웅
‘다양성이 인정되는 사회’는 세계평화를 위해서라도 누구에게나 권장할만한 캐치프레이즈이다. 하지만 어떻게? 거창한 구호와는 달리 다양성에 대한 실천은 그리 쉽지가 않다. 오늘의 사회가 단적으로 보여주듯, 성소수자와 이주노동자의 예가 그럴 것이며, 성소수자 커뮤니티 내에서 소외받는 에이즈 감염인의 예를 들고나면 고개를 끄덕거릴 만도 하다. 혹은 우리들 자신도 커뮤니티 내에 횡횡하는 소문들에 휩쓸려 어떤 누군가를 도태시키는 데 일조하지 않았는지…. 다양성의 문제를 생각함에 있어 우리는 사회의 경계는 물론, 자신을 돌아볼 필요가 있다. 이번 글에서는 사회에서 에이즈의 의미와 감염자들의 칵테일 치료요법을 예로 들어 사회의 경계와 다양성의 인식, 긍정적 수용 자세를 생각해보고자 한다.
알지 못함에 대한 공포와 강박적 규제대상으로서 에이즈와 동성애자
20여년 전만해도 에이즈는 원인도 치료법도 모르는 상태에서 단지 남성 동성애자들 사이에서 많이 발병한다는 이유로 ‘게이 암(癌)’으로 치부된 바 있다. 감염원인에 대해 아무런 갈피도 잡지 못하는 상황에서, 동성애자들 사이에서만 일어난다는 에이즈에 대한 사회의 속설은 에이즈를 줄곧 ‘죽음의 병’으로, 혹은 ‘비도덕의 산물’로 치부하게 하였고, 이러한 오해는 정치적 탄압의 도구로써 이용되기 일쑤였다. 일련의 허황된 통계와 편견들로 인해 동성애자와 감염인들은 주변화 되거나 제도 밖으로 내몰릴 수밖에 없었다.
예나 지금이나 사회의 철저한 자기방어적 생리는 경계선을 그어놓고 자기 외의 것들을 강박적으로 바깥으로 밀어 낸다. 자기경계의 유지에 집착하는 사회에서 ‘타자의 존재’는 위협이 되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감염인들은 평생을 가져가야 하는 자신의 질병을 받아들이는 데 있어 각고의 아픔을 이겨내야 했다. 더불어 주위의 시선과 편견을 감내해야 함은 물론이다. 삶에 맞서야 하는 감염인들의 처지는 편견과 차별의 조건에서, 어찌보면 당연한 상황인지도 모른다. 이렇듯 강박적인 사회의 값은 ‘비도덕적 행위’로 ‘알지 못하는 위험한 것’을 떠안은 이들에게 상상 이상의 용기와 힘의 자리를 필요로 한다. 이는 얼마든지 에이즈의 감염을 예방할 수 있고, 감염 시에도 관리하면 건강한 삶을 유지할 수 있는 ‘만성적 불치병’으로 정리되는 오늘의 상황에서도 크게 변하지 않은 듯 하다.
사회 경계에의 집착과 자기 불안
비도덕의 누명을 뒤집어쓰고 질병의 범주를 넘어 ‘재난’으로 받아들여지는 에이즈처럼, 사회의 기준과 경계를 넘어서는 것들에 대한 두려움은 이내 혐오와 터부로 현현된다. 사회의 자기경계에 대한 집착은 제 잣대로 타자를 규정하고 이들에 대한 편견과 차별을 만들어낸다. 사회의 보편적 그물망에 걸린 소수자들의 삶의 입지는 그만큼 배제되고 좁아지기 마련이다. 한국의 많은 동성애자들의 경우, 그들의 공간은 가족과 친구들로부터 아웃팅의 위험을 피해야 한다는 강한 조건에 묶여있다. 그렇기에 동성애자로서 삶의 공간은 온라인커뮤니티 내지는 종로와 이태원, 홍대의 몇몇 바처럼 같은 정체성을 공유하는 이들의 장소로 국한된다. 장애인과 에이즈 감염인은? 말할 것도 없음이다.
