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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우당 문학상

[당선작]<깊은 밤을 날아서>

by 행성인 2013. 4. 23.

 이은


 

“오공육 둘, 칠오일 셋.”

“칠공일구 다섯.”

여기, 소년과 나무가 있다.

소년은 길 건너 ‘로얄고시원’에 살고 있고 나무는 ‘여기’ 살고 있다.

사람들은 몸통에 621번 은빛 번호표가 박힌 나무를 가로수(街路樹)라고 부른다.

소년은 날마다 여기서 가로수인 나무와 지나가는 버스 수를 센다.

“칠공이오 넷, 아니 다섯인가?”

“이제야 오는군. 칠공육은, 둘.”

이 ‘지루한 놀이’를 처음 하자고 한 건 나무였다.

“뭐야! 방금 칠공이이 지나갔어. 왜 안세는 거냐?”

“아, 미안 칠공이이 셋.”

소년이 버스 세기에 집중하지 않으면 나무는 까칠해진다. 버스 세기는, 이 ‘지루한 놀이’는 나무의 유일한 취미인 것이다.

그건 그렇고 그게 언제였더라? 이 ‘지루한 놀이’를 시작한 건,

 

 

이 년 전 늦은 여름이었다.

소년은 땅바닥을 보며 하염없이 걷고 있었다. 학교에서 집까지 가는 길을 벌써 몇 번째 돌고 있는지 모르겠다. 집 앞까지 갔다가 다시 돌고 돌기를 수십 번째, 벌써 해가 기울고 있었다. 소년의 그림자가 점점 축 늘어진다. 어디든 가고 싶지만 어디든 가지 못하고 집을 피해서 동네 둘레만 빙빙 돌고 있는 자신이 답답해서 미칠 것 같다. 소년은 그러면서도 자꾸 그 아이가 떠올라 죽고만 싶다. 담탱이한테 맞은 뺨보다, 어딜 가나 수군대는 아이들보다, 소년은 그 아이의 무관심이 더 참기 힘들다.

그 아이는 소년의 사랑. 소년을 하루에도 수십 번씩 죽이기도 살리기도 하는 그 아이는 소년의 짝꿍이다. 아니 짝꿍이었다. ‘그 일’이 있기 전까지는. ‘그 일’을 생각하자 소년의 얼굴은 화끈 달아오른다.

그 아이와 소년은 늘 둘이 붙어 다니며 같은 학원에 다니고 좋아하는 음악을 함께 듣는 그런 친구 사이였다.

사실 ‘그 일’은 소년에겐 이미 오래 전부터 일어나고 있었다. 아침에 일어나면 오줌이 마렵고 배가 고프면 밥을 먹는 것처럼 언젠가부터 아주 자연스럽게 소년은 그 아이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 아이한테 문자가 올까봐 어디서든 핸드폰을 손에 꼭 쥐고 있고 땀에 절은 그 아이의 체육복을 몰래 집으로 가져와 냄새를 맡으며 자위를 했다. 정말이지 평범하고 자연스럽고 심지어 문제가 될 일이 전혀 없었다. 그 아이가 ‘남자’라는 것만 빼고 말이다.

‘그 일’은 계속 그래왔듯이 아주 자연스럽게 일어났다.

일요일이었다. 소년과 그 아이는 농구를 하고 아무도 없는 그 아이네 집에 가서 라면을 끓여 먹었다. 그리곤 창문을 열고 베란다에서 담배를 한 개비씩 피우고 수학 숙제를 했다. 그러다 슬슬 졸음이 밀려왔고 둘은 침대에서 잠이 들었다. 그렇게 몇 시간을 자다가 소년이 먼저 잠에서 깼고 소년은 잠든 그 아이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 아이의 눈썹을 보고 감은 두 눈을 보고, 코를 보고 입술을 보고 있는데 그 아이가 잠에서 깼고, 그리고는 둘이 눈이 마주 쳤는데······, ‘그 일’은 그렇게 일어났다. 소년이 먼저 그 아이의 입술에 입술을 갖다 댔다. 그 아이의 입술은 믿을 수 없을 만큼 따뜻하고 말랑말랑했다. 소년이 입을 벌리고 조금씩 혀를 움직였다. 그러자 곧 그 아이의 혀와 침이 소년의 온몸으로 비집고 들어왔다. 그때부터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둘은 서로의 몸을 더듬으며 정신없이 입을 맞췄다. 서로 맞댄 허벅지의 체온과 그 아이의 숨소리 때문에 소년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조금만 더, 더, 더.’하는 순간 소년의 등에 날쌘 주먹이 날아왔다. 등이 얼얼하고 화끈거릴 정도로 빠른 주먹이 쉴 새 없이 날아왔는데 그 주먹은 소년의 등을 지나쳐 그 아이의 등으로 다시 소년의 팔과 어깨로 옮겨 왔다. 소년과 그 아이는 그렇게 한참을 맞고서야 서로에게서 떨어졌다. 얼떨떨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자 그 아이의 엄마가 두 주먹을 꽉 쥐고는 부들부들 떨면서 소년과 그 아이를 노려보고 있었다. 소년은 새파랗게 질린 그 아이의 엄마를 보며 자신이 얼마나 큰 실수를 저질렀는지를 깨달았다. 두고두고 후회할만한 엄청난 실수!

