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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우당 문학상

[우수작]<아메리카노>

by 행성인 2013. 4. 23.

 

청명한 여름이었다. 하늘은 시퍼런 물감을 풀어 놓은 것 같았고, 흰 구름이 손가락으로 찍어 바른 양 툭툭 떠다니는, 그런 좋은날에, 나는 시원하다 못해 추운 카페에서 덜덜 떨고 있었다. 추워서 떠는 것은 아니었다. 단지 이제 곧 있으면 B가 올 것이고, 곧 닥칠 그 만남이 나를 혹독한 긴장에 몰아넣고 있었다.

 

B는 7년째 함께인 친구이다. 중학교 1학년, 같은 반인 그 애를 처음 본 순간 토끼가 한 마리 떠올랐다. 피부는 분필가루마냥 하얗고 커다란 눈망울은 겁에 질린 토끼 같았다. 내가 나의 정체성을 좀 더 일찍 알았더라면, 나는 내가 그녀에게 반했다고 생각할 정도로 그 애는 내 시선을 끌었다. 나는 그 애와 친해지려했고, 친해졌고, 그 만남은 지금까지도 순수한 우정으로 이어지고 있다. 7년 동안 우리는 서로 좋은 일이 있거나 나쁜 일이 있을 때 가장 먼저 찾는 친구였다.

 

하지만 나는 그 아이에게 오랜 비밀이 있었고, 그 비밀을 오늘 비밀이 아니고자 만들기 위해서, 나는 그 좋은 여름날에 차가운 카페에서 덜덜 떨고 있었다. 긴장되는 손은 계속 뜨거운 커피 잔을 만지작거렸다. 뜨거운 여름이지만 나는 2900원에 할인 판매하던 뜨거운 아메리카노를 주문했다. 담배 한 대가 몹시 간절했다. 하지만 B는 담배냄새를 극도로 싫어했고, 나는 억지로 참아야했다. B는 담배냄새만 싫어하는 것이 아니었다. 동화 속에 나오는 레이스와 프릴과 인형들에 둘러싸인 공주님처럼 그녀는 실낱같은 충격에도 산산조각 나는 유리인형 같은 존재였다. 그녀에게 ‘벗어남’이란 존재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단정한 교복, 단정한 단발머리, 단정한 손톱, 까만 단화, 분홍색 카디건, 리본달린 플랫슈즈, 딸기가 올라간 조각 케이크. 그녀가 어울리는 것들은 이런 것들이었다. 그 애는 시침과 분침이 정확히 12시를 가리키고 있는 시계 같은 아이었다. 술, 담배 연기, 피어싱, 문신, 교칙위반, 반성문, 내가 달고 다니는 그런 것들은 그녀에게 어울리지 않았다. 그녀의 사고방식 또한 그러했다. 그런 그녀가 내 비밀을 받아들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래도 나는 내 비밀을 그녀가 들어주고, 이해해주고, 앞으로 함께 말 할 수 있는 사이가 되길 바랐다. 그녀는 내 가장 친한 친구니까.

 

카페에 흐르던 조용조용한 노래를 도어벨 소리가 찢어발겼다. 그리고 B가 들어왔다. 언제나처럼 약속시간에서 5분 늦은 때였다. B는 오늘도 B같았다. 까만 스니커즈에 평범한 청바지, 단정한 흰색 반팔 블라우스. 나는 까만 워커에 번쩍이는 레자 레깅스, 형광 연두색 나시 티, 주렁주렁한 피어싱과 팔찌, 커다란 보라색 손목시계, 해골모양 반지. 그녀와 나의 옷차림의 차이가 그녀와 나 사이의 거리 차이 같아서 나는 끼고 있던 반지를 슬그머니 뺐다.

 

친구 사이에 있을법한 대화가 흘러갔다. 간단한 안부인사로 시작해서 서로의 케이크를 한 입씩 뺏어먹고, 항상 하던 영양가 없는 수다. 평범한 얼굴로 하는 평범한 대화였지만 나는 왼쪽 다리를 달달 떨고 있었다. 다리 떨지 마. 그녀가 조용히 말하였고 나는 왼쪽다리에 힘을 주었다. 오늘 한다던 중요한 얘기가 뭐야? 그녀는 가차 없이 핵심을 찔러 들어왔다. 윽. 어떻게 말을 꺼내야하나. 그녀에게 내 비밀을 말하자고 결심했을 때부터 수 없이 되새긴 말이 생각이 나지 않았다. B가 주문한 차가운 아이스티에 얼음이 둥둥 떠 있는 것이 보였다. 이런 데에서 주는 얼음은 공업용 얼음이라는 소문이 있던데. 나는 그런 멍청한 생각을 잠시 해보았다.