하지만 외부에 대한 배제와 사회의 제 경계에 대한 집착은 정작 그들 자신에 대해서도 확신할 수 없다는 자기불안의 이면에 다름 아니다.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 는 감상적인 표제는 한편으로 자기경계의 보호를 위한 강박적인 통제와 규정을 추동하는 것이다. 하지만 끊임없이 자기 외부의 것들을 조종하기 위한 방편들을 만들어내는 자기집착은 역설적으로 불안을 은폐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사회가 갖는 경계의 불안은 기실 우리에게도 해당된다. 주변에 ‘이렇게 살면 행복하다.’ 라는 식의 법이나 매뉴얼들이 수도 없이 만들어지고 강요되어온 현실들은 불안한 우리의 삶을 예증하지 않는가. 예의 불안기제들은 동성애자 커뮤니티에서도 발견된다. 동성애자들의 불안은 아웃팅의 위험으로 국한되지 않는다. 누구든 질병으로부터 노출되어 있음에도, 남성 동성애자들이 에이즈 위험군에 속해 있다는 인식은 감염에 대한 두려움을 여느 사람들보다도 배가 될 수밖에 없게끔 한다.
◇◆상담은 자기 안위의 안정을 찾기 위한 방편이다.
이반시티 게시판의 에이즈 관련 상담글들은 에이즈에 대한 동성애자들의 두려움을 반영한다.
질병에 가지는 두려움이야 으레 자연스러운 것이리라. 하지만 그것이 극에 달하면 이들의 시선은 감염인에 대한 색안경으로 전가된다. 커뮤니티 속 감염인들의 행동들은 비감염인의 경우보다 민감한 반응을 야기한다. 같은 잘못도 으레 정도를 넘어 ‘더’ 벅차고 더러운 것으로 평가하기 십상인 셈이다. 하지만 ‘나는 그럴 일 없다.’ 라는 그들의 뻔뻔한 자의식은 낯선 것들에 대한 무지와 은폐된 공포를 반영한다.
다양성의 조건 1: 소외에 대한 자기인식의 필요성
일정한 규범과 가치관에 편입되는 삶에서 ‘타인’이라는 낙인을 찍힌 이들은 소외되고 억압될 수밖에 없다. 이성애 가족 중심으로 짜여진 제도의 틀에서 성소수자들은 어떠한 세금감면이나 보험혜택으로부터도 제외된다. 법적으로 보장받는 성소수자 가족은 고사하고 식당이나 놀이공원의 커플할인도 안된다는 말을 듣고 나면 울화가 치밀다 못해 개밥에 도토리가 된 기분마저 든다. 그렇기에 세상 살면서 정신 똑바로 차려야 한다는 말은 허튼소리가 아닐 것이다. 살아가면서 자신을 인식하는 자세는 어떠한 모습으로든 사회를 향해 자신의 요구를 어필하도록 만든다.
사진은 90년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국제 에이즈 회의International AIDS conference에서 시위하는 ACT UP.
피켓에는 ‘탐욕=죽음’, ‘에이즈로부터 부당이익을 멈춰라’ 라는 내용이 쓰여 있다.
80년대 이후 의학적 연구와 함께 꾸준히 진행된 에이즈운동은 사회적 의식 변화와 감염인의 권리를 지속적으로 요구해왔다. 외부로 밀려나고 주변화된 소수자들이 자기 목소리를 냄으로써 자신들의 권리를 쟁취하고자 하는 시도들은 보수화된 사회에서 공격의 대상으로 낙인찍혔던 동성애자와 감염인들의 연대 아래 꾸준히 이뤄져 온 것이다. 오늘의 커뮤니티에서도 예방과 동시에 에이즈에 대한 상식과 감염인에 대한 의식변화를 위한 노력은 계속되고 있다.
다양성의 조건 2: 칵테일 요법의 교훈, 외부와 지속적으로 조응할 것.
한편 신약들이 개발 중인 최근에도 칵테일 요법은 널리 알려진 치료법으로 통한다. 이렇다할 완치방법이 없는 상황에서 하나의 약품만을 투여하는 방법은 내성이 생기기 쉽기 때문이다. 여러 가지 약을 복용함으로써 면역수치를 증가 또는 유지시킨다는 점에서 칵테일 요법은 현재에 이르기까지 널리 적용되고 있다. 즉, 칵테일 요법은 오늘까지도 완치 불가능하지만 다양한 약물을 복용함으로써 건강한 삶이 유지 가능하다는 점을 치료의 특징으로 삼는다.