‘아까 방 문을 잠갔어야 했어.’

다음 날 학교에 가니 그 아이는 결석을 했고 핸드폰은 꺼져 있었다. 이틀 뒤에 그 아이는 학교에 다시 나왔지만 소년의 옆자리가 아닌 다른 아이 옆에 앉았다. 그 다음날은 반 아이들이 수군대기 시작했고 그 다음 다음 날에 소년은 집에 가다 얼굴도 본 적 없는 옆 학교 노는 애들한테 주먹으로 아랫배를 흠씬 두들겨 맞고 침 세례를 당했다.

“니가 역겨운 씨발 놈의 호모 새끼라며?”는 노는 애들 가운데서 가장 점잖은 아이가 내뱉은 말이다. 다른 아이들이 한 말은 너무도 기상천외한 것이어서 소년은 입에 담을 수도 없다.

다음 날 소년이 욱신거리는 배를 움켜쥐고 책상 위에 엎어져 있을 때 누군가 “야, 일어나 봐.”하면서 소년을 툭툭 쳤다. 며칠 만에 누군가가 소년에게 말을 건 것이다. 소년이 놀라 고개를 드니 반장이 인상을 잔뜩 찌푸리며 서 있었다.

“야, 담탱이가 너 상담실로 오래.”

소년은 조용히 일어나 상담실로 걸어갔다.

“야 이, 미친 자식아. 너 방금 뭐라고 했어. 누구를 좋아해? 너 이 새끼 너 부끄러운 줄 알아. 왜 남자가 남자를 좋아해. 너 변태야? 아니, 정신병자야? 왜 멀쩡한 애한테 입에 키스를 하냐고. 아이고 내가 더러워서 차마 입에 담을 수가 없다. 이 새끼야.”

소년은 그제야 아차 했다. 담임이 방금 전에 조용히 <맥심> 잡지를 건넬 때 그냥 받을 걸 그랬다. ‘욕구불만’ ‘한때 그럴 수 있는 일’ 따위의 말을 섞어가며 어깨를 토닥여 줄 때 가만히 입 닥치고 교실로 갈 걸 그랬나보다. 하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소년은 가슴이 터질 듯이 빵빵한 여자가 표지로 나온 <맥심> 잡지를 빤히 바라보다가 말했다.

“저, 걔 진짜로 좋아하는데요. 그리고 저 이런 잡지보고 안 서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담임이 소년의 뺨을 후려쳤다. 한 대, 두 대, 세 대…… 뺨이 후끈거리고 귀가 먹먹해졌다. 담임은 끊임없이 무언가를 말했지만 먹먹해진 귀 때문에 무슨 소린지 잘 들리지 않았다. 수업 시작종이 울리자 담임이 말을 멈추고 마지막으로 소년의 머리통을 한 대 더 후려갈겼다. 정말…… 아팠다.

 

 

고개를 푹 숙이고 동네를 돌고 돌면서 발길이 닿는 데로 걷다보니 어느새 낯선 동네에 와 있다. 그리고 벌써 해도 저물었다. 집에 가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담탱이가 아빠한테 전화하는 것까지 보고 상담실을 나왔으니······. 뻔하다.

소년은 땅만 보고 걷다보니 목이 뻐근해 하늘로 고개를 쳐들었다. 쳐든 순간 또 하나의 ‘그 일’이 소년을 기다리고 있었다.

“나랑 버스 세기 하지 않을 테냐?”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놀란 소년은 바로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주저앉아서 위를 멍하게 올려다보는데 가로수 한 그루가 소년을 내려다보며 다시 말하고 있었다. 아주 또렷하게.

“나랑 버스 세기 하지 않을 테냐? 이제 혼자 세는 게 지겹다.”

그 소리에 겁을 잔뜩 먹고 내뺀 소년이 나무에게 다시 온 건, 몇 시간이 흐른 뒤 아직 날이 밝기 전이었다.