 

“말하기 힘든 이야기야?”

 

B가 재차 찔러 들어왔다.

 

“혹시 재수한다거나, 그런 이야기야?”

 

B는 그녀가 생각하기에 중요하다고 여겨질 법한 이야기를 예시로 꺼내었다. 그런 평범한 이야기라면 내가 이렇게 고민하고 있지 않을 거야. 나는 이제 식어버린 아메리카노를 한 모금 삼켰다.

 

“나, 중3 때 O랑 사귀었었어.”

 

나는 그녀의 표정을 확인했다. B는 잔잔한 호수 같던 표정에서, 조약돌 하나를 던져 넣은 호수 같은 표정으로 변하더니, 곧 코끼리 한 마리를 빠뜨린 호수 같은 표정으로 변하였다. O는 B의 친구이다. 그리고 내 친구였다. 그리고 내 애인이었다. B의 머릿속에서도 이와 같은 방정식이 성립되는 소리가 들렸다.

 

“뭐?”

 

B가 재차 확인사살을 했다. 아팠다.

 

“O랑, 너랑?”

 

그렇다니까.

 

“그, 사귄다는 게, 그, 진지하게? 아니, 왜, 어, 음, 언제? 정말?”

 

B의 커다란 눈동자가 더 커졌다. 토끼 같은 그녀의 눈이 이제 소눈깔 같았다. 나는 재차 물어오는 그녀의 질문에 대답을 해주며, 이해되지 않는다는 그녀의 머릿속에 내 비밀이 아니게 된 비밀을 꾹꾹 눌러 담느라 노력했다. 곧 그녀는 내가 무슨 말을 했는지 이해가 간 듯 했다.

 

“이제 안 그러는 거지? 그러니까, 잠깐 그랬던 거지? 이제 아니지?”

 

내 장렬한 커밍아웃을 이해하고는 B가 처음으로 뱉은, 장렬한 대사였다. 나는 이런 반응을 전에 겪은 적이 있었다. 그러니까, 초등학교 2학년 때 수두에 걸려서 며칠 결석하고 난 뒤 학교에 갔을 때 짝꿍이 내게 물어본 말이었던 것 같다. 나는 조금 슬퍼졌다. 그리고 앞으로 어떻게 말하고 어떻게 이 상황을 수습해야 하는지 계산했다.

 

“그럼, 이제 안 그래. 잠깐 그랬을 뿐이야. 왜, 있잖아 그런 거. 여중 여고에서 있을법한 그런 거.”

 

잠깐 그랬던 그런 거. 왜 있잖아, 그런 거. 그래, 그런 거. 나는 억지로 웃으면서 그녀를 안심시켰다. O하고는 이제 연락하지도 않아. 우리 싸웠거든. 네가 자꾸 O의 이야기를 하니까, 내가 불편해져서, 그래서 말한 거야. 이건 커밍아웃 같은 그런 심각한 게 아니야. 네 친구는 수두 같은 병에 걸린 것도 아니고, 정상이야. 나는 너의 정상적인 친구고, 앞으로도 그럴 거야. 너도 알잖아, 내가 어긋나기를 좋아하는 거. 학교 담 넘고, 교복 안 입고, 귀 뚫고, 문신하고, 담배피고, 그런 거. 이것도 잠깐 그랬던 거야. 나는 결코 너에게 네 친구가 지금도 여자가 좋은 동성애자라고 말하는 게 아니야. 네 친구가 그럴 리가 없지. 나는 변함없는 네가 아는 네 친구야.

 

B도 곧 웃으면서 다시 조잘조잘 이야기를 시작했다. 깜짝 놀랐네. 그래서 네가 O이야기만 나오면 표정이 그랬구나. 나는 또 뭐라고. 이제 안 그러는 거지? 그리고 곧 B는 근처에 새로 생긴 케이크 가게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다음에 같이 가자. 거기 치즈케이크에 블루베리 시럽 뿌려서 준대.

 

그래, 다음에 가보자. 나는 웃으면서 그녀의 이야기를 귀로 들었다. 뇌는 지금 울고 싶다고 내게 신호를 보냈다. 나는 울면 안 되어서 뇌에게 가만히 있으라고 말하였다. 이제 차가워진 아메리카노를 한 모금 더 마셨다. 너무 썼다. 차갑고 쓰고. 차갑고 쓴 2900원짜리 커피. 나는 그래서 슬펐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