헌데 여기서 칵테일요법의 원리는 살아가는 데 있어 열쇠말 하나를 더 덧붙여준다. 바로 자기인식과 더불어 외부의 규범과 삶의 기준을 초과하는 미지의 존재를 인식하고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지며 조응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질병을 받아들이고 다양한 치료법과 건강한 생활방식들을 준수함으로써 삶을 유지해 나가는 것과도 같은 원리이다.
자기인식은 단순히 ‘나는 소중하니까-’ 만을 외치며 나를 치장하고 보호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오히려 의식의 구성은 동시에 자신의 한계를 내포하고 있다. 타인의 존재를 통해 나의 한계를 인식하고 이해할 수 있는 방안들을 모색하고 실행하는 것은 그만큼 중요해진다.
다양성의 조건 3: 넓은 차원의 다양성을 위한 요구와 노력들, 일방적 관점의 다양성을 경계할 것.
이런 점에서 칵테일요법은 경계 바깥으로 몰리고 주변화 되는 것들에 대해 다양한 관계 가능성들을 조망하고 있다. 하지만 그것이 단순하게 일관된 관점에서 허용되는 제한된 상태의 다양성을 의미하지는 않을 것이다. 즉, 다양성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데 있어 나의 시선이 일방된 것은 아닌지를 주의해야 한다. 바깥으로부터 다가오는 타인의 존재는 아직 받아들여지지 못한 상태에서 낯설고 당황스럽게 나타날 수 있다. 여기서 필요한 것은 자기경계의 철저한 보안 검색이 아니라 정체성을 인식하면서도 여기에 고립되지 않을 여유일 것이다. 즉 다양성의 시작은 자기반성과 타인에 대한 인정으로부터 시작된다.
더불어 필요한 것은 내가 살고 있는 사회를 들여다볼 줄 아는 눈일 것이다. 우리는 자기인식과 동시에 비판적 관점을 고수함으로써 다양성을 보장받기 위한 제도적 토대의 변화를 요구해야 한다.
자본주의사회에서 다양성은 무작위로 소비된다. 게이가 소비사회 안에서 자리매김 하는 것이 자기 스스로의 목소리를 낼 수 있다는 긍정적 측면을 무시할 수는 없겠지만, 주도권은 여전히 자본과 지배권력에 있다는 점이 문제로 주어진다. 소위 돈 나고 사람 나는 격이다.
◇◆ 프랑스의 에이즈 예방 캠페인 광고들, 이전과 다름없이 오늘날에도 에이즈는 죽음과 공포로 표상된다.
예방의 목적 아래 감염인의 인권은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자극적인 육체가 강조되는 이미지들은 에이즈를 범람하는 섹스산업 속에서 ‘성적 매혹과 죽음의 위협’이라는 이중성으로서 소비한다.
자본주의사회가 요구하는 것은 우리의 지갑과 능력이지, 다양한 성적 지향성은 지갑과 능력에 붙는 부수적 옵션에 불과하다는 점을 직시하자. 무엇이든 수용 가능하고 소비되는 세상에서 정작 동성애자로서, 감염인으로서의 삶은 소외된다. 오늘날 신자유주의 정책에 FTA마저 체결된 상황에서 에이즈운동은 감염인들의 권리를 위해 거대 자본과 제약회사들에 맞서 신약의 신속한 보급을 요구한다. 이처럼 나의 건강한 삶이 자본주의의 논리로 환원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그리고 다양한 삶이 돈에 포섭되어 유린당하지 않기 위해서는 그만큼의 사회적 차원의 요구와 저항들이 필요하다.
주디갈란드의 'Somewhere Over the Rainbow'라는 노래처럼 사람들은 무지개 너머의 세계를 꿈꾼다. 하지만 누구도 그 너머의 세계를 정확히 묘사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캔버스에 다양한 색의 물감이 조합되는 것처럼, 우리는 현실과 그 너머 미지의 무언가를 매개하는 다채로운 경계로서 ‘무지개’를 바라볼 수는 있지 않을까. 여기서 중요한 것은 경계의 역할일 것이다. 우리의 경계는 다양성을 만들어내는 동시에 받아들일 줄 알아야 한다. 사회의 경계와 나의 자의식이 얼마든지 외부와의 관계를 통해 변화 가능하다는 점을 인식하는 것이야말로 엉켜있는 고민들을 풀어내고 새로운 매듭을 짜나가는 첫 걸음이라고 믿는다.
웅 _ 동인련 걸음[거:름] 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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