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성애자인권연대 웹진 '너, 나, 우리 랑' 10월 호
 


AM 5:30

잠이 덜 깨서 멍한 상태로 기상. 정신을 차려서 얼른 씻고, 옷을 입고 K형과 함께 집을 나섰다. 차가운 아침공기는 머리를 맑게 해주었다. 아침 출근시간의 지하철 2호선은 언제나처럼 붐비었고, 겨우 자리에 앉자마자 다시 꾸벅꾸벅 졸면서 망원에서 삼성역까지...


AM 7:30

삼성 역에서 내려서, 바로 보인 것은 우리가 오늘 싸워야 할.. 아니 앞으로도 이 일이 해결되기 전까지 계속 투쟁, 분쟁해야할 '로슈(ROCHE)'회사가 있는 큰 타워. 글라스타워였다. 글라스타워의 옆에는 먼저 온 사람들이 벌써 준비 중이었고, 나도 처음 보는 사람들과 어색한 인사를 하면서 일을 도왔다. 나는 선전물을 한아름 챙겨서, 지하철 출구 쪽에 서서 사람들에게 나눠주기 시작했다. 출근시간이어서 그런지 쉴 새 없이 사람들은 터져 나왔고, 한 사람이라도 더 이 선전물을 봤으면 좋겠다는 심정으로 열심히 나눠주었다. 평소 나는 길을 지나치다가, 누군가 선전물을 나눠주면 보통 받지 않는 편이었다. 어차피 읽지도 않고 관심도 없으니 차라리 나 말고 다른 사람에게 나눠주는 게 낫다는 생각으로 대부분 그냥 지나쳤다. 하지만 내가 오늘은 이 선전물을 나눠주고 있는 입장이 된 것이다. 받는 사람이 반, 무시하는 사람이 반... 받는 사람들도 그냥 무심코 받으면서, 지하철에서 읽은 무가지 신문과 함께 휙 버려버리는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그럴 때면, 내가 다른 사람들의 선전물을 무시하고 지나쳤을 때가 떠올라 조금 부끄러워졌다. 그 사람들에게 아주 조금의 관심이라도 주었다면, 그 사람들에게 아주 조금이라도 힘이 되었을까..한사람이라도 이 로슈의 횡포에 대해서 알아줬으면, 하는 마음으로 다시금 열심히 선전물을 나눠주었다.


AM 9:00

사람들도 점차 줄어들고, 슬슬 선전물도 다 떨어져 갔다. 넉넉할 줄 알았던 선전물이 모자라, 다시 주문을 해야 한다고 들었다. 아침도 못 먹고, 아침 일찍부터 쉰 목소리로 선전물을 나눠주니 왠지 기운만 쭉 빠졌다. 토스트 하나를 물고 아까 내가 나눠주었던 선전물을 다시 천천히 읽어보았다. 제약회사 로슈(ROSHE). 2004년 '푸제온'이라는 약을 시판허가 받았다. 그러나 값이 싸다는 이유로 3년째 공급거부. 약값은 1년에 2만 달러. 이 약이 필요한사람에게는 정말로 돈으로 장난하는 격이다.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전 세계 에이즈 환자에게 필요한 약이다. 로슈는 약을 판매하여 사람을 살리는 게 아니라, 약으로 돈으로 사람을 약 올리며 '살인'을 하고 있는 셈이었다. 어이가 없었다. 이게 정말 약을 파는 회사인가? 누가 봐도 약으로 장난치는 거 아닌가. 이윤을 위해서 살인을 하다니..


AM 10:00

다들 조금씩 쉬고 나서, 글라스타워 정문 앞에서 기자회견을 준비했다. 기자들은 많이 안 왔지만 순조롭게 진행되었고 사람들의 발언 하나하나가 너무나 가슴이 아프고 진심 어리게 느껴졌다. 마지막 퍼포먼스도 상당히 인상적이었다. 모두들 얼마나 힘들까. 이 로슈라는 회사 하나 때문에, 우리 모두가 피켓을 들고 싸워야 한다는 게 무척 힘들고, 처량하게까지 느껴졌다. 준비한 모든 기자회견이 끝나고, 주문했던 선전물이 왔다. 어느새 점심시간이 되었고 사람들에게 다시 선전물을 나눠 주었다. 조금씩 지쳐갔다. 받아주지 않는 사람들. 마이크로 열심히 발언을 해도 그냥 무심히 지나치는 사람들. 힘들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 약을 못 먹는 사람들은 얼마나 힘들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다시금 힘을 내, 목소리를 더욱 크게 내면서 선전물을 나눠주었다.





