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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V AIDS

각자의 언어 만들어내기

by 행성인 2011. 5. 18.

각자의 언어 만들어내기

개별 보고서와 관찰들에서 유래한 어떤 담론의 내재 관념들이 반드시 실재는 아니다. 현상을 묘사하는데 쓰인 일련의 용어들은 현상의 일부 측면을 포착하지만, 대체로 전체 그림을 담지는 못한다. 초기 유행 때 나타났던 에이즈에 관한 임상 담론은 최초의 임상의들이 보았던 바, 여러가지 의미에서 사회적 천민이면서 이례적인 감염원에 의해 사망하는 환자들의 모습을 담고 있었다.

1981년, 미국에서 에이즈를 처음으로 다루며 묘사했던 의사들은 새로운 증상을 '게이 관련 면역결핍증', 즉 GRID라고 불렀다. 최초의 에이즈 환자 대부분이 게이였기 때문에 의사들은 '게이 관련'이라는 말을 신종 질환의 객관적 특징이라고 받아들였으나, 이는 잘못된 가정이었다. 불행히도 '게이 관련' 이라는 말을 한동안 미디어가 유포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동성애자만이 위험에 처해 있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문화적 의미를 전달했다. 나중에야 신종 질환은 '후천적 면역결핍증(AIDS)' 으로 불리게 되었다. '후천적(acquired)' 이라는 말은 GRID보다는 좀 더 외연적이고 객관적인 의미를 지닌 새로운 용어였다. 이는 면역결핍증이 면역계를 억제하는 화학요법 약물이나 영양부족 같은 사전조건의 결과로 생기는 게 아님을 가리켰다. 하지만 '후천적'이라는 말에는 감염을 초래하는 행동이라는 의미도 더해졌다. 사람이 그 질환을 획득하는(acquire) 것은 사실이라고 해도, '후천적'이라는 말은 미묘한 문화적 의미를 함축했는데, 그것은 질병의 획득을 감염자 탓으로 먼저 돌리는 의미를 담고 있다. 지금 쓰이는 용어인 '인간 면역결핍 바이러스, 즉 HIV'는 그런 함축된 의미를 모두 제거한다.

-과학의 언어, 캐럴 리브스, 35페이지 직접 인용


최근 네 명의 죽음, 그리고 자살에 대한 학교와 사람들의 대응을 보면 다시 HIV/AIDS가 떠오른다.



HIV/AIDS가 처음 관측되었던 시기, 미국과 호주에서 펼쳤던 HIV/AIDS 예방정책은 서로 상이했다. 미국의 경우, 처음에는 그 질병이 남성 동성애자에게 먼저 발견되었으며, 그것은 단지 '게이의 질병' 이었다. 이는 처음 AIDS가 GRID(gay-related immune deficiency)로 명명되었다는 점에서 관찰할 수 있다. 이 당시 남성 동성애자 운동과 일반사회는 어느 정도 적대적인 관계에 있었고, 일반사회는 HIV/AIDS에 신경쓰지 않았으며 정부는 이에 별 관여를 하려 하지 않았다. 이러한 HIV/AIDS가 확산됨에 따라 가장 먼저 대처를 해야했던 것은 이른바 '위험군'의 사람들이었다. 다른 위험집단이 어떤 대응을 했는지는 잘 알지 못하지만, 이 당시 게이들은 스스로 집단 내의 HIV/AIDS 감염에 대처해야 했고, 이 당시 백인 중산층 집단으로서 축적된 역량이 어느 정도는 HIV/AIDS라는 '병'의 정체를 밝히는데 기여했다는 것은 사실이다.


이러한 움직임에 따라, AIDS가 어떤 바이러스에 의해 감염되며, 그 경로는 혈액과 정액임이 확실해졌다. 의사들과 방역의 주체였던 정부는 AIDS 확산을 막기 위해, 감염경로를 차단하고 통제할 필요가 있었는데, 이 방식이란 '게이들의 문란한 성 행동을 줄이는 것' 이었다. 언제나 말하듯, 이러한 '문란함'이 누구의 이야기였나 하는 것은 주의깊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문란함'이라는 표현에는 불특정 다수와 성관계를 맺는 그 행위 자체가 '도덕적'으로 나쁘다는 가치판단이 들어있다. 그렇다면 먼저 물어볼 것은 “그 가치판단이 정당한 것인가”이고, 다음으로는 물어 볼 것은 “과연 '불특정 다수와 성관계를 맺는' 행위만이 AIDS 확산의 원인인가”이다.


