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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원 이야기/회원 에세이

하지만 나는, 전설이 될 거야

by 행성인 2011. 8. 5.

하지만 나는, 전설이 될 거야

출처 : 종로의기적 블로그 http://gaystory.blog.me/


소설 한편을 읽은 적이 있다. 고등학교 때였거나 스무 살 무렵이었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 책을 볼 리가 없었을 테니까. 소설은 외계인들이 지구를 점령하고 난 뒤의 이야기를 그렸다. 주인공은 한 여자였는데, 냉동인간이었다가 해동을 해서 다시 살아났다고 쓰여 있었다. 사람들은 지구인의 수가 줄어들자 냉동돼 있는 사람들을 하나 둘씩 깨우고 있었다. 당시 지구는 외계인이 점령하고 있었고, 지구인들은 동물원에 갇힌 채 외계인의 구경거리로서의 삶을 살고 있었다. 그 여자는 오래 전 미용사였던 것을 기억해내며 사람들의 머리를 잘라주었다. 우리 안에 갇힌 자신의 삶을 슬퍼하거나 비관하지 않고.


그리고 여자는 아무 말 없이 허공을 바라보는 눈빛이 무척이나 맑은 남자와 사랑에 빠진다. 동물원 관장은 여자에게 지구인들이 머리를 자른 이후로 입장객이 늘었다면서, 휴가를 다녀오라고 한다. 여자는 남자와 함께 하루 동안의 휴가를 나가기로 한다. 여자는 남자의 손을 잡고 낯설게 변해버린 지구를 구경하게 된다. 각기 다른 모습을 한 외계인들이 마치 예전에 지구를 가득 채웠던 사람들처럼 걸어 다녔다. 여자가 오래전 누군가의 손을 잡고 거닐던 거리들과 가로수들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여잔 낯선 마음을 숨기려 남자의 손을 꽉 잡았다. 그때 외계인 한 명이 둘에게 다가왔다. “휴가를 받았군.” 둘은 그 말에 깜짝 놀랐다. 외계인은 말했다. “어떻게 그 많던 지구인들이 갑자기 사라졌는지 아나? 모두들 외계인이 된 거지.” 하면서 외계인은 오래전 자신이 인간이었을 때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리고 둘에게 약을 한 병 주었다. 이 약을 먹으면 모습이 변해, 동물원에 들어갈 필요가 없이 이곳에 섞여서 남은 생을 보낼 수 있다고.


나는 오래전 읽은 이 소설의 내용을 한글자도 틀리지 않고 모두 기억했다. 그때 난 연인의 손을 잡고 광화문 신호등 앞에 서 있었다. 우리가 어딜 가고 있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았지만, 고작해야 책을 좋아하는 연인 따라서 교보문고에 가는 길이었을 것이다. 맞은편 사람들이 무표정한 얼굴로 이쪽을 보고 있는데, 연인은 갑자기 스르르 내 손을 놓았다. ‘사람들이 보고 있잖아.’가 이유였다. 난 머쓱해졌다. 그리고 그 소설이 떠올랐다. 나는, 그렇게 날 숨기고 있었다. 저편에서 이쪽으로 걸어오는 사람들은 모두 외계인처럼 보였다. 실은, 모두들 지구인이 아니었을까?


지구인들이 갇혀 있는 그 동물원과 내가 살고 있는 이 공간은 다를 바가 없다. 동물원에 갇힌 코끼리가 응가를 싸면 사람들이 ‘우와’ 하고 탄성을 지르는 것처럼, 내 모든 것들이 그냥 신기한 구경거리가 돼 버리는 것 같았다. 그래서 억지로 동물원 밖에 있는 척, 나와 같은 사람이 있더라도 편을 들지 않았다. 아니, 들지 못했다. <종로의 기적>을 보기 전까지 말이다.


처음으로 <종로의 기적> 번개 모임에 갔던 날, 나와 같은 사람들을 처음 만났다. 그때 난 그 영화를 두 번째 봤었나? 그랬다. 구할 수 있는 퀴어영화, 퀴어드라마는 전부 다 봤지만 그만큼 나의 공감을 이끄는 영화는 없었다. 진실, 혹은 진심 같은 것들이 느껴졌다. 만질 수 없는 진심이 만져졌다. 영화를 보면서 몇 번을 울었는지, 얼마나 울음을 참았는지 셀 수 없었다. 난 울음을 참으려고 가지고 온 물을 꿀꺽 삼켰다. 물이 참 썼다. 그 영화를 본 후, 나는 영화의 관객들을 만났다. 그날 함께 영화를 본 것도 아니고 처음 만났는데도, 나는 스스럼없이 사람들에게 나의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동물원에 숨어 있다고 생각했던 내가 처음으로 ‘나 여기 있어요.’라고 말하는 순간이었다. 만져지지만 단어로 표현하기에는 힘든, 마음의 울림이었다.


그날 나의 웃음과 함께 했던 이들의 웃음을 무엇이라고 표현할까, 생각했다. ‘지구인, 우리는 지구인이에요, 뭐라고 하든.’이라고 말하며 떠다니던 단어들을, 이렇게 말해야겠다. ‘기적’이었다고. 내가 처음으로 발음한 단어였다. 기적이라고 하면 난 늘 모세가 바다를 가르던 차원을 떠올렸다. 그 정도는 돼야 기적이라는 말을 붙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 외의 것들은 기적이라기보다는 운이나 우연 같은 거였다. 하지만, 그날의 나는, 처음으로 말하고 싶었다. ‘기적’이었다고.


재경_ 동성애자인권연대 신입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