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월 마지막 주에 교회의 날 행사가 열렸다. 소수자들의 유쾌하고 진실한 친구인 진보적 기독교인들이 ‘백발이 성성’이라는 재미난 이름의 워크숍을 열었다. 나는 ‘성평등한 교회 상상하기’라는 주제의 이야기 손님으로 가게 되었다. 물론 손님일 뿐만 아니라 참가자이기도 했다. 교회에서 겪는 일쌍다반사로부터 성평등을 상상하고 이야기하는 것은 즐겁고 신선했다. 백발이 성성한 목사님부터 기혼, 비혼, 청소년, 비청소년, 이성애자, 성소수자 등 다양한 사람들이 함께한 즐거운 시간이었다. 그 때 참가자들과 나누었던 글을 웹진에 싣는다.
나는 누구일까요?
우리는 자신을 다양한 정체성으로 정의합니다. 그리고 내 안에 다양한 내가 공존합니다.
‘나’를 소개하겠습니다.
성소수자. 교회집사. 사회단체 활동가, 세례 받은 아기의 멘토가 되었음, 연애경험, 성경험 있음
나를 알려줄 수 있는 것들에 대해 정리하다보니 서로 어울리는 것도 있고, 안 어울리는 것도 있군요. 이제 나는 교회에 갑니다. 교회에서는 어떤 것들이 부딪히고, 어떤 것들은 받아들여질까요?
결혼을 하려거든 교회에 가라?
남의 결혼식 안간지는 꽤 되었지만, 이러다간 시집못간 노처녀가 되겠다는 불안감도 때로 느껴집니다. 나이가 찼는데 ‘아직’ 결혼을 안 했다면 어떻게 해서든 보내고야 말겠다는 의지가 가장 불타는 곳이 교회입니다. ‘서른셋의 여성이면서 결혼하지 않은 나’는 어느새 성서의 가르침을 거역하는 사람이 됩니다. 아무도 이야기하지 않지만 나는 교회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 되는 것 같아 불편해집니다. 불편함은 어떻게 나타날까요?
‘가정의 달’이 불편한 사람들
매년 5월이 되면 어린이날, 어버이날이 돌아옵니다. 교회가 가정의 달을 기념할 때 아무 의심없이 ‘4인 가족’을 기본단위로 상정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비혼인 나는 4인 가족 단위로 치러지는 나무심기 행사에도 어정쩡, 어버이 꽃 달아주기 행사에도 어정쩡. 가족. 가족이 어느새 정상가정, 정상가정으로 들리기 시작합니다. 교회에는 싱글 맘과 아이들도 있고, 50대의 비혼 여성도 있고, 40줄에 들어선 비혼 남성, 이혼했고 자녀가 없는 여성, 60대의 독신 남성도 있습니다. 생각보다 ‘정상가정’에 속하는 사람은 많지 않은데 교회에서는 끊임없이 화목한 가정을 이야기합니다. 다른 방법은 없을까요? 가족이 아닌 자유로운 개인들의 공동체로, 신앙과 삶의 공동체로 존재하는 교회를 만들기 위해 무엇이 필요할까요? 의외로 간단합니다. 무언가 관성적으로 일을 기획할 때, 그로 인해 배제되거나 소외되는 사람은 없는지, 그러한 감정은 없을지 다시 생각해보는 것으로부터 출발할 수 있답니다. 그럼 정말 덜 불편해집니다.
‘선교사체위’라는 어색하고 우스운 아이러니.
성. 그것이 무엇이 길래 교회라는 경건한 공간에서는 발설해서는 안 될 단어일까요? 하지만 우리는 ‘선교사체위’라는 말도 알고 있습니다. 아이러니한 조합이죠. 생식을 위해 가장 효과적인-남성의 정자를 낭비하지 않는-체위이며 성적 쾌락을 일부러 외면한 듯한 이 단어. 그래도 체위는 체위 아닌가요? 교회에서 일어나는 목회자들의 성폭력 사건들을 접하자면 우리는 더욱 모순 속에 빠집니다. 교회가 정말 경건한 것 맞나요? 도대체 왜 경건이 강요될까요?
다른 면도 볼까요? 이성애자마저 늘 선교사체위만 고집하는 것은 아닐뿐더러, 때로는 다양한 성애 형태에 따라 선교사체위가 굳이 필요하지 않거나 선호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말이 담고 있는 생식에 대한 쓸데없는 강박과 고정관념, 그로 인해 나타나는 이성애가 아닌 다양한 성애에 대한 혐오와 편견이 교회와 어떤 관련이 있는지 이야기해볼까요? 교회와 성, 또는 교회와 섹스에 대한 이야기는 여러분들로부터 무궁무진하게 쏟아질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밥하는 여성들과 남성 장로님들.
우리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성에 따라 주어진 역할을 요구받습니다. 때로 그것에 반기를 들면 골치 아픈 사람이 되기 십상인데 저를 포함하여 많은 사람들은 저도 모르게 그러한 성역할에 길들여지곤 하지요. 교회는 성역할을 맡은 바 임무에 따라 잘 수행해주기를 바라는 곳 아닐까요? 교회 전체 신도의 70%에 이르는 여성들이 교회에서 맡는 역할은 주로 ‘밥하기’입니다. 아직도 많은 교회에서 남성만이 목회자가 될 수 있다고 여깁니다. 그래서 여성 목회자를 인정하지 않는 교단이 많고 허용한다고 해도 남성보다 더 많은 검증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신과 만나는 영역, 교리를 가르칠 수 있는 것은 남성의 영역이었습니다. 성평등의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다시 처음의 결혼 이야기로 돌아가 볼까요? 교회에서 가장 민감하게 여기는 동성애자가 교회에서 받는 상처는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저는 단지 결혼을 안 한 여성일 뿐만 아니라 결혼의 행렬에 동참할 기회조차 처음부터 박탈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커밍아웃을 하지 않은 상태에서 동성애가 죄라고 한다면 저는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까요? 많은 사람들이 성서에 쓰여진대로 남녀의 역할과 성애의 올바름을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할 때 우리는 어떤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요? 성서에 쓰여진 것을 쓰인 그대로 이해하는 것이 맞을까요?
‘연대’의 감각과 ‘나’로써 존재하기
작년에 우리 교회에 다니는 부부가 둘째를 낳았습니다. 채희라는 이쁜 이름의 아기가 세례를 받을 때 그 부부는 제게 아기의 멘토가 되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내가 지닌 정체성은 일반적으로 멘토를 하기에 부적당하다고 생각했을텐데 그분들이 고마워서 채희에게 정성껏 카드도 쓰고 예쁜 모자를 선물로 주었습니다. 우익 기독교가 동성애자들이 가족과 사회를 붕괴시킬 것이라고 겁을 줄 때, 어떤 교회에서는 성소수자가 아기의 멘토가 되었고, 이 공동체에서 또 하나의 끈으로 연결되었습니다. 변화는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자신으로 존재할 때 행복하고 편안합니다. 그리고 그 누구도 존재를 침범할 권리는 없습니다. 이제 교회는 교리의 힘으로, 종교의 권력으로, 세상의 편견으로 한 존재의 삶을 침범하기를 멈추어야 합니다. 그것은 ‘연대’의 감각을 키울 때 가능합니다. 나만 편한 것은 아닌지, 당신은 편한지, 당신은 즐거운지, 당신 혹시 외롭지 않은지...... 서로의 입장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것, 그리고 그에 따라 몸을 움직이는 것이 연대입니다.
공동체에 존중과 연대, 성찰의 힘이 살아나기를 바라며 글을 마칩니다.
이경_ 동성애자인권연대 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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