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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우당 문학상

[우수작]<아직 말할 수 없어>

by 행성인 2013. 4. 23.

김현중


1

보도블록 위로 점점이 멍이 들기 시작했다. 초저녁부터 으스름이 깔리는가 싶더니 이내 비가 쏟아졌다. 혹시나 해서 들고 온 우산을 펼쳤다. 여름 더위가 아직 덜 여물었는지 바람이 제법 차갑다.

야간 자율학습도 빼먹고 곧장 집으로 달려갔다. 집안에 들어서니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오후 다섯 시, 주택가 아이들의 목소리가 놀고 있었다.

주인도 못 알아보는 썰렁한 거실을 지나쳐 방으로 들어가 교복을 벗어 던졌다. 오랜만에 잡힌 약속이라 그런 지, 들뜬 기분에 설레어 그만 어수선하게 옷장을 뒤집고 말았다. 이리저리 여유 부릴 시간은 없었다. 청바지와 늘어난 티 하나를 걸치고, 거울 앞에 서서 머리를 대충 넘기다가 새까맣게 그은 팔뚝을 보았다. 축구를 할 때면 소매를 어깨까지 걷어 올리는 버릇 탓에, 여드름 하나 없는 투명한 얼굴이 오히려 내 것 같지 않아 촌스러워 보였다.

신경이 쓰여 미간을 찌푸리던 것도 잠시, 퍼뜩 정신을 차렸다.

어젯밤에 꾸려 둔 보스턴백을 겨드랑이에 끼고 성큼성큼 현관으로 걸어가 자리에 주저앉았다. 한 치수 작은 신발에 억지로 발을 구겨 넣고, 징그럽게 얽힌 신발끈을 있는 힘껏 잡아당겼다. 풍경 같던 아이들의 재잘거림은, 어디서 들려오는지 모를 치고받는 고함소리에 자리를 내준 듯하다. 더이상 순수하지 않은 적막을 뒤로 하고, 늘 생경하기만 한 집을 나섰다.

 

민소매로 드러난 어깨 위로 빗물이 닿았다. 불시에 벌어진 짧은 접촉이 익숙지 않은 탓에 쭈뼛하고 등이 굳어진다. 갑자기 바람이 얼굴에 훅 끼치는가 싶더니 야릇한 장미향이 콧구멍을 비집고 들어왔다. 무심결에 얼른 고개를 숙이고 괜히 워커의 앞코를 땅에 긁었다. 슬쩍, 왼쪽에 있는 남자 구두를 확인한다. 그 순간, 의식하고 있는 내 자신이 멋쩍게 느껴져 우산을 치는 빗방울 하나하나를 쓸데없이 세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곧, 신호가 바뀔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결국 참지 못하고 슬그머니 눈을 흘겼다.

구두 위로 맞아떨어진 구김 없는 바지 밑단이 보였다. 천천히, 무릎께까지 비에 젖은 스프라이트 바지 선을 눈으로 짚어 올라가다가, 주머니에 꽂은 남자의 손에 멈칫했다. 품새가 제법 괜찮아 보인다. 같은 모양의 재킷을 입었는지 전체적으로 젠틀한 느낌이 들었다. 키가 커서인지 꽤 한참을 점검한 후에야 볼 수 있게 된 얼굴은, 요즘처럼 세련된 스타일은 아니었다. 오히려 내가 서른 살, 마흔 살이 되어도 기억에 남을 만한 미남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도 내 시선을 눈치 챘는지 눈썹을 들썩였다. 어수룩한 행동을 들킨 것 같아 속으로 뜨끔하여 얼른 고개를 돌리고 딴청을 부렸다. 넋 놓고 빤히 쳐다봤다는 생각에 귓바퀴가 뜨거워졌다.

다행히 신호가 바뀌고 남자가 걸어 나갔다. 나는 그 뒤로 사이를 두고 숨죽인 채 쫓아갔다. 다시 봐도 핏이 참 좋아 보이는 것이 모델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자동차 헤드라이트가 공기 중에 난란하며 남자만을 비추는 것 같았다.

