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퇴근길 지하철역을 가득 메우고 있는 선거운동원들과 후보자들이 내미는 명함을 받을 때마다 “저 사람들은 내가 투표권을 가지고 있는 동성애자라는 사실을 알고 있을까” 라는 엉뚱한 생각을 해보게 된다. 그리고 그들에게 직접 묻고 싶어진다. “당신들은 성소수자들을 위한 공약을 가지고 있나요? 우리를 위해 무엇을 해줄 수 있나요? 성소수자 인권에 대한 고민을 조금이라도 하시고 계시나요?”
하지만 대부분의 후보자들은 성소수자 지역주민을 유권자로 생각하지 않는다. 보이지 않고 집단적으로 행동하지 않으니 ‘있으면 있고 없으면 없는 존재’들로 여길 뿐이다. 굳이 신경 쓰지 않아도 당선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성소수자 관련 정책들도 인권기본조례, 차별금지조례 등 진보정당의 정당정책으로만 남아 겨우 생명력을 유지하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나는 그들이 웃으면서 건네는 선거공보물이 굉장히 부담스럽다. 마치 뒤에서는 ‘인생은 아름다워’ 시청자 게시판에 동성애를 비판하는 악성댓글을 다는 사람으로 돌변할 것 같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선거철 한 때만 손을 잡고 인사를 하는 그들의 모습이 낯설고 답답하게 느껴지는 건 어쩌면 당연한 느낌일지 모르겠다.
성소수자 유권자?
성소수자 유권자로서 투표를 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시민사회단체들은 선거 때마다 유권자 운동의 일환으로서 투표참가를 호소하고 후보자 공약을 검증하며 좀 더 면밀히 살펴보기 위해 각 후보자들에게 공개질의서를 발송한다. 성소수자 인권단체들이 모여 만든 성소수자 차별반대 공동행동도 2010 지방선거 대응으로 후보자들에게 발송할 성소수자 요구안을 마련하였다. 성소수자 요구안을 수용하는 후보들은 적극 지지하고 무응답으로 일관하거나 도저히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답변을 보낸 후보들은 걸러내겠다는 적극적인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더 나아가 마포지역에 거주하는 성소수자들과 지지자들은 최초로 마포레인보우유권자연대를 만들어 마포지역에서 출마한 후보자들에게 질의를 보내고 답변을 받고 있다. 동성애자인권연대는 서울 지역 민주진보 교육감 단일화 추대과정에 직접 참여하기도 했다. 이 모든 과정들이 유권자로서 성소수자들도 선거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집단임을 드러내기 위한 시도들이다.
성소수자 유권자로서 우리는 어떤 후보를 선택해야 하는가?
구미에 딱 맞는 ‘좋은’ 후보를 선택하고 싶어도 선택이 망설여지는 게 선거를 앞둔 지금의 심정이다. 아쉽게도 일부 진보정당 후보들은 반MB연합 기치아래 민주당과 후보단일화에 합의함으로써 후보선택을 더욱 혼란스럽게 만들어 놓았다. 북풍과 색깔론 논쟁으로 지방선거의 참된 의미는 퇴색된 지 오래고 선거당일까지 사회적 소수자들의 인권 공약들은 주류로 등장하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준비한 것이 우리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공약 그대로 선거정책에 반영한 ‘맞춤형’ 후보자를 만들어 보기로 했다. 일종의 대리만족이었지만 선거의 의미를 논의할 수 있는 유의미한 시간이었다. 기호0번 나이반 후보가 탄생하기까지 과정을 소개해 보고자 한다.
우선 “의료, 복지, 주거, 교육, 문화, 기타”로 나눠진 카테고리마다 각자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정책을 포스트잇에 적어보았다. 약 30여개의 정책들이 벽에 붙여졌다. 이후 자기가 작성한 정책들이 왜 필요한 지 설명하는 시간을 가졌다.
5월15일 회원프로그램
다음으로 참석자들은 나열된 정책 가운데 가장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정책 하나를 선택하였고 기호0번 나이반 후보 말풍선에 다시 부착했다. 총 10개의 정책이 나이반 후보의 공약으로 선택되었다.
1. 학생인권조례를 제정하고 교육과정에 성소수자 인권과목을 설치하도록 한다.
2. 교사들에게 정기적인 인권교육을 실시한다.
3. 초중고 성소수자 인권교육을 의무화한다.
4. 노년 성소수자들의 생활을 지원한다.
5. 1인 가구 주거정책을 개선하고 지원을 확대한다.
6. 지역에서 주1회 정기적으로 인권과 퀴어와 관련한 영화를 상영한다.
7. 트랜스젠더들이 성전환 수술을 원한다면 지원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든다.
8. 지역마다 성소수자들을 지원하고 함께 어울릴 수 있는 LGBT센터를 건설한다.
9. 보건소 및 의료기관을 통해 성소수자 전문 상담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한다.
10. 지역의 성소수자 단체를 지원하고 민관이 함께 협력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든다.
5월15일 회원프로그램
나이반 후보는 성소수자들의 바램 속에 있는 상상의 후보이지만 최종 선택한 공약 중 일부는 진보정당들이 내세운 공약과 일치하기도 한다. 비록 거칠고 부족한 정책들이지만 이 모두는 지금 당장 해결해야 하고 필요한 과제들이다. 아직 우리의 힘이 당선의 당락을 좌우할 수 있는 정도는 아닐지라도 나 이반 후보가 외치는 공약들이 실현되기 위해서는 성소수자 인권과 관련한 공약을 가지고 있는 정당 후보자를 지지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선거가 끝나서도 나이반 후보의 공약이 완성될 때까지 지속할 수 있는 운동이 계속 되어야 한다.
정 욜 _ 동성애자인권연대 운영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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