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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성소수자

LGBT 인권포럼 청소년 섹션에 덧붙여 - “괴물은 없다”

by 행성인 2013. 3. 13.

모리 (동성애자인권연대, 무지개행동 이반스쿨)



학교는 전혀 평등하지 않다. 학교에서 아이들은 공부를 못해서, 뚱뚱해서, 못생겨서, 가난해서, 장애가 있어서, 동성애자여서 차별받는다. 또래 학생들로부터는 물론 교사들도 이러한 차별에 동참한다. 이 중 공부를 못하는 아이들은 가장 합법적으로 차별을 받는데, 이들은 교사들로부터 갖가지 모욕을 듣는다. 교사들은 “그러다 너의 인생은 망할 것이다"라는 끔찍한 협박도 서슴지 않는다. 문제는 그런 모욕을 듣는 학생조차 이런 모욕에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성적, 돈, 외모, 장애, 성적 지향과 성별 정체성이 학교의 보이지 않는 계급을 만들고 이 계급은 어느새 모두에게 무언의 동의를 받는다. 학교 폭력을 그저 방관하기만 하는 아이들은 쉽게 이렇게 말하곤 한다.


“괴롭힐 만하니까 괴롭히는 거잖아요"


재밌는 건, 이 말이 어른들이 사회에서 듣는 말과 너무도 닮아있다는 점이다. 


“휠체어를 타고 다니니까 일을 잘 못할 거 아냐. 사람 뽑을 때 차별받는 게 당연하지 않아?”

“뚱뚱한 여자를 왜 뽑아? 먹기만 하고 다이어트 안 한 건 자기 책임 아냐?”

“실력이 어떻건 안 좋은 대학 나온 사람은 뽑을 수 없어요. 고등학교 때 공부 안 하고 논 건 자기 책임이죠"

“동성애자와 어떻게 한 공간에 있어요? 에이즈 옮으면 어떻게 하려고…  싫어할 자유도 있는 거 아닌가요?”


이렇듯 아이들은 학교에 다닐 때부터 ‘어떤’ 차별은 가능하다는 것을 배운다. 이 소름 끼치는 ‘합법적인 차별’과 ‘합법적인 폭력’을 효과적으로 교육하는 곳은 다름 아닌 학교다. 교장부터 왕따에까지 이르는 학교의 권력 피라미드는 ‘어떤' 차별, 또는 ‘어떤' 폭력은 용인된다는 것을 조용히, 그러나 매우 깊숙이 아이들의 머릿속에 각인시킨다.



놀랍게도 학교가 이 지경이 될 때까지 우리 사회는 학교 자체의 폭력성에 주목하지 못했다. 이유가 뭘까. 원인은 보수 세력이 중요시하는 ‘학교의 자율성'이다. 학교가 사회의 간섭으로부터 자유롭다는 말은 다르게 말하면 고립되어 있다는 뜻이다. 세상의 간섭으로부터 ‘보호주의’와 ‘교권 수호’라는 방패로 지켜온 이 폐쇄성은 학교 밖에서 적용되는 수많은 제도들로부터 학생들을 분리해낸다. 학교 안에서 학생은 국민의 권리를 누릴 수 없는 것이다. 인권은 교문 앞에서 멈춘다.


이런 맥락에서 문용린 서울시 교육감이 작년 선거운동에서 진보 후보인 이수호 후보에게 “아이들을 이용해 정치를 하려고 하는 것이다”라는, 보호주의에 호소하는 문구를 공격 수단으로 사용한 것은 전혀 놀랄 일이 아니다. 실제로 학생인권조례는 학교 밖 세상이 학교에 개입할 수 있는 조항을 많이 포함하고 있다. 학생인권 실태조사, 대리인 선임권 등 학교 안에서 교장과 교사들 임의로 처리하던(혹은 방임하던) 문제들에 이젠 학교 밖의 힘이, 또는 학생 주체가 스스로 개입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청소년을 정치 이념으로부터 중립적으로 보호해야 한다'는 주장을 전교조 규탄의 핵심 기조로 삼던 보수 세력들은 아마 뿔이 났을 것이다.


보호주의는 사실 지금까지 꽤 성공적이었다. 실제로 학생들은 학교에서 정치적인 문제에 대해 토론하거나 이야기할 시간을 가질 수 없었다. 근현대사 수업 시간에 시민 혁명과 민주 항쟁에 대해 배우는 것을 제외하면 민주주의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볼 기회는 전혀 가지지 못했다. 정치는 어른들의 영역이었고, 아이들은 공부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 어차피 ‘성숙한’ 판단은 할 수 없을 테니 청소년은 실수할 기회조차 가질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청소년들은 심지어 자기 자신의 직접적인 문제인 학교 폭력에 대한 고민에도 참여할 수 없었다. 학교 폭력의 원인을 분석하고 ‘결정'하는 것은 교사, 학부모, 교육 당국의 일이었다. 이들에 의해, 괴롭힌 아이는 그저 ‘괴물'일 뿐이고, ‘학교 폭력 유전자'가 있기 때문인 것으로 판명된다. 칭찬이라곤 받아 본 적 없이 ‘공부를 못하기 때문에’ 겪어야 했던 수많은 모욕과 무관심, 정당한 비판이 그저 ‘버릇없음'으로 치부되었던 오랜 경험, 가정환경,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방법을 가르쳐 줄 인권과 다양성에 대한 교과 과정이 부재한 현실이 이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것이다. ‘미성숙'하다는 이유로, 당사자는 완전히 배제된다.



