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나단 (동인련 웹진기획팀)
J. 슈타이너가 쓰고 J. 뮐러가 그림을 그린, <난 곰인 채로 있고 싶은데…>라는 동화가 있다. 주인공은 에… 곰이다. 곰이 곰인 채로 있고 싶어한다는 것이 이 동화의 요지다. 홍시 맛이 나서 홍시 맛이 난다고 하는 것처럼 곰이 곰으로 있는 것이 무엇이 문제란 말인가? 하지만 문제가 된다. 바로 곰을 곰으로 인정하지 않는 자들 때문이다. 사람 사이에서 많은 갈등은 인정받고자 하는 데서 나온다. 내 의견, 내 생활 양식, 내 취향 나아가 그 전체를 아우르는 나 자신까지도 말이다. ‘나는 나일 뿐인데 너는 왜 나를 나로 인정하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가?’ 라고 생각할 지 모르겠다. 하지만 쉽지 않은 일이다. 나 역시도 나를 레즈비언으로 정체화하는데 ‘반대’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인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들의 말을 무시하거나 제도를 확립해 내 안녕을 꾀하는 방식으로 갈등을 피해갈 수는 있어도 말이다. 하지만 이대로 괜찮은 걸까? 내가 그들과 갈등을 피하기만 한다면, 그들에게 나를 인정하라고 말하는데 힘이 실리지 않는 것 같다. 서로를 인정하는 것은 어떻게 해야 가능해지는 것일까? <난 곰인 채로 있고 싶은데…>를 통해 고민을 나누어보고자 한다.
곰이 겨울잠을 자는 동안 숲은 개발로 인해 공사현장이 되어버린다. 겨울잠을 깬 곰을 제일 먼저 만난 것은 공장 감독이다. “당신 여기서 무얼 하는 거야? 빨리 자리에 가서 일해!” 곰은 조심스럽게 말한다. “저 죄송합니다만, 저는 곰인데요.” “곰이라고? 웃기지마, 이 더러운 게으름뱅이야!” 화가 난 공장 감독은 곰을 인사과장에게, 전무에게, 부사장에게, 그리고 사장에게 데리고 간다. 곰은 자신을 곰이라고 주장했지만 그들 모두는 곰에게 곰이 아니라고 말한다.
주체나 인간이란 사회적 관계의 효과로써 만들어지는 결과물이라고 보았던 알튀세르는 ‘이데올로기는 항상 이미 개인들을 주체로 호명한다’고 하였다. 호명은 너는 누구라고 불러주는 것이다. 하지만 그 말에는 항상 그러므로 이걸 해야만 한다거나 이렇게 해야 한다는 말이 생략되어있다. 곰이 공장 내 사람들에게 ‘게으름을 피우는 일꾼’, ‘지저분한 놈’이라고 불릴 때 생략되어있는 말은 ‘그러므로 너는 곰이 아니다’도 있지만,‘그러므로 너는 공장에서 열심히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곰은 자신을 부정함과 동시에 앞날을 좌우하는 호명의 사슬에서 벗어나고자 호명된 말을 부정하지만 그것을 사회로 대변되는 공장 내 사람들에게 인정받지 못한다. 비자발적으로 곰이 체계 내에 발을 들이게 되었지만, 체계 내에서 호명되는 ‘곰’이란 존재들과는 달랐기 때문이다.
곰이 계속 자신은 곰이라고 주장하자 사장은 곰에게 제안을 한다. “자네가 정말 곰이라면 그 사실을 나한테 증명해야 하네. 왜냐하면 진짜 곰은 동물원이나 서커스단에만 있거든.” 사장은 곰을 데리고 근처 도시의 동물원에 간다. 동물원에 있던 곰들은 주인공 곰을 보며 말한다. “이 친구는 진짜 곰이 아닙니다. 진짜 곰은 우리처럼 철창 안에서 살고 있는 법이지요. 아니면 사육장 안에서 살든지요.” 사장은 곰을 데리고 서커스단에 간다. 서커스장의 곰들은 말한다. “보기에는 곰처럼 생겼네요. 하지만 진짜 곰은 춤을 출 수 있지요.” 주인공 곰은 갇혀있지도 않았고 춤을 출 줄 몰랐다. 곰은 자기가 곰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누구에게도 곰이라는 것을 인정 받지 못하고 공장의 직원이 된다.