PM 2:00

늦은 점심시간. 선전물을 모두 나눠주고 사람들과 밥을 먹었다. 식사를 마치고난 뒤, 어젯밤 열심히 큰 천위에 글씨를 써서 준비해 둔 플래카드를 완성할 채비를 했다. 준비해 간 천 조각들로 퀼트를 만들어 횡단보도 시위에 사용할 작정이었다. 사람들이 모두 옹기종기 모여 플래카드를 만들기 시작했다. 원래 바느질로 직접 누벼야하지만, 시간이 없어서 본드로 열심히 붙였다. 힘든 작업이었지만, 다들 불만 없이 열심히 하였다. 다들 뭔가 도와주고 싶어 하고, 일하려한다. 무엇 때문일까. 무엇이 이들을 그렇게 만들 걸까 하는 생각도 문득 들었다. 장장 2시간만의 2개의 큰 플래카드가 완성되고, 인근 횡단보도로 가서 파란불이 되면 횡단보도 중앙으로 가서 큰 플래카드를 펼쳐서 차에 탄 사람들, 혹은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펼쳐 보였다. 사람들은 이 플래카드를 보고 무슨 생각을 할까. 우리가 무엇 때문에 이렇게까지 한다는 것을 알기는 알까.




PM 5:00

슬슬 문화제 준비로 다시 분주히 움직인다. 어느새 퇴근시간도 다가오고, 해도 지려고 준비 중이었다. 사람들은 점점 많아졌다. 호응이 좋았던 퍼포먼스를 한번 더 하고나서 영상물을 보았다. 그리고 노래하는 사람들의 공연이 이어졌다. 모두들 하나같은 마음이다. 마지막으로 가브리엘형의 발언을 들었을 때.. 마음이 찡했다. 결국 가브리엘 형은 모든 사람들에게 고맙다는 말을 남기고 눈물을 보였다. 그리고 모두를 한번씩 뜨겁게 안아주었다. 진심어린 가브리엘의 형의 말을 듣고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날 뻔했다. 마음이 아프다. 왜 우리가 눈물을 흘려야하는지 모르겠다. '로슈(ROSHE)'는 살인을 하고 있다. 약을 가지고 살인을 한다. 이윤을 빌미로 사람의 생명을 두고 장난을 치고 있다. 그러려면 약장사 때려 치고 엿장수나 해야지, 왜 약을 파는지 모르겠다. 한편, 우리가 아침 일찍부터 어두워질 때까지 이렇게 집회를 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날 한국로슈의 사장은 골프를 치러갔다고 한다. 나참.. 어이가 없었다. 약을 못 팔아서, 환자가 모두 죽어버리면 그럼 그건 약이 아니다. 그건 독이다. 환자가 없는데 약을 어떻게 팔 것인가. 어떻게 보면 나도 같은 상황이다. 나도 환자다. 비록 AIDS환자는 아니지만, 암이라는 병을 가졌고, 현재도 치료중이며, 하루라도 약을 안 먹으면 몸이 힘들고, 약을 먹지 않은 채로 며칠만 지나면 죽는 몸이다. 그러나 나에게는 비싸긴 하지만 약이 있다. 그 약을 정부로부터 지원 받고 있는 중이다. 어쩌면 난 '암'이라는 병을 가지고 있지만, 지금 이 푸제온이 필요한 사람들이랑은 비교가 안 될 정도로 행복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푸제온을 먹지 못하는 사람들은 하루하루를 겨우겨우 버텨나가고 있는 실정이라고 한다. 로슈는 언제까지 이럴 것인가. 아직까지도 로슈에 대한 투쟁은 계속되고 있다. 로슈가 해결책을 제시하지 않는다면, 이 분쟁은 끝이 없을 것이다. 로슈는 살인을 중단하고, 어서 빨리 해결책을 제시해야 할 것이다.





류찬 _ 동성애자인권연대 회원


신고
  1. 나라
    2008.10.31 00:52 신고 [Edit/Del] [Reply]
    그날 함께하지 못한 게 못내 아쉽고 부끄럽네요.
    이 비열한 세상, 그래도 희망을 품고 살 수 있는 이유 중에 하나는 그날 내몫의 열배 백배는 열심히 함께한 류찬 같은 동지들이 있어서, 가브리엘 오라버니처럼 내 절망따위는 부끄럽게 만드는 사람들이 있어서겠죠.
    이윤보다 인간!
  2. 신이
    2008.11.02 15:33 신고 [Edit/Del] [Reply]
    저도 그날 함께하지 못해 참 아쉬웠습니다.

    류찬님의 글을 읽고나니 이른 새벽부터 있었던 활동들이 선명하게 머릿속에 그려지는 것 같아 참 좋습니다.


    여담이지만, 제목처럼 스케치같은 문체... 그런데 왠지 크레파스와 수채화물감으로 그린것 같은 신선함이
    저절로 선한 웃음과 흐뭇함을 자아내게 하는군요. ^^
  3. 류찬
    2008.11.02 20:00 신고 [Edit/Del] [Reply]
    나라&신이 :: 아직 끝나지 않은 투쟁이에요. 다음에 있다면 꼭 같이 참가해요:D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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