미국의 경우 이러한 정책을 펼치는데 있어, 위험집단이 직접 방역정책을 만들어나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전염병은 두 가지 측면에서 '확산을 막아야 할 것'이 되는데, 하나는 위험집단의 생명이 직접적으로 위협을 받을 때이고, 나머지 하나는 위험집단과 그 외부를 떠나서 모든 사람의 생명이 위협을 받을 가능성이 있을 때이다. 그러나 미국의 정책은 앞의 것을 제대로 다루어내지 못했다. 고장은 어디에서 발생하는가? 왜 '위험군'은 정말로 질병의 위협으로 인해 '위험'한 위치에 있게 되는가? 이러한 질문에 당사자의 목소리와 삶을 제대로 주의깊게 담아내며 답하지 않는다면, 그 예방정책은 의미를 잃을 것이며 실효성도 없을 것이다. 또한 두 번째 측면의 강조는 위험집단 및 감염인 집단을 사회에서 격리시켜야 할 존재로 만들어 버린다. 감염인에 대한 사회적 낙인은 오히려 감염인이 스스로의 삶, 특히 건강을 통제할 수 없게 하며, 동시에 비감염인에게 감염인과 '분리'되어있다는 인상과 저들을 통제하기만 하면 나는 안전할 것이라는 인상을 주게 한다.


호주의 정책은 미국의 정책과는 달랐다. 보통 남성 동성애자로 표상되는 MSM(male sex with male), MTF 트랜스젠더, 이주노동자, 성노동자 등 소위 말하는 '위험군'이 직접 예방을 위한 정책결정과정에 참여하도록 했다. 그리고 그들이 직접 자조적인 모임을 형성하고 스스로의 건강을 통제할 수 있는 기반을 만들 수 있게 도왔으며, 동시에 이러한 사람들과 감염인에게 낙인이 찍히지 않도록 사회분위기를 만들어가려 했다. 적어도 이 점에서 호주는 미국보다 성공적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각주1)


사람들은 왜 자살을 하는가? 왜 카이스트에 재학 중인 (비단 이것이 카이스트만의 문제만은 아닐지도 모르지만) 학생들이 자살을 했을까? 그 원인은 결코 명확할 수 없고 단정지을 수도 없다. 그러나 몇 가지 외부적인 요인들이 그에 영향을 주었으리라고 생각할 수 있다. 어떤 사람들은 카이스트의 정책이 '자살'의 직접적인 원인은 아니었을 것이고, 이러한 일련의 일들에 편승하여 학교의 정책을 비판하는 목소리를 내려는 것은 기회주의적인 행동이며, 죽은 이에 대한 모독이라고 말한다. 또 한편으로는, 특히 등록금 문제가 자살의 결정적인 원인이기 때문에 학교의 정책을 바꾸는 것이 가장 급선무라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들은 때로는 환원주의적으로 보이기까지 한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이 둘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고 있다.


자살은 질병일 수 있고, 아마 질병이 맞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병'이란, 언제나 사회적인 것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어떤 화학물질이 사람의 '충동'을 불러일으킨다는 설명에는, 화학물질이 더 많이 분비되었을 당시 그 사람의 '외적행동'이 '충동적'인 것이라는 언어적 가정이 들어있다. 어떤 것을 '충동적'인 것으로 부를 것인가? 과연 이 과정에서 우리는 완전히 객관적인, 통제변인을 명확히 구분해내어 언제나 재현할 수 있을 것이라는, 이른바 '과학적' 결과를 얻어낼 수 있을 것인가? 그것은 환상이고, 오만이다. 과학은 언어의 일종이고, 그것은 필연적으로 각자의 가치관을 반영하며, 생각보다도 자주 임의적이다.


그러므로 이런 일들에 있어 학교의 정책과 개인의 문제 모두에 집중해야 한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로 보인다. '약'과 '상담'은 우울증을 완화하는데 분명 도움이 될 수 있고, 자살과 같은 비극적인 일이 더 일어나지 않게 해 줄 수 있다. 그러나 단지 ‘상담’의 부족이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는 말은, 단순히 지금의 상태를 유지한 채 개개인을 향한 의료적 조치만을 통해 상황을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는, 순수하거나 지극히 기만적인 말이다. 그러므로 정책, 그리고 그 정책이 만들어낸 삶의 형태가 우울증의 한 원인일 수 있다는 점을 간과할 수 없고, 비록 쉽진 않겠지만 이것을 바꾸기 위한 노력이 분명히 필요하다.


우리가 해야 할 질문은 '고장은 어디에서 발생하는가?'이다. 우리는 그 고장을 느끼는 당사자들의 목소리, 그리고 결과적으로는 잠정적인 당사자인 모두의 목소리를 크게 만들어야 할 것이다. 자신의 삶과 건강을 지켜내려는 목소리를 모아, 제도나 정책과 같은 삶의 통제요소에 개입할 수 있게 만들어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주류의 목소리, 즉 이미 힘을 가져왔던 학교나 언론의 중심성을 깨뜨리고, 끊임없이 주변의 목소리를 강조해야한다.