“아직 시간이 일러서 버스가 뜸하다. 버스는 조금 있다가 세자. 나 옆에 좀 앉을게.”

이미 앉으면서 소년이 말했기에 나무는 아무 말도 못하고 잠자코 있었다. 그리고 첫 버스가 지나갈 때까지-또 그 뒤로도 나무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멍이 들고 피가 맺혀 부풀어 오른 소년의 얼굴에 대해서, 소년 옆에 있는 작은 짐 가방에 대해서, 또 소년이 “뭐가 이렇게 좆 같냐.”하면서 우는 이유에 대해서도.

 

 

아빠한테 주먹으로 쥐어 터지고 발로 차이고 있는 동안 소년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눈을 꾹 감고 있어서. 하지만 소리는 어쩔 수 없었다. 다행이 소년의 아빠는 과묵한 사람이라 아무 말도 없이 소년을 때리긴 했지만 문제는 소년의 엄마였다. 소년의 엄마는 눈을 감고 경건하게 두 손을 모으고 거실 구석에서 “하나님 아버지, 저 아이를 악의 기운으로부터 지켜 주시 옵고······.”하며 간절하게 기도를 하고 있었다.

눈을 감고 아빠한테 얻어맞으며 엄마의 기도 소리를 듣고 있자니 소년은 지옥이 따로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끝났다.’ 생각하고 겨우 두 눈을 떴을 땐 새벽이었고 소년은 거실 소파 밑에 구겨져 있었다. 몸에서는 땀 냄새와 지린내가 진동을 했다. 바지를 벗고 팬티를 내려 보니 누런 오줌이 말라붙어 있었다. 한창 감성이 예민한 소년이었지만 자기가 맞다가 오줌을 지린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소년은 한숨을 푹 쉬었다. 정말 죽고 싶은 기분이었지만 소년은 죽지 않기로 했다. 쪽팔리기는 했지만 오줌 한 번 지렸다고 죽을 수는 없었다.

집 안이 조용하다. 집에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한 소년은 일어나서 몸을 씻고 팬티를 빨고 나서 주섬주섬 가방에 짐을 쌌다. 생각할 겨를도 없는, 본능적인 행동이었다. 몸이 먼저 아는 것이다. 이 집에 있으면 살 수가 없을 거라는 것을. 소년은 국에 밥을 말아서 허겁지겁 먹었다. 입을 벌릴 때마다 찢어진 입술 때문에 쓰라렸다. “개새끼.”하고 욕을 한 다음 다시 밥을 먹었다. 그런 다음 집을 구석구석 뒤졌다. 서랍장, 아빠 양복 주머니, 엄마 화장대를 꼼꼼하게 뒤지고 욕실 선반까지 집안 전체를 뒤져 나온 돈을 들고 운동화를 신으며 아버지 생각은 안 났지만 눈물 많은 엄마 생각은 조금 났다. 하지만 ‘괜찮아. 엄마한텐 하나님 아버지가 있으니까.’하고 생각하자 그 마음은 쉽게 접을 수 있었다. 그런데 ‘나한텐 누가 있지?’라는 생각에 소년은 잠시 멈칫했지만 어쨌든 소년은 그렇게 한 발자국 한 발자국, 집에서 나왔다.

 

 

“칠공육 둘.”

“오공육 셋, 그런데 말이야, 왜 얼마 전부터는 계속 밤에 오는 거냐?”

“일하러 가기 전에 들르는 거야. 낮에 일하는 시간에서 밤에 일하는 시간으로 바꿨거든.”

“밤에 일한다고?”

“응. 칠공일구 하나, 밤새 불을 켜고 문을 여는 가게가 있어. 나 거기서 일하거든.”

“밤새 문을 연다고? 맞다. 여긴 밤에도 환하니까. 그럼 잠은 언제 자는 거냐? 칠오일 둘.”

“잠은 일하고 와서 낮에 자. 밤엔 잠이 잘 안 오거든.”

“그래? 나도 잠이 안 오는데 너도 그러냐?”

“너도 잠이 안 와?”

“그래. 너무 밝아서 잠이 안 오는 거야. 낮도 밤도 온통 밝아서 잠을 잘 수가 없어. 잠자본 건 여기에 오기 전에, 아주 오래전 일인 것 같다.”

버스가 지나간다.

“칠공일구 둘.”

“칠공이오 셋.”

불면증에 걸린 소년과 나무가 말없이 지나가는 버스 수를 센다.

아무도 믿지 못할 놀라운 일이 벌어지고 있지만, 아무도 소년과 가로수 따위에겐 관심이 없다. 놀랍게도.