횡단보도 건너에서, 나와는 반대로 방향을 틀은 남자의 실루엣이 흔들리는가 싶더니, 이내 푸르스름한 초여름의 한 곳으로 사라져 버렸다.

 

 

2

주차장 대용이 된 공원을 꺾어, 백열등이 누렇게 번지는 꽃집 앞을 지나쳤다. 태생이 점잔지 못한 골목 사이사이로 쓰레기 더미가 눈에 띄었다. 어디서 비명이 들리고, 비에 불은 술집 전단지들이 바닥을 덮고 있었다.

노선이 서로 엉키는 곳에 지어진 역사(驛舍)를 중심으로, 똑같은 크기와 모양을 한 건물들은 하나같이 시멘트가 벗겨져 있었고, 벽면마다 흘러내린 새빨간 녹물은 흡사 피가 굳은 것 같았다. 더구나 유행 따위는 별 거 아니라는 듯, 지나치게 선명한 일루미네이션으로 장식된 가게 안은 손님들 전부가 암에 걸려 죽는 건 아닌지 걱정스러울 정도였다.

길 찾기 앱으로 봐둔 지름길을 따라 가려니 비좁은 건물 사이를 게걸음으로 걸을 수밖에 없었다. 딱딱한 시멘트에 엉덩이가 쓸리는 것도 참아내며, 숨을 참고 틈새를 빠져나왔다. 잠깐 사이에 젖은 머리를 털어내고 접었던 우산을 펼쳐 들었다.

휴일 전날의 열기는 날씨는 아랑곳하지 않은 채, 다만 무채색 계열의 우산 밑에 가려져 있는 것 같았다. 목적을 숨긴 사람들의 물결이 한 곳으로 쏠리고 있었다. 대열에 합류해야만 도태되지 않을 거라는 암묵적인 지시가 이뤄지는 곳에서, 나 또한 어느새 습기가 일으킨 곰팡내 나는 등짝을 따라 걷고 있었다.

보폭이 저절로 맞춰졌다. 아마 미사일이 떨어져도 언제 그랬냐는 듯이 원상 복귀 될 것 같았다. 들고 있는 빨간 우산이 유난히 튀는 게 아닌지 싶어 괜히 신경이 쓰였다. 먼저 기다리고 있을지 모를 형을 생각하며 안절부절못하고 손톱을 씹어댔다. 그래도 보행속도는 한참이나 줄어들지 않았다. 땀에 찌든 정체 모를 냄새가 이마를 울릴 때쯤, 간신히 커피숍 앞에 도착할 수 있었다.

형은 아직 와 있지 않은 듯했다. 커피숍 안에서 몇몇이 이쪽을 구경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별 거 아니라는 듯이 최대한 쿨한 척하며 휴대폰을 꺼내 만지작거렸다. 약속시간은 이제야 몇 초를 지났을 뿐이었다. 이런 식으로라도 형을 만날 수 있다는 생각에 참을 수 없는 감정이 솟구치는 것 같았다. 이 감정이 만약 그리움이라면, 나는 형에게 처음 배운 셈이었다.

“진석아. 먼저 왔네?”

흠칫하며 뒤를 돌아보니, 형이 내 어깨에 손을 올리고 익숙한 눈웃음 짓고 있었다.

“뭐야, 어디 안 좋냐? 항상 일찍 오더니, 오늘은 왜 늦었냐?”

마스크를 쓰고 있는 형의 얼굴이 어딘지 전보다 더 말라보여 걱정이 되었다. 나름대로 짐작 가는 바는 있으면서도, 그래도 이상하게 코끝이 찡해졌다.

그런 내 마음을 눈치 챘는지,

“여름 되니까 노인네 기운이 딸리나 보다.”

하고 형이 장난스럽게 말을 걸었다.

“너무 핼쑥하니까 좀 그래. 그래도 더 잘생겨지긴 했다.”

“하하. 인기는 아직도 많아서 별 실감은 안 난다?”

“뭔 소리? 그냥 빈말인데?”

형과 나는 껄껄대며 웃었다.

서로가 한동안 묽어진 거리감을 다시 차지도록 반죽하는 데에 여념이 없었다. 이런 방식으로 이별의 시간이 가져다준 낯설음의 경계를 허물어 가는 것이었다. 막상 형과 말할 기회가 생기자, 걱정과는 반대로 더 짓궂게 대할 수 있어 안심이 되었다.