그럼 다시 질문해 보자. 과연 청소년은 정치 이념으로부터 중립적으로 보호받아야 하는가? 아니, 애초에 이 질문은 옳은 질문인가?


애초에 이 질문은 올바른 질문이 아니다. 학교가 정치적 사안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이다. 문용린은 기껏해야 ‘정적 평형(화학에서, 어떤 계와 외부 사이에 물질이나 에너지가 교환되지 않는 평형 상태를 말한다. 반대로 ‘동적 평형'이란, 평형 상태에 있긴 하지만 계와 외부 사이에 끊임 없이 물질이나 에너지의 등가 교환이 일어나는 상태를 말한다)' 상태의 정치적 중립을 원하는 것 같다. 학생들의 입을 틀어막아 아무런 토론도 대화도 오가지 않는 정치적 중립 상태를 만들려는 것이다. 문제는 이 ‘정적 평형'이 그 유명한 ‘자연의 섭리'에 어긋난다는 것이다. 자연계에 ‘정적 평형'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학교가 이미 가진 폭력성, 부모의 사회적 지위로부터 자연스럽게 학교로 유입되는 부의 권력, 지역 격차, 그 놈의 ‘사회적 합의'가 있기 전엔 없앨 수 없다는 동성애 혐오로부터 과연 학교가 자유로울 수 있는가? 학생이 돈이 없거나, 장애가 있거나, 트랜스젠더인 것은 과연 ‘정치적인’ 문제가 아니란 말인가?


문제는 또 있다. 이렇듯 ‘자연의 섭리를 거슬러' 정적 평형을 이루려고 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부작용이다. 선생님의 지식을 일방적으로 ‘습득'할 뿐 스스로 생각해보고 비판적으로 받아 들이는 방법을 배우지 못하고, 권력에 맞서지 않고 폭력에 익숙해지는 방법만 배운 아이는 사회의 구조악에 순응하며 그 구조악을 더욱 강화하는 하나의 부품으로 살아가기 쉽다. 말 잘 듣고, 비판하지 않고, 체벌을 군말 없이 받던 아이는, 말 잘 듣고, 비판하지 않고, 국가 폭력을 군말 없이 받는 국민으로 자라나기 쉽다. 말 안 들으면 국회의원직 박탈하고, 언론 장악하고, 시위하는 시민들에게 물 대포 쏘던 세력은 누구였나? 과연 문용린을 위시한 보수 교육 세력은 청소년을 정치 이념으로부터 중립적으로 지켜주고 있는 것인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끔찍한 방법으로 이용하고 있는 것인가?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나치스 아래에서 유대인 학살을 자행한 아돌프 아이히만의 전범 재판을 관찰한 저서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근본악은 없으며 다만 사회의 구조악에 저항하지 않는 것이 악을 만들어낸다고 말한다. 아렌트에 따르면 아이히만은 특별히 “도착적이거나 가학적이지” 않았다. 그 행위가 아무리 괴물 같다고 해도, 그 행위자는 괴물 같지도 악마적이지도 않았던 것이다. 재판 과정과 경찰 심문, 과거 행적에서 찾을 수 있었던 그의 유일한 특징은 바로 ‘사유의 진정한 불능성’이었다. 그는 스스로 생각하는 대신 상투어, 관용구, 관습적이고 표준화된 행위 규칙을 방패로 삼아 비판적으로 생각하는 ‘피곤한’ 일을 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학교는 양날의 칼이다. 좋은 교육을 통해 좋은 사람을 길러낼 수 있지만 나쁜 교육을 통해 나쁜 사람을 길러낼 수도 있다. 인권과 다양성에 대해 배우지 못한 아이는 차이와 차별을 구분할 줄 모르는 사람으로 자라기 쉽다. 학교 폭력 DNA를 가진 아이는 없다.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방법 대신 '어떤' 폭력은 가능하다는 걸 배운 아이가 있을 뿐이다. UN으로부터 ‘인권 후진국' 경고를 받는 게 무엇 때문이라고 생각하는가. 나는 학교에서 장애인, 성소수자, 비정규직을 차별하지 말아야 한다는 내용의 인권 교육은 고사하고 그런 말 한마디조차 들어본 기억이 없다. 학생들에게 있는 힘껏 소리 지르고 언어폭력을 일삼는 교사, 의사와 변호사를 자식의 꿈으로 정해주는 부모, 바로 옆에서 일진에게 맞고 있는 아이를 봐도 꾹 참고 넘어가는 아이들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학생인권조례가 단지 학생인권과 교권의 대립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아마도 이런 고민을 알지 못하는 것 같다. 그것은 하나의 천박함이다. 아이히만이 ‘유대인 문제’에 대해 가졌던 것과 정확히 같은 정도의 천박함이다. 깊이 들여다보려고 하지 않고, 비판적으로 생각해 보지 않으려는,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하려 하지 않는 천박함이다. 문제는 아이히만이 괴물이 아니었듯, 괴롭히는 아이들이 괴물이 아니듯, 학생인권조례를 반대하는 사람들도 괴물은 아니라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