 

 

나무와 소년이 서 있는 길 건너편엔 로얄고시원이 있다.

고시원 건물은 이름과는 달리 여기저기 금이 가고 칠이 벗겨진, 아주 허름하고 오래된 건물이다. 고시원 다섯 개의 창문에 ‘로’ ‘얄’ ‘고’ ‘시’ ‘원’ 이라고 한 자씩 써져있는데 ‘얄’자가 써진 창문이 드르륵 열린다.

창문을 연 사람은 로얄고시원 총무인 도련이다. 도련은 집을 나온 뒤로 거의 팔 년 동안을 이 고시원에서 살고 있다.

도련은 위로 누나만 셋이다. 오래도록 아들을 기다려온 도련의 부모님한테 도련은 그야말로 금이야 옥이야 귀한 아들이었다. 그래서 이름도 도련님처럼 귀하게 대접받으며 살라고 ‘도련’이 되었다.

서울, 한 동네, 골목으로 들어서 좁은 골목과 골목을 지나 계단을 오르고 또 오르면 집과 집의 경계를 구분하기조차 힘든, 마치 하나의 거대한 덩어리로 보이는 다닥다닥 붙은 집들이 끝없이 이어져 있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도련의 집이다.

도련은 그 집에서 나와 계단을 내려가고 또 내려가서 좁은 골목과 골목을 빠져 나와 학교를 가고, 학교가 끝나면 다시 골목으로 들어와 좁은 골목과 골목을 지나 계단을 오르고 또 올라서 집에 왔다. 도련은 그 길들을 오고가며 지독한 하수구 냄새와 오줌지린내를 맡았고 노인들의 앓는 소리와 사람들이 싸우며 고함지르는 소리를 들었다. 깨진 창문을 유리테이프로 이어 붙여 바람이 불 때마다 힘없이 덜컹거리는 어느 집 창문을 보며 도련은 마치 자신이 그 깨진 창문이 되고, 너덜너덜 거리는 노란 유리테이프가 된 것 같았다.

도련은 집으로 이어지는 그 골목들과, 부모님의 파스 냄새와 꿉꿉한 냄새가 진동하는 좁아터진 집을 벗어나고 싶었다. 시장에서 생선을 파는 부모님의 몸에서 나는 비린내와 시장통 냄새, 그리고 엄마가 팔다 남은 생선으로 끓이고 조리고 지지고 볶는 생선 반찬의 비릿한 냄새는 도련의 몸에 깊숙이 배었다. 그리고 그 냄새는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그리고 언제까지고 사라지지 않을 것만 같았다.

‘난 벗어날 거야. 여기만 아니면 어디든.’

도련은 골목 밖으로 나가고 싶었다. 하지만 고등학교를 졸업해도 도련은 집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물론 고졸인 도련이 얻을 수 있는 일자리는 의외로 많았다. 도련은 집에서 벗어나기 위해 있는 힘을 다해 열심히 일했다. 하지만 일하는 내내 무릎 한 번 못 펴고 오줌이 마려워도 눈치가 보여 몰았다 싸지르고 일해도, 도시락 먹을 곳이 없어 먼지 가득한 창고에서 쭈그려 앉아 밥을 먹고 일해도, 아파도 휴가가 없어 이를 악물고 참고 일해도 도련은 언제나 그 자리, 그 골목 안이었다. 뭔가 이상했지만 왜 그런 건지 생각할 틈도 없이 도련은 눈 뜨면 일을 하러 가야했다. 도련의 부모님과 누나들이 그랬듯이.

그렇게 하루 일을 마치면 도련은 늦은 밤 집으로 돌아와 그림을 그렸다. 도련은 그림책 작가가 되고 싶었다. 도련이 숨 쉴 수 있는 곳은 그림책 세계밖에 없었다. 도련이 만들어내는 그림책 세계 속에선 발에 차이는 돌멩이가, 숲 속 이끼가, 보잘 것 없는 그림자 같은 사람들이 주인공이었다. 도련은 그림책 안에서 하늘을 훨훨 날고, 숨이 찰 때까지 끝없이 달렸다. 늦은 밤까지 그림을 그리고 이야기를 만들다 지쳐 잠이 든 도련은 엄마가 끓인 생선국 냄새를 맡으며 잠에서 깨어 일을 하러 나갔다. 하지만 도련의 꿈을 존중해 주고 이해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늘 말이 없고 퇴근만 하면 방에 틀어박혀 그림을 그리고, 돈만 생기면 그림책을 사는 도련을 보며 부모님은 혀를 끌끌 찼다. 누나들은 “꿈은 꿈일 때 아름다운 거야.” 라든지, “하고 싶은 걸 다 하면서 살 순 없어. 세상살이가 그렇게 만만한 게 아니야.” 같은 말을 하며 드라마에 나오는 여주인공 같이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또 어느 날은 도련이 없는 사이에 부모님이 도련의 스케치북과 그림책들을 옆집 꼬마에게 주기도 했다. 그 사실을 안 도련은 얼굴이 시뻘개져서 옆집으로 찾아가 스케치북과 그림책들을 모두 들고 나왔다. 도련의 등 뒤에서 꼬마 아이는 발을 동동 구르며 엉엉대고 울고 있었고 그 아이의 엄마는 뒤도 안 돌아보고 나가는 도련에게 “할 짓이 없어서 어린애한테 줬던 걸 도루 뺏어가냐고오!”하면서 목소리가 뒤집어질 때까지 바락바락 소리를 질러댔다.