역시 형도 공감했는지, 들고 있던 우산을 접고 내 옆으로 바짝 붙어서며 말했다.

“난 진심인데? 됐어, 이 자식아. 밥이나 먹으러 가자. 뭐 먹을래?”

 

 

3

이마에서 떨어진 땀방울이 가슴을 타고 흘러내렸다. 고장난 에어컨을 감당하려는 선풍기 세 대는 이미 과부하에 걸린 듯, 찬바람을 제 쪽으로 빨아들이고 있었다. 형을 억지로 끌고 들어왔건만, 주문한 삼계탕이 나오기도 전에 내가 익어버릴 참이었다. 그래도 형은 싫은 내색 한 번 하지 않는다.

열 살 터울이 나는, 형과 내가 유지해온 형식적인 거리감이 아직도 남아 있는 것일까? 그도 그럴 것이, 내가 첫사랑의 대상을 재고 있을 즘이면 형은 이미 다음 사랑을 찾아 헤매고 있을 만큼, 우리 둘 사이엔 결코 겹쳐질 수 없는 삶의 용량이 어마어마하게 벌어져 있을 터였다.

점점 따라잡을 수 없는 그 격차를 직감하게 되었고, 괴리감에 겁이 나기도 했다.

무엇에 주저했던 것일까? 눈에 보이진 않지만, 형한테서 풍기는 이차원의 포스에 눌려 말도 붙이기 어려웠다. 어린 마음에 애교 한 번 부리기가 무서울 정도였다. 어쩌다가 가끔씩 배알이 꼴리는 기분이 들 때도 있었다. 문득 계속 나만 움츠러드는 것 같은, 뜬금없이 몸을 말아 얼굴을 감추는 공벌레 취급을 당한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얼마나 쌓이고 쌓였던 지,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그 허무맹랑한 발상으로 말미암아 말도 안 되는 재롱을 떤 적이 있었다. 일 년치 용기를 죄다 쓸어 담아 들이댄 것이었다.

반추해 보더라도 참으로 비린내 날 법한 사춘기 아이의 용모가 얼마나 징그러웠을까 싶다. 그런데 내 예상과는 달리, 형은 아주 마음에 들어 하며 짐짓 어르고 달래는 흉내를 내주는 것이었다. 그 의외의 반응에 나는 퍽이나 고마운 마음이 들었고,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그때부터 불현듯 형에 대한 애정과 존경심이 생겨났던 것 같다.

 

내가 딴청을 부리고 있는 사이에, 형은 작은 옹기 안에 담긴 깍두기를 꺼내 접시에 옮기고 있었다. 먹기 좋게 가위질하는 형의 손등 위로 도드라진 핏줄 하나하나가 김치에 생명을 불어 넣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대각선으로 가로지른 테이블에 앉아 있는 아저씨가 신문을 읽고 있었다. 주문한 삼계탕이 나오고, 졸린 눈을 깜빡이는 종업원은 맛있게 먹으라는 말 한 마디 하지 않고 가 버렸다. 기대 따위는 하지도 않았건만, 막상 얼굴에 끼얹어진 불친절한 접대에 입맛이 뚝 떨어지는 것 같다.

자명종이 제법 그럴싸하게 울렸다. 신문을 접어 안주머니에 챙겨 넣은 아저씨가 뚝배기를 들이켜고는 이윽고 더럽게 트림을 날렸다. 종업원들은 죄다 쉬고 있는지 주방에서 수런수런하는 소리가 새어나왔다.

형이 마스크를 벗고 물을 따라주며 말한다.

“오늘은 너무 늦었으니까 대충 먹는다고 쳐도, 내일 더 좋은 거 먹으러 가자.”

“당연하지. 내일 하루 종일 먹을 거니까, 각오 단단히 해둬라.”

내 말에 형의 입꼬리가 기분 좋게 올라갔다.

“진석이, 너. 좋아하는 사람은 아직 없어?”