동화 속 사회에서 곰이라 호명된 존재들은 춤을 출 수 있어야 하거나 우리에 갇혀있어야 한다. 그러한 호명으로 자신을 정체화하는 곰들에게 주인공 곰은 이질적인 존재다. 동물원의 곰과 서커스단의 곰이 곰으로 계속 있기 위해서는 주인공 곰을 배제하고 부정해야 한다. 그 결과 자신을 곰이라고 입증하지 못하게 된 곰은 공장의 직원이 되어버리게 되었다. 타자를 억압하는 방식으로 동화 속 세계는 그렇게 잠시 안정을 되찾은 듯 보였지만 그 시간은 길지 못했다. 상부구조의 논리와 헤게모니로 억눌러도 기어코 미끄러지게 되는 ‘차연’의 영역 때문이다. 데리다는 체계가 아무리 언어로 호명을 한다고 해도 언어 자체가 대상과 일치 되지 못하고 미끄러지게 되는 ‘차연' 때문에 구조에 균열이 생긴다고 하였다. 곰이 존재 부정을 당한 채 공장 노동자로 호명되어도, 곰이어서 생기는 겨울잠과 같은 욕망을 통제할 수는 없는 것처럼 말이다.
계절이 가고 다시 겨울이 오자 곰은 졸렸다. 잠으로 인해 작업을 제대로 못 해내자 곰은 해고를 당한다. 그리고 떠돌다 모텔로 향한다. “미안합니다만, 우리 모텔에서는 공장 일꾼들한테는 방을 내주지 않아요. 더군다나 곰에게 방을 내주는 일은 생각할 수도 없는 일입니다.” 곰은 놀란다. “지금 저에게 곰이라고 하셨나요? 그러니까 제가 곰이라고 생각하신단 말씀이지요?” 곰은 숲으로 향한다. 숲의 동굴 앞에 쭈그리고 앉은 곰은 ‘이것 저것 곰곰이 생각 좀 해봐야겠는데, 내가 이렇게 졸리지만 않다면 좋을 텐데. 아무래도 무언가 중요한 걸 깜빡 한 것 같은데? 그런데 그게 뭐더라?’ 하고 되뇌며 동화는 끝이 난다.
타자를 대상화시켜 부정하고 배제하는 것은 자기확신을 위해서나 체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나 도움이 되지 않았다. 곰을 노동자로 호명하여 타자를 제거하였으나 결국 해고를 시킬 수밖에 없었던 동화 속 공장 세계 사람들처럼 말이다. 적극적으로 타자가 되려고 하는 시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곰은 공장 노동자가 되는 것을 받아들였으나 오래 유지하지 못했고 끝내는 곰임을 부정하는 ‘졸리지 않음’을 바라고-곰은 겨울잠을 자야 생명을 유지하는데도- 무엇을 잊어버렸는지도 모르는 상태에 이르게 되었다. 배제의 논리는 얼마나 허망한가? 체계가 개별자를, 개별자가 자기자신을 배제해버리는 방식은 모두를 망가트렸다. 적극적인 병존의 노력이 요구되는 것은 이 까닭이다.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지 않으면 서로의 살 길을 모색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현대 철학자 미드는 타자의 정체성이 개별자의 나의 정체성의 구성요건이자 구성요소라고 하였다. 일회적이지 않은 ‘인정행위’를 통해서 자아와 타자가 끊임없는 상호작용하기 때문이다. 미드에 따르면 정체성을 형성할 때 ‘주격 나’는 타자입장에 대한 반응으로서 타자 입장 수용을 토대로 구성된 ‘목적격 나’에게 비규정적으로 반응한다고 한다. ‘주격 나’와 ‘목적격 나’의 상호작용의 실 내용은 ‘주격 나’가 타자의 규범을 인정하는 가운데 ‘목적격 나’를 구성하며 ‘목적격 나’는 예상치 못하는 ‘주격 나’의 반응에 의해 의식화 되고 재구성 된다는 것이다. 정체성 형성이 ‘주격 나’와 ‘목적격 나’의 상호작용을 통해 형성되기 때문에 정체성 형성과정은 의식 밖의 예측 불가능한 영역인 차연의 문제를 해소한다. ‘목적격 나’의 형성은 ‘주격 나’의 예측불허 반응에 의해 부정되거나 변형될 수 있다는 점에서 개인의 정체성은 차연의 영역과도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서로가 서로의 구성요건이자 구성요소가 되려면 끊임없이 만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 하지만 얼마나 피곤한 일인가? 말이 좋아 상호작용이지, 인정하기 쉽지 않은 타자와의 만남은 상처를 많이 그리고 깊게 남긴다. 쉽지 않은 길이겠지만 무언가 잊어버렸는지도 모르는 곰이 되고 싶지는 않다. 서로 망가지지 않고 같이 살기 위해서, 끊임없이 만나서 싸움의 형태든 대화의 형태든 ‘상호작용’하며 서로 ‘인정’하는 길로 나아가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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