다리가 후들거렸다. 그 뒤로 지독한 몸살이 찾아왔다. 더운 여름날, 솜이불을 뒤집어쓰고 덜덜 떨면서 도련은 마음속으로 다시 한 번 다짐했다.

‘난 벗어날 거야. 여기만 아니면 어디든.’

 

 

어느 날, 일을 마치고 버스를 타려고 정류장으로 걸어가던 도련은 길 가로수에 붙은 전단지를 보게 되었다.

 

고시원 총무 구함. 숙식 제공, 개인시간 많음. 공부하시는 분 환영, 사장님 터치 전혀 없음

로얄고시원(바로 길 건너편에 있음) 02-987-0519

 

 

도련은 누가 볼 새라 그 전단지를 뜯어 손에 쥐었다.

전단지 뒤에 붙은 끈적끈적한 테이프 때문에 가려워 죽을 지경이었던 나무는 도련이 전단지를 떼어주자 기분이 좋아져서 몸을 부르르 떨었다. 전단지를 들고 있는 도련의 손 위로 나뭇잎 하나가 떨어진다. 도련은 고개를 젖혀 나무를 한 번 올려다보고 나서 길 건너편을 바라보았다. 거기엔 이름만 엄청 고급스러운 로얄고시원이 있었다. 도련은 로얄고시원을 바라보며 씩 웃었다.

그렇게 로얄고시원의 총무가 된 도련은 낮엔 사무실에 앉아서 그림을 그리고, 손님이 오면 방을 보여주고 화장실 변기가 막히면 뚫고 30인분 전기밥솥에 중국산 쌀로 밥을 하고 밤이면 작은 창이 있는 총무 전용 방으로 돌아와 텔레비전을 보다 잠들었다. 그리고 가끔 ‘로얄고시원’이 써진 복도 창문으로 가서 ‘얄’자를 열고 밖을 내다보며 생각에 잠겼다.

도련은 많은 생각을 했다. 가끔은 웃기도 하고 또 가끔은 한숨을 쉬기도 했다. 늘 떨어지기만 하는 그림책 공모전에서 대상을 받아 수상 소감을 말하는 상상을 하기도 하고, 화장실이 딸려 있는 작은 방 한 칸을 얻어 이리저리 굴러다니며 자는 상상도 하고, 스탠드가 달린 그림 작업대와 좋은 아크릴 물감과 72색 아트마카를 사고 싶단 생각을 하다가 자기 월급으론 턱없다는 생각도 한다. 하지만 언제나 모든 생각은 돌고 돌아 헤어진 애인으로 끝맺었다. 도련이 한때 온 마음을 다해 사랑하던 그 사람······.

고등학교를 졸업하던 날, 운동장에서 부모님과 어색한 표정으로 사진을 찍고 중국집에 가서 짜장면에 탕수육을 먹고 집에 돌아온 도련은 대중목욕탕에 가서 몸을 구석구석 깨끗하게 씻었다. 그리고 드라이기 기계에 200원을 넣고 머리를 말리고 머리카락에 왁스를 정성스럽게 발랐다. 목욕탕에서 나와 지하철을 두 번 갈아타고 30분쯤 걸어서 도착한 종로. 어느 건물 지하로 내려가 굳게 닫힌 문 앞에 서 있는 도련. 손엔 땀이 잔뜩 찼고 이마에도 땀이 흥건하다. 도련은 문 앞에 잠시 서 있다가 뒤돌아서서 계단을 올라간다. 그러다 멈춰 서서 다시 계단을 내려와 문 앞에 선다. 침을 꿀꺽 삼키고는 손에 난 땀을 바지에 닦는다. 문틈으로 음악 소리와 웃음소리, 낮은 목소리들이 섞여 흘러 나왔다. 도련은 잠시 서 있다가 천천히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겨드랑이와 성기에 털이 거뭇거뭇하게 날 때부터 누나들의 속옷을 봐도 묘한 기분이 들지 않았던 건 가난한 누나들의 팬티가 해져서가 아니었다. 도련은 처음부터 그랬다. 도련의 생각으론 엄마 뱃속에서부터였던 것 같다.