“뭐……. 그런 거 신경 쓸 때야? 나 예상외로 공부하는 아이야, 히히. 그건 그렇고 왜 이렇게 피곤해 보이냐? 다크서클 좀 봐. 일 하기 힘들어?”

“힘들기는, 엄청 바빠서 그래. 형 완벽주의자잖아. 이것저것 신경 쓸 것도 많고……. 요즘 워낙 손님이 많아야 말이지.”

그렇게 말하는 형의 얼굴에서 언뜻 그늘이 엿보였다. 아직 사회생활에 대한 개념이 없는 나이지만, 주점 매니저란 직책이 갖는 고단함의 단면을 상상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특히나 일에 한정해서 생각할 수 없는 것이, 형의 몸이 버티고 있는지가 걱정이 되었기 때문이다. 자주 만난다는 것은 있을 수도 없는 일이고, 오늘처럼 날을 정해 만나는 상황이 허락되기까지 일체의 연락도 금지시킨 부모님의 조건이 원망스러울 따름이었다.

이렇게 되기까지, 가족이라는 틀이 오랫동안 유지되진 않았다.

아무렇지 않은 매일이 연속되었고, 뉴스에서는 독감이 유행임을 부추기고 있을 때였다. 오로지 뉴스만 신봉하는 부모님이 보기에는 그 겨울에 가장 큰 걱정거리가 된 셈이었다.

때마침 감기 기운이 있던 형은 대충 약으로 때울 생각이었지만 혹시라도 티가 날까 싶어 가까운 보건소에 가게 되었고, 누구라도 그러하겠지만, 별다른 일을 생각하고 있진 않았었다.

 

 

4

 

닭 껍질을 벗겨내고 영계(軟鷄) 뼈에 붙은, 얼마 되지도 않는 살점을 발라냈다. 점심을 먹고 한참이나 시간이 지난 통에, 입안에서 잔뼈를 이리저리 굴려가며 정성껏 오물거렸다. 숟가락으로 기름 범벅이 된 밥을 떠먹었다. 살짝 느끼하고 밍밍한 맛이 나는 것 같아 소금과 후추를 뿌렸다.

조금 식힐 요량으로 숟가락을 들고 밥알을 치대고 있었더니, 형이 먹지도 않고 떼어 낸 닭살을 뚝배기 안으로 넣어 준다.

“입에 맞나 보다? 이거 다 먹어. 난 별로라 잘 안 넘어가네.”

“이걸 왜 나를 줘. 형 몸이나 챙겨, 제발…….”

나는 고맙기도 하면서, 시들한 형의 말투에 화가 일었다.

“아, 진짜. 이렇게 능청스럽게 내 생각할거면, 그때도 거짓말하지 그랬냐? 굳이 말할 필요가 뭐가 있어서……. 솔직한 게 좋지 만은 않다는 거, 형 보고 알겠더라. 사는데 지장 없는 거면 엄마, 아빠한테 그냥 숨기고 있지……. 작년엔 직장에서도 짤리고, 지금 봐. 형 좋아 보이나. 그리고 약 바꿨다더니, 효과는 있는 거야?”

말을 한 번 쏟아내기 시작하자, 마음에 담아 두었던 말들이 삼켜지지 않았다.

“지난번에 보건소 가서 검사 받았으면, 그냥 형만 알면 되잖아. 결과 안 좋게 나온 거랑 형이……, 남자 좋아한다는 것까지 다 말을 하냐?”

눈물이 핑 돌았다.

내가 걱정하고 있는 것이 형인지, 아니면 나인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형이 보건소에 갔다 오고 나서 몇 주 뒤에, 나와 부모님에게 이야기를 털어 놓았을 때처럼, 지금 앞에 앉아 있는 형의 표정에서는 어떠한 흔들림의 흔적도 찾을 수 없었다.

단순한 진찰을 받으러 갔었고, 우연찮게 HIV 검사를 겸하게 되었는데, 결과가 양성으로 나왔다, 라는 식의 통보를 철 지난 개그보다 더 재미없게 말하는 형이었다. 혹시 착오가 생긴 것은 아닐까 하는 마음에 다른 병원에서도 재검을 받았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단다. 엄마와 아빠는 벌린 입을 달싹거리기만 했고, 아직 상황을 갈무리할 만큼 성숙하지 못했던 나는, 그 침묵의 순간이 어서 깨지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진석아, 오랜만에 형 만났는데 실컷 놀다 가야지. 기분 풀어라. 응?”