나와 우리의 언어를 만들어내기 위하여


어떤 의미에서 각자의 언어는 각각 다르다. 어쩌면 외연이 유사하다는 점이 모두의 언어가 같다는 '착각'을 불러일으키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떤 문제든, 그 문제는 '당사자의 언어'로 가장 잘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당사자의 언어'란 그 사람이 지금 사용하고 있는 언어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다. 나와 복잡하게 얽힌 언어적 관계 속에서 구성될 수 있는 총체적인 어떤 것을 말한다. 어떤 사람은 그것을 '자신의 언어'라고 온전히 부를 수 있을 만큼의 언어를 가지고 있지 않을지도 모른다. 어떤 언어로 자신의 문제를 서술할 때, 그 언어가 불충분할 수도 있다(예를 들면, 자신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단어를 보면 이런 느낌을 받곤 한다). 혹은 충분하게 느끼지만, 그 언어가 언제나 갖는 한계에서 비롯하는 또 다른 방식의 설명을 했을 때, 그것이 더 적합한 언어일 가능성이 있다는 불완전함을 느낄 수도 있다. 그러므로 사실은 어떤 언어도 완전할 수 없음을 인식하고 인정하는 것이 언제나 모든 것의 시작이라고 생각 한다.


이곳에는 사회문화적으로 형성된 '주류 언어'가 있다. 이 '주류 언어'란 많은 사람들이 가진 언어이기도 하고 발화되었을 때 더 큰 힘을 갖기도 한다. 어떤 측면에서는 설득 및 공감을 필요로 하지 않는 암묵적인 언어이며, 혹은 더 큰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직접 사용하며 끊임없이 반복되는 언어이기도 하다. (각주2) 어떤 특정한 경험이 나타나고 '예외적'인 상태가 발생할 때, 우리는 우선 이런 '주류 언어'에 기반해 형성되었던 ‘나의 언어’를 통해 상황을 설명해본다. 인식적 과정으로서의 언어적 과정은 이러한 설명과 상황이 끊임없이 충돌하며, 행동과 발화를 통해 설명과 상황이 끊임없이 변해가는 과정이다. 그 속에서 고장을 더 많이 일으키는 자들이 소수자minority다.


소수자의 언어는 언제나 잘 드러나지 않으며 온전히 평가되지도 않으며, '정상적', '일상적'인 '상황'과 '담론'에 매몰된다. 그러나 이런 매몰됨을 발견하기란 쉽지 않고, 비슷해 보이는 구조는 쉽게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이미 말해진 반복된 언어는 설득의 과정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언제나 소수자의 언어에는 도덕적 무결성과 논리적 무결성이 요구되지만, 다수자의 언어는 그 자체로 도덕적/논리적으로 이미 '무결'하다. 그러나 실상은 모두가 매몰되어 있음을, 모두가 사실은 서로의 언어에 무지함을, 그리고 무지할 수밖에 없음을 인정해야 한다. 두 언어가 경합할 때, 우리는 소수자의 이야기를 먼저 들어야 한다(물론, 소수자의 이야기가 항상 더 옳다고 생각해서는 안 되겠지만).


언제나 유지하는 것이 뒤집는 것보다 쉬운 법이다. 그러나 주류 언어를 뒤엎어버리고 지금 나의 언어가 힘을 갖게 하려면, 서로 각자의 언어와 잘 작동하지 않는 원인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각자의 문제의식과 각자의 정치가 고유한 언어로 만들어져 서로 얽히고 엮였을 때, 비로소 언어를 바꾸고 세계-내가 인식하는, 그리고 나와 지금 상호작용하고 있는 것의 총체-를 바꿀 힘을 가지게 될 것이다.


서리_ 동성애자인권연대 회원

각주1. 이상 <섹슈얼리티와 위험 연구> (조병희, 나남)을 참조하였음.

각주2. 특히 이런 주류 언어 중 과학의 언어는 특별한 힘을 가지고 있다. '과학' 자체가 내재한 속성인지, 아니면 '과학'이라는 것이 지금 이 사회에서 그렇게 만들어져있는 것인지는 구별하기 힘들지만(그리고 사실 이런 구분 자체가 무의미하겠지만), 과학의 언어는 마치 진공 속의 불확실함에서 유리된 절대적이고 상대적인 객관성을 갖고 있는 것처럼 여겨진다. 그러나 과학의 언어가 분명 일상 언어와 다르겠지만, 온전히 분리될 수는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같게 말한다고 그것이 모두 '같은 의미'인가? 그렇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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