도련은 맘에 드는 남자를 보면 떨렸고 그 사람 때문에 밤잠을 못 이루고 속앓이를 했다. 하지만 도련의 곁에 있던 친구들은 새로 온 여자 교생 선생님의 치마 속을 궁금해 하고, 여성 포르노 배우를 보고 자위를 했기에 도련은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게이바에 한 달을 매일 같이 드나들다가 우연히 그를 만나고 나서부터 도련은 다물었던 입을 열기 시작했다. 입을 연 도련에게선 도련이 상상하지도 못했던 소리들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를 만지고 그와 사랑을 나눌 때 도련이 냈던 소리들은 이제껏 도련이 알던 자신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미칠 듯이 짜릿하고 강렬한 소리들, 자신도 걷잡을 수 없이 터져 나오던 황홀하고 뜨거운 소리들. 그런 소리들이 자신의 몸속에서 나왔다는 게 믿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그는 도련이 오래전부터 꿈꿔왔던 모든 것들을 도련의 눈앞에 보여 주었다. 도련이 곰팡이 핀 천장을 바라보며 그렸던 수많은 물음표들의 답은 그가 이 세상에 존재함으로서 눈 녹듯이 풀렸다.

도련은 그를 사랑하게 되면서 이 세상을 두 손으로 잡고 뒤흔들고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좀 슬프긴 했지만 그런 기분이 들 때마다 도련은 그에게 “내가 믿는 건 당신이랑 나뿐이야. 그거 빼곤 아무것도 안 믿어.”하고 말했다. 그 말을 할 때마다 “네 도련님, 우리 도련님.”하며 장난치던 그의 모습이 생각나 도련은 눈을 꾹 감았다. 그러자 자동으로 그의 늙은 어머니가 떠올랐다. 도련을 찾아 왔던 그의 어머니…….

‘당신 어머니 얼굴은 이제 희미하지만, 콧잔등 위에 맺혀 있던 그 땀방울은 아직도 선명해.’

도련을 만나러 좁은 계단과 언덕을 오르고 오르느라 맺혔을 그 땀방울. 도련은 그 땀방울을 보자 말도 안 되게 눈물이 핑 돌았다. 분노도 슬픔도 아닌, 설명할 수 없는 눈물이었다. 지독히도 더운 여름 날, 도련과 그의 어머니는 도련의 방에서 말없이 앉아 있었다.

그의 어머니 콧잔등 위에 맺힌 땀방울을 바라보던 도련의 이마에도 땀이 맺히기 시작했다. 무릎을 꿇고 앉은 도련의 발이 찌릿찌릿 저리기 시작할 때 쯤, 그의 어머니가 말을 꺼냈다.

“우리 아들 선 볼 거예요. 에미로서 부탁해요. 우리 아들 그만 만나 줘요. 두 사람 다 사람의 도리를 해야 하지 않겠어요. 남자로 태어났으면 참한 아가씨 만나서 결혼도 하고 애도 놓고 그렇게 평범하게 살아야지. 보통 사람들처럼 평범하게…….”

평생 누군가에게 모진 말 같은 거 한 번도 해본 적 없을 것 같이 생긴 그의 어머니 앞에서 ‘이럴 땐 무슨 말을 해야 하지?’ 하고 생각만 하다가 아무 말도 못했던 그날······.

‘내가 다른 사람을 다시 사랑할 수 있을까?’ 생각하며 눈을 떴을 때, 도련의 눈앞엔 가로수와 소년이 있었다.

 

 

밤 10시부터 아침 8시. 소년이 편의점에서 일하는 시간이다.

밤은 깊어도 편의점의 불은 꺼지지 않는다. 환하게 밝힌 인공의 불빛으로 밤 사람들이 모여든다. 소년은 삼각 김밥, 맥주, 휴지, 담배, 음료수, 껌, 콘돔의 바코드를 찍고 또 찍는다. 그렇게 몇 백 개의 바코드를 찍고 나면 아침이 밝아올 것이다.

소주 한 병, 새우깡 하나. 바코드를 두 개 찍는데 커다란 손이 소년의 어깨를 움켜쥔다.

“어이, 자네 우리 고시원 끝 방에 사는, 맞지?”