“나한테는 형이 남자를 좋아한 거, 아무렇지 않아. 근데 말이야. 그래, 부모가 못나서 그러지. 어쩌다 그랬냐고 물었을 때 그냥 거짓말하지 그랬어. 아무렇지 않다고는 해도 신경 써야 할 게 좀 많아? 그냥 재수없게 사창가 가서 옮았다고 하던가. 옆에 의지할 사람도 없으면서, 엄마하고 아빠한테 없는 사람 취급 당하는 순간에 형 얼마나 힘들었을까 생각하면…….”

더이상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눈물이 볼을 타고 간지럽게 흘러내렸다. 그나마 청승맞게 울고 있는 내 꼴을 주시하는 사람이 없어서 다행이었다.

손을 뻗어 휴지통을 집었지만, 텅 비어 있었다. 주방에서는, 아까부터 뭐가 그리 즐거운 지, 굵직한 아줌마들의 웃음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긴장이 풀리자 숨이 가빠지며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

형이 나에게 먼저 커밍아웃했더라면, 부모님이 형을 쫓아내지 않았을 것이고 나는 여전히 형을 따라다니며 지낼 수 있었을 것이다. 형이 수도 없이 고민하고 망설였을 계획을 내가 먼저 저지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형은 말하지 않았다. 나만이 형의 마음을 열 수 있다는 것은 엄청난 착각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여태껏 형과 나 사이에 포개어진 우정 이상의 그 무엇이 결코 다른 사람들과는 같지 않은 성질의 것이라고 굳게 믿어 왔던 내가 한심스럽고 역겨워졌다. 어쩌면 그렇게 바보 같을 수 있을까, 다시 예전으로 돌아간 느낌이 들었고, 어딘지 알 수 없는 곳으로 나를 밀어버린 형의 행동에 적잖은 배신감이 들었다.

 

“형은 누구에게나 솔직한 사람이 되고 싶어. 앞으로도 그럴 거고. 근데 그러기 위해선 무엇보다 나 자신에게 당당해야 되겠더라고. 물론 엄마, 아빠랑 너한테 상처 주고 싶진 않았어. 부모님도 형을 많이 사랑했기 때문에 받아들이기 힘드신 거 아닐까? 그러니까 눈물 뚝해……. 형이 남자를 사랑하는 건, 누구의 잘못으로 그런 게 아니야. 형이 곰곰이 생각해 보니까 가장 정직하게 나온 답이 그렇더라고. 바이러스 걸린 것도, 어떻게 보면 내가 떳떳한 사람이란 증거 아니겠어?”

형은 덤덤히, 나를 상냥하게 바라보며 말했다.

그리고 가방에서 손수건을 하나 꺼냈다. 건네주는 줄 알았던 손수건을 쫙 펼치더니, 내 얼굴에 덮어 양손으로 감싸주었다. 피부에 직접 닿지 않았음에도, 꾹꾹 눌러대는 큼지막한 형의 손에서 온기가 느껴졌다. 친구도 아닌, 부모도 아닌, 형만이 소유하고 있는 따뜻함이었다.

 

 

5

형이 집을 나갔을 때, 나는 방문을 잠가 버렸다. 나에게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던 형이 미웠고, 그렇게 애지중지하던 자식을 쉽게 내던지는 부모님의 비정함이 야속했다. 한편으로는 형의 버팀목이 될 조건이 내겐 없다는 사실과 가족일 수 있는 자격의 한계가 적나라하게 들추어진 기분이 들어, 누구의 상대도 되지 못하는 내 자신에게 화가 치밀었다. 이런 모순된 감정들로부터 비롯된 예기치 못한 습격에 무너진 나는 방 안에 꼼짝부득하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학교도 가지 않고 밥도 먹지 않고 있던 나를, 부모님은 어찌할 수 없었나 보다. 나 또한 그랬다. 침대에 누워 있으면, 내면 깊숙한 곳에서 흔들리는 내가 보였다. 눈을 질끈 감아도 어지러웠다. 밤이 되면, 불도 켜지 않은 완전한 암흑 속으로 영원히 꺼져버릴 것만 같았다. 박제 당한 감각이 지배하는 절대 공포의 세계. 나를 찾을 수도 없고, 나를 볼 수도 없는 속박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불쑥, 간절한 나머지 불결한 생각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이 상태라면 저주를 풀 수 있는 방법은 하나 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돌이킬 수 없는 일이라서 더 애틋하게 느껴질 것만 같았다. 그러나 나는 망설였다. 그 찰나의 순간에 주저한 것이었다. 그 순간 나에겐 오로지 형이 필요했다.

