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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V AIDS

AIDS 속에서 AIDS를 넘어서기

by 행성인 2008. 8. 25.
 변진옥



2004년도에 HIV/AIDS 인권연대 나누리+회의에 처음 참여했을 당시, 나는 남성동성애자로서 HIV에 감염된 사람들에 대한 연구로 석사논문을 쓴 직후였다. 교수님의 연구프로젝트에 참여하면서 알게 된 감염인들의 이야기가 내 석사논문의 주제가 되었고, 나는 그 연구를 통해서 한국에서 동성애자 감염인이라는 것 때문에 당해야 하는 비인간적 억압에 대해 어렴풋이나마 알 수 있었다. 내가 인터뷰한 분들의 이야기 중에서 가장 뇌리를 떠나지 않는 이야기는 “내가 에이즈에 걸렸다고 가족들한테 이야기 하지 않는 이유는, 그것이 나를 동성애자라는 이야기를 하는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내 가족들을 실망시킬 수는 없다”는  고백이었다. HIV감염인이라는 것이 노출되는 것 자체도 두렵지만, 가족들에게 조차 이야기 하지 못한 것은 오히려 동성애자인 자신의 성적 정체성이 가족에게 줄 충격이 더 걱정되었다는 것이다. 물론 내가 인터뷰한 분들은 당시에 거의 30대 후반이었으니, 그들이 이런 염려를 가지고 가족에게조차 이야기 못한 것은 지금부터 약 10년 전의 상황이다. 지금은 그 정도는 아닐 것이라고 생각한다.


에이즈 관련한 활동을 하면서 아마 가장 많이 받는 질문 중 하나는 “너는 어떻게 이 일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는가?”라는 것이다. 사람들이 주목하는 바는 “관계”이다. 나와 에이즈가 어떤 관계가 있는가에 대한 호기심이다. 그런 의미에서 소위 당사자라고 일컬어지는 HIV감염인은 물론이고 게이가 에이즈 운동에 관심을 가진다는 것을 표명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나는 알고 있다. 게이나 감염인이 에이즈 관련 활동을 한다는 사실을 말하는 것이 어떻게 보면 간접적인 커밍아웃이 되어 버리고, 에이즈에 대해 사람들이 가지는 편견에 그대로 노출될 것 같은 두려움이 존재할 것이 분명하다.


래리 크래머라는 게이가 있었다. 1981년 여름, 친구 3명을 잃고 나서 그는 Gay Men's Health Crisis라는 조직을 결성한다. 그는 이 갑작스런 게이사회 구성원들의 잇따른 죽음에 사회각층의 관심을 호소하고, 의료보험이 없는 동료들을 위해 모금을 벌이기도 했다. 물론 반응은 냉담했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게이사회 내부의 반응이었다. 크래머가 그런 운동을 하는 것이 이 재수없는 질병을 게이사회와 연관시켜 간신히 만들어 놓은 게이운동을 훼손시킬 것이라는 비난이 일었다. 상당수 게이들이 자신들의 존재가 드러날수록 반대세력의 저항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고, 따라서 부정적인 문제가 게이사회에 발생할 때 그 문제를 그냥 덮어두기를 원했다. 에이즈운동에서 가장 왕성한 활동을 성공적으로 벌여왔던 미국 게이사회의 반응도 초창기에는 이런 논란이 있었다는 사실과 더불어 한국에서 HIV와 동성애의 관계를 생각해보면, 나누리+에 ‘동성애자인권연대’와 ‘한국게이인권운동단체 친구사이’가 참여하고 있다는 사실은 실상 매우 감동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이것은 나누리+가 무엇을 하는 곳인지를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나누리+는 물론 HIV/AIDS감염인과 환자의 인권전반의 향상을 다룬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인도주의적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나누리는 HIV/AIDS에 가장 취약한 사람들이 어떻게 “구조적으로 만들어 지는지” 그리고 그 가해자들이 누구인지를 밝힘으로써, 개인의 책임으로 떠넘겨진 질병이라는 이름으로 은폐된 살인구조를 고발하고 개선하려는 명백한 의도를 가지고 있다.