고시원에 같이 사는 김 씨 아저씨다. 고시원 사람들과는 말을 섞지도 않고 잘 어울리지도 못하는 소년이 라면 먹으러 주방에 가면 단무지도 건네고 말도 건네는 아저씨다. 막노동을 하러 다니는 아저씨인데 같이 일하러 다니는 아저씨 둘과 늘 붙어 다닌다.

“안녕하세요.”하고 인사를 건넸는데도 아저씨는 못 알아듣는다. 벌써 얼큰하게 취해 눈이 풀렸다. 소년을 알아본 게 신기할 따름이다. 소주와 새우깡을 들고는 “여기서 일하는구먼. 고생이 많다야.”하면서 비틀비틀 대며 나가는 아저씨.

손님이 없는 틈을 타서 소년이 담배를 피우러 바깥으로 나가니 편의점 앞 길바닥에서 김 씨 아저씨가 늘 함께 다니는 아저씨 둘과 주저앉아 술을 마시고 있다.

김 씨 아저씨는 종이컵에 담긴 소주를 안주도 없이 들이키며 아저씨들을 향해 꼬인 혀로 말한다.

“이봐 이 씨, 아버지가 의사면 아들도 의사고 아버지가 선생이면 아들도 선생이고 아버지가 잡부면 아들도 잡부야. 그게 인생이여.”

소년은 담배를 한 모금 깊이 빨고 김 씨 아저씨의 흙 묻은 작업화를 한 번 보고, 아스팔트 위에 널브러진 소주병을 한 번 보고 나서 담배를 끄고 천천히 편의점 안으로 들어간다.

아침 8시, 오전 아르바이트생과 교대를 하고 유통기한이 방금 지나 폐기한 차가운 햄버거로 배를 채운 소년은 맥주 두 캔을 사서 편의점을 나선다. 그리고 나무에게로 간다.

나무와 버스를 세며 소년은 맥주를 마신다. 맥주 한 캔은 나무에게 부어줄 참인데 나무는 벌써부터 보챈다. 하지만 소년은 조심스럽다. 나무가 취하지 않게 아주 천천히 부어줄 참이다. 소년이 이렇게 조심스러워 하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

일 년 전이었던가. 소년이 맥주를 마시다가 나무에게도 맛을 보여 주려고 남은 맥주를 조금 부어준 적이 있다. 그런데 술은 처음이었던 나무가 바로 취해버렸다. 술에 취한 나무는 온몸을 부르르 떨었고 나뭇잎들이 소년의 머리 위로 후두두 떨어졌다. 그리고 나무는 갑자기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는데 그 노랫소리가 무척이나 묘했다. 땀에 젖은 살과 살이 부대낄 때 나는 끈적한 소리 같기도 하고, 알이 꽉 찬 열매의 알이 톡톡 터지는 소리 같기도 했다. 하지만 중요한 건 노랫소리가 어땠냐가 아니었다. 나무의 노랫소리를 들은 사람들의 반응이었다. 지나가던 아저씨도, 손을 잡고 걷던 연인도, 둥근 안경을 쓴 아줌마도 모두 가슴이 쿵쾅거리고 젖꼭지가 바짝 서고 팬티가 촉촉하게 젖어 들었다. 모두들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당황스러운 건 소년도 마찬가지. 소년도 호흡이 가빠지고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소년의 그곳이 대책 없이 서기 시작했다.

그 뒤로 소년은 나무에게 맥주를 줄 때 나무가 취하지 않게 조심해서 준다. 물론 나무의 노랫소리를 들으면 기분이 끝내주게 좋긴 하지만 조금 지나면 무척 곤란해지기 때문이다.

“자, 나 다 마셨어. 이제 너도 줄게. 대신 천천히, 아주 천천히 줄 거야. 또 취해서 노래를 부르면 곤란하다고.”

그런데 나무가 이상하다. 아무 말이 없다. 나뭇잎 수십 개는 떨어뜨리며 기뻐해야 하는데 조용하다.

“왜 그래? 왜 아무 말도 안 해? 맥주 마시는 거 기쁘지 않아?”

“쉿, 조용히 해. 절대로 앞을 보지 말고 나만 봐라.”

소년은 무슨 일인가 싶어 나무만 빤히 바라본다.

“저기 길 건너편 창문에서 언제부턴가 어떤 사람이 계속 우릴 보고 있다. 지금도 뚫어지게 우리를 보고 있다고.”

나무의 이야기를 들은 소년은 움직일 수가 없다.

누구지? 소년은 나무에게 주려던 맥주를 홀짝홀짝 마시며 생각한다.

