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을 수 없는 자본주의의 비열함

Posted at 2008.10.30 12:41// Posted in HIV/AIDS

> 동성애자인권연대 웹진 '너, 나, 우리 랑' 10월 호

 

 2008년 10월 7일 아침, 강남의 한 빌딩 앞에 동인련 활동가들을 비롯한 여러 단체의 활동가들이 모여 들었다. 다국적 제약 기업 ‘로슈(roche)'에 항의 하는 국제공동행동에 힘을 모으기 위해서였다. 시시각각으로 색을 바꾸던 그날의 하늘은 청아하게 높았고 거대한 빌딩들은 그런 하늘 위로 무신경하게 솟구쳐 올라 있었다. 마치 해볼 테면 해보라는 듯 잔뜩 웅크린 채 버티고 서 있는 자본의 철옹성들과 마주 선 나는 잠시 동안 그 위용에 주눅이 들었던 것 같다. 그 검고 거대한 괴물들의 이마에 붙은 이름들을 보면서 이 사회의 기득권을 독점하고 있는 것이 누구인지 분명히 알 것만 같아 섬뜩하기만 했던 것이다.

10월 7일 삼성동 한국 로슈 앞에서 열린 '로슈 규탄 국제공동행동' 모습
_ 민중언론 참세상 사진 인용



 
 다국적 제약 기업인 로슈사의 사이트를 방문해 보면, 참으로 역겹게도 ‘책임감과 윤리의식을 가지고 인류의 건강과 삶의 질을 향상시켜 나갈 것이며, 개인과 사회, 환경의 요구를 존중하여 지속가능한 개발을 위해 노력할 것’이라 천명하고 있다. 그들이 만약 본인들의 더러운 손으로 적어놓은 그 공허하고 유치찬란한 글귀의 반에 반만큼만 실천을 했더라도 굳이 우리가 강남 한복판에서 오들오들 떨면서 하루를 보낼 이유는 없었을 것이다. 나는 그들의 염치없음에 분노를 느끼면서 그날 하루를 보냈다. 그리고 거의 한달이 다되어가는 이 시간 이 시점에도 이 더러운 기분은 잘 가라앉지를 않는다.


 평소 솔직한 감정을 잘 표현하지 못하는 내가 이토록 강하게 반감을 표출하는 이유는 어쩌면 단 한가지로 귀결될 수 있을 것 같다. 동인련 회원 중에는 가브리엘이라는 감염인 회원이 있다. 그는 로슈사에서 독점 생산하는 ‘푸제온’이라는 약을 반드시 복용해야 한다. 하지만 로슈는 단지 한국에서 팔아봤자 돈이 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푸제온’을 아예 공급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로슈사의 외국인 사장은, ‘푸제온’을 먹지 못하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그를 위해 면담을 요청했던 우리 측 활동가들을 향해 “돈이 없으면, 약을 못 먹는 것이 당연하다”고 맘대로 지껄인 뒤,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고 한다.


 다행히 가브리엘은 주변의 여러 사람들의 도움으로 아주 운 좋게도, 아주 비싼 값으로, 아주 어렵게 문제의 약, ‘푸제온’을 구할 수 있었다.