 

형이 계산을 하는 동안 그득한 배를 두드렸다. 너무 과식을 한 것일까, 속이 더부룩해 미간이 찌푸려졌다. 배부름보단 배고픔이 낫다는 말이 생각났다.

타고 올라가던 엘리베이터가 이 층에 멈춰 섰다. 고리에 적힌 방 번호를 확인하고 열쇠를 꽂았다. 방으로 들어서자 눅눅한 냄새가 났다.

신발을 벗고 먼저 들어선 형이 방문을 열며 말했다.

“먼저, 씻어라. 내일 일찍 일어나서 놀러가려면 빨리 자는 게 낫겠다.”

형과의 재회의 시간은 올해도 어김없이 일박 이일만이 허용되었다. 부모님은 동시에 자식 둘을 잃을 순 없다고 생각했는지, 내 바람대로 형을 만나게 해주었다. 간혹 일 년에 딱 한 번 가능한 형과의 접촉으로 병이 옮는 것은 아닌가 하고 불쾌해 했지만, 나에겐 전혀 신경쓸 거리가 아니었다.

머리 위로 물줄기가 쏟아졌다. 찝찝했던 하루의 먼지가 씻겨 나가고 눈에 뭉쳐있던 피로가 흩어져 갔다.

형이 사는 곳은 주점에 딸린 좁은 셋방이었기에, 우리가 만날 때면 이렇게 가까운 모텔에서 묵게 되었다. 학교에서 운동을 너무 무리하게 했는지 오른쪽 어깨가 결려왔다. 찬물 때문인지 몸도 으슬으슬 떨리기 시작했다.

타월로 대충 몸을 감싸고 침대에 드러누웠다. 이내 스르르 몸이 일으켜졌다. 이어서 뜨거운 바람이 머리에 닿더니 형이 머리를 헤집으며 털어준다.

머리가 거의 마르는 것 같기도 하고, 너무 어리광스럽다는 생각이 들어 잽싸게 드라이기를 뺏어 들고 형을 화장실로 밀어 넣었다.

창문을 두드리는 둔탁한 빗소리에 눈이 뜨였다. 깜빡 잠이 들었던 모양이다. 집에서 입고 자던 트레이닝복이 입혀져 있다. 마구잡이로 가방에 찔러 넣은 것을 형이 용케도 찾았나 보다.

커튼 너머에서 새벽녘, 시린 빛이 스며들어 왔다. 팔을 괴고 누워있는 형의 몸이 규칙적인 호흡에 맞춰, 리듬감 있게 커졌다 부풀었다 한다. 나도 형을 따라 옆으로 몸을 돌렸다. 마주한 등에 손을 갖다 대자, 고른 숨결이 형의 심장을 타고 손끝으로 전해졌다.

“형, 나 아직 못한 말 있는데……. 아까 형이 너무 솔직했다고 욕했잖아. 근데 사실은 엄청 부러워서 그랬어. 셈날 정도라서, 그런 형이 좋은 건지도 몰라. 그런데 어쩌지? 나도 누굴 좋아하는 것 같은데, 나는 말할 수가 없다. 아직 준비가 안됐나 봐. 그래도 말야, 혹시 내가 나중에 정말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 누구보다 형한테 제일 먼저 말할 거니까…….”

형은 깊은 잠에 빠진 것 같았다.

나는 몸을 바로 누이고 천장을 올려다봤다. 아무것도 없을 것만 같은 부족(不足)의 공간이 나타났다. 멀리서 여름이 익어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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