나는 부산대학병원 감염내과에 등록했다. 그 당시의 약은 칵테일 요법이었는데 부작용이 심하고 약효가 완벽하지 않아서 면역 수치가 500 이상이 되는 사람에겐 약 복용을 권하지 않았다. 3개월마다 주기적으로 혈액검사를 했고 면역 수치가 떨어지면 약 복용을 시작했다.
그 당시에는 모두 ‘히브’에 걸리면 금방 죽는 줄 알았다. 나는 기아차 프라이드를 구입해서 출퇴근 때 이용했는데 히브 감염에 의욕을 잃고 일하고 싶은 생각이 달아나서 일도 놓아버렸다. 그 대신 죽기 전에 좋은 일이나 하다가 죽자는 생각으로 프라이드를 타고 여기저기를 찾아다녔다. 시골 지역의 복지관을 찾아가서 독거노인에 대해 알아보고 독거노인들을 찾아가서 말동무를 해주거나 반찬거리나 먹을 것, 입을 것을 사서 주고 다니기 시작했다.
자식이 연락이 안 돼서 기초수급도 못 받고 혼자서 들판 움막에서 지내는 노인이 있었고, 육이오에 참전한 상이용사인데 정부의 지원이 미약해서 혼자서 근근이 살아가는 노인도 있었다. 들판 움막에 혼자 사는 할아버지는 자식이 있어 기초수급 신청도 안되고 자식으 소식이 끊어지고 혼자 지내고 있었는데 나는 지역복지관 직원이랑 움막을 찾아 말동무 해주고 먹을거리도 해주곤 했는데 하루는 복지관 직원이 연락이 왔다. 할아버지가 당뇨가 있는데 발이 추위에 동사이 걸려 수술해야 된다고 차량을 지원해주면 좋겠다고 해서 나는 달려가서 복지사와 함께 병원에 입원시켰다. 그분이 발이 동상에 걸린 이유는 동네에 가끔 놀러오는 친한 노인에게 전기 장판을 사다달라고 부탁하며 돈을 주었는데 그돈으로 술을 사먹고 전기장판을 사주지 않은 것이었다. 나는 여러 노인을 만나서 말동무를 해주었고 그들은 누군가가 찾아준다는 사실만으로도 매우 고마워했다. 하지만 그 일도 여러 가지 문제로 지속하지 못했고 그 후 약 2년 동안 방황하며 시간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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