나누리+의 문제의식은 현재 형성되어 있는 게이와 에이즈의 관계에 천착하기 보다는 현재의 이 관계를 생산한 성규범의 계보에 관심을 가진다. 성정체성과 성적 실천에서 다양성이 인정되지 않고 성이 단지 섹스행태로서 규정되어 ‘비정상’을 끊임없이 제외시켜 나가는 역사를 고발하려는 것이다. 이는 당연히 성해방과 연결된다. 여성을 해방시킨 것이 ‘피임약’만이 아닌 것처럼 게이사회를 에이즈로부터 지켜주는 것이 ‘안전한 섹스’나 ‘콘돔’만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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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퀴어퍼레이드 ‘AIDS & Solidarity + (에이즈와 연대)’참가단의 모습



  한국에서 에이즈는 서구와는 다른 맥락을 가진다. 한국에서 첫 감염인이 발견된 1985년부터 소위 성억압적이고 반인권적인 ‘에이즈예방법’이 만들어진 1987년까지 우리나라의 에이즈 감염인 수는 9명에 지나지 않았다. 게다가 이들 대부분이 외국체류자, 미군, 미군기지 근처의 성매매여성, 외항선원들이었다. 초기 한국에서 에이즈는 철저하게 ‘외래의 질병’으로서의 정체성을 가졌고, 서구의 성적 타락으로 인한 질병이 한국을 ‘오염’시키고 있다는 프레임을 형성하였다. 따라서 오히려 보수주의자들이라고 규정되는 세력보다는 민족주의 좌파세력에 의해 더 강하게 공격되는 바가 되었던 것이다. 게다가 80년대 후반부터는 에이즈 치료제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에이즈 예방법 제정을 전후로 해서 한국에서 에이즈는 곧바로 의료화되었고 사실 이때까지 한국의 게이사회가 에이즈를 자신들의 정체성 위기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90년대 중반이후가 되어서 한국에 게이운동이 태동되면서부터 에이즈에 대한 게이들의 대응도 시작되었다. 역시 90년대 후반에 한국의 게이사회에서도 나름의 에이즈논쟁(에이즈는 게이사회와 관계가 없는 것이라는 주장과 서구사회처럼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사고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었고, 그 일단으로서 지금까지도 에이즈는 게이사회에서 “척결”해야 될 일종의 “적”처럼 형성되어 있는 부분이 있는 것 같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보면, 소위 여성해방운동이 한때 남성에 대한 통제로 이해되면서 포르노와 성매매를 단속하려고 했던 시도와 닮아 있음을 보게 된다. 여성해방은 남성을 통제하는 것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모든 성정체성의 다양성을 인정하는데서 출발해야 함에도, 단순한 대결구도로 몰아가서 실제로는 극우보수주의자와 손을 잡고 포르노를 몰아내고 성매매를 불법화하는 시도를 함께 해나간 것은 우리에게 큰 학습이 된다.


모든 게이들은 에이즈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말이 동성애자들과 에이즈의 관계에 대한 편견을 담은 말일 수 있듯이 게이이기 때문에 에이즈에 특별한 관심을 보이지 말아야 한다는 강박도 그와 마찬가지다. 그리고 그 관심은 나와 동성애 커뮤니티가 에이즈로부터 “깨끗한”, 혹은 “아무 관계가 없는”상태로 만들어 가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동성애와 에이즈의 잘못된 관계를 깨는 것으로 출발해야 한다. 그것이 우리가 AIDS 속에서, 그렇지만 AIDS를 넘어서는 관계를 만드는 진정한 손잡기가 될 것이다.




 변진옥 _ HIV/AIDS 인권연대 나누리+ 활동가 / 건강사회를위한약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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