 우리는 누구나 HIV 감염에 노출되어 있다. 정체성과 상관없이, 성별과 나이에 상관없이, 그가 많이 배웠건, 그렇지 않건, 성적으로 문란하건, 그렇지 않건 우리들 중 어떤 사람도 운이 나쁘면 감염될 수 있는 것이 HIV이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얼마든지 암에 걸리거나, 뇌졸중으로 쓰러지거나, 백혈병에 걸려 병마와 사투를 벌이거나, 치매나, 루게릭병, 파킨슨씨병, 루프스, 그 어떤 이름도 듣도 보도 못한 희귀질환에, 운이 나쁘면 걸릴 수 있듯이 우리는 모두 그렇게 HIV에 노출되어 있는 것이다. 질병 앞에서 환자가 더 위험한 그룹 출신인지, 덜 위험한 그룹 출신인지는 결코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우리는 누구라도 특정한 질환으로 인해 고통 받을 수 있고, 만약 그러한 상황에 처하게 된다면 사회와 주변의 관심 속에 치료받고, 필요하다면 필요한 약을 공급받고 복용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이렇게 지극히 당연한 일들이 당연하게 이루어지지 않는 사회 속에서 우리는 살고 있다. 만약 로슈가 ‘푸제온’을 공급했더라면, 그래서 제때에 ‘푸제온’을 복용할 수 있었더라면, 지금처럼 이렇게 시력을 잃지는 않았을 거라고, 자유롭게 걷는 것이 불편해지지는 않았을 거라고, 죽을 고비를 넘기며 고통 받지 않았을 거라고 가브리엘은 말했다. 그날 밤, 그의 눈물을 보면서, 그의 용기 있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오직 나만의 안위만을 생각하며 살아왔던 내가 부끄러웠다. 그리고 내가 살고 있는 이 사회의 사람들이 너무나 불쌍해졌다. 목이 터져라 ‘이윤보다 생명이다’를 외치고 있는 우리들을 향해 마치 자기와는 아무 상관없는 일이라는 듯 심드렁한 시선을 던지고 있는 그들이 무척이나 안타까웠다.

 

 우리가 남의 일이라고 무관심하게 이런 저런 일들을 흘려보내며 살아가는 동안, 나 자신의 안위만을 위해서 전전긍긍하며 살아가는 동안, 자본을 틀어쥐고 있는 족속들은 우리의 생명마저도 상품화하고 있는 것이다. 로슈의 사장이 아주 잘 지적했듯, 이 사회는 돈이 없으면 꼼짝없이 죽어야만 하는 사회가 되었다. 국민의 세금과 맘 좋은 사람들의 기금을 끌어다가 개발한 새로운 의약기술은 평범한 사람들의 것이 아니라, 강남에 고층 빌딩을 짓고 영업을 하는 기득권층의 전유물이 되었다. 그들은 자본과 더불어 우리의 생명마저도 틀어쥐고 있는 것이다. 당신이 ‘이윤보다 생명이다’라는 말에 관심이 있건 없건, 가브리엘이라는 사람의 어려움과 슬픔을 알건 알지 못하건, 이것은 벗어날 수 없는 굴레이며, 당신 역시 예외일 수는 없다.


 그래서 나는 이 비열한 사회가 슬프도록 무섭다. 뻔뻔하게 ‘돈 없으면, 약을 먹을 수 없는 것이 당연하다’고 잘라 말하고도 얼굴을 빳빳이 들고 다닐 수 있는 사회가 나는 지독하게 겁이 난다. 내가, 그리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 중 누군가가, 혹은 내가 모르는 어떤 사람이 치료법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돈이 없다는 이유로 죽어가도록 내버려 둘 수도 있는 이 참을 수 없는 자본주의의 비열함이 두렵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희망은 있다고 말하고 싶다. 그날, 강남 한 복판에 가브리엘의 눈물을 닦아주고 어깨를 두드려주기 위해 모였던 사람들과, 세계 어딘가에서 ‘이윤보다 생명이다’를 자기말로 외쳤을 얼굴을 모르는 수많은 사람들과, 용기를 내어서 살고 싶다고 외치는 감염인들과, 이글을 보고 조금이나마 안타까운 마음을 가지게 될 당신들로 인해서 세상은 여전히 아름다울 수 있다고 말하고 싶다. 우리가 앞으로 만들어 나갈 사회는 이러한 노력 하나 하나가 모여서, 이윤과 이익보다 인간과 생명을 중요시하는 사회가 될 수 있을 거라고 믿고 싶다.



해와 _ 동성애자인권연대 걸음[거:름] 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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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8.10.31 22:37 신고 [Edit/Del] [Reply]
    블로그로 담아갈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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