누굴까? 소년은 그러다 나무에게 줄 맥주를 다 마셔 버렸다.

소년의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다. 마치 나무의 노랫소리를 듣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창문을 열 때마다 저기에 서 있으니 참 신기하다.’고 도련은 생각한다.

하루에 몇 번씩, 또 몇 시간씩 혼자서 가로수 옆에 서서 저 아이는 뭘 하는 걸까? 오늘은 아침부터 혼자 맥주를 마시고 있다. 작은 키에 마른 몸, 늘 똑같은 청바지에 스니커즈. 저 아이는 분명 우리 고시원 끝 방에 사는 아이다.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듯 앳된 얼굴에 늘 말없는 아이. 실은 옆모습이 하도 마음에 들어 밥 먹을 때 주방에서 몇 번을 넋 놓고 훔쳐본 적이 있다. 오른쪽보단 왼쪽 옆모습이 좋다. 밥 먹을 때마다 움푹 들어가는 왼쪽 보조개 때문이다.

창밖의 소년이 사라지자 도련은 사무실로 간다. 사장이 시킨 방 값 정산을 마무리하고 요즘 새로 시작한 이야기의 그림을 그리려다가 멈추고, 방금까지 봤던 가로수를 그린다.

나무의 가는 줄기를 그리고 하늘로 뻗은 가지들과 나뭇잎들을 그리니 눈앞에 나무 한 그루가 있다. 자기가 그린 나무를 빤히 보던 도련은 “어, 진짜 나무네.”하고 혼잣말을 한다. 진짜 나무를 본 게 언제였지? 도련이 고시원에 살기 시작하면서 본 나무라고는 전깃줄에 가지가 엉키고, 보도블록 옆에 보일 듯 말 듯 한 흙속에 몸이 박히고, 반짝이는 전구 알을 몸에 칭칭 감은 가로수들뿐이었다. 그 가로수들에 익숙해진 도련이기에 그림이지만 나무 한 그루가 자기 앞에 온전히 서 있는 게 낯설다. 도련은 망설임 없이 나무 옆에 하늘빛 바탕을 칠한다. 바람을 섞어서. 그리고 뿌리 밑에는 온통 흙빛을 칠한다. 햇빛을 받고 영근 건강한 흙이다. 다 그린 나무를 보고 있는데 전화벨이 울린다. 주방이다. 밥이 떨어졌단다. 그리고 손바닥만 한 바퀴벌레도 나타났단다. 주방에 가서 밥을 하고 거대한 바퀴벌레도 떼려 잡고 오니 소년이 사무실 안에 들어가서 도련의 나무 그림을 빤히 보고 있다. 도련이 들어서자 소년은 “이거 이번 달 방 값이요.”하고 돈을 내민다. 이 고시원에서 가장 좁고 가장 싼 소년의 방. 도련은 소년을 보지도 않고 돈을 다 세고는 맞다고 하는데 소년이 안 가고 계속 서 있다.

“왜? 무슨 할 말이라도 있어요?”

“저, 이 나무 그림 가져도 돼요?”

“어, 이거요? 잘 그린 것도 아닌데…….”

“마음에 들어서요. 꼭 가지고 싶은데요. 주시면 안 될까요?”

도련은 그러라고 한다. 소년은 “고맙습니다.”하며 그림을 들고 자기 방으로 가고, 도련은 잠시 멍하게 서 있다가 자리에 앉으며 생각한다.

‘내가 저 애랑 이렇게 말을 많이 하다니.’

도련은 갑자기 책상 정리를 하기 시작한다. 책상 위 먼지를 물티슈로 닦고, 컴퓨터 자판 사이에 낀 과자 부스러기를 빼내고 다 쓴 메모지를 찢어 쓰레기통에 버린다. 그러다가 책상을 쾅 내리친다. 큰일이다. 아직까지 가슴이 뛴다. 도련은 아무래도 진정이 안 되는 자기 마음을 어쩔 수가 없어서 짜증까지 난다.

‘그냥 말 몇 마디 섞은 것뿐인데 왜 이러지? 젠장.’

아주 오랜만에 느껴보는 쿵쾅거림. 도련은 사무실 안을 서성이다가 사무실 창문에 ‘외출 중’이라고 써 서 붙이고는 동네 슈퍼로 뛰어간다. 뛰어가서 맥주 한 캔을 사서 벌컥벌컥 마신다. 그리곤 나무에게로 간다. 소년이 서 있던 자리에 자신도 똑같이 서는 도련. 너무도 오랜만에 찾아온 감정. 쿵쾅거리고 뭉클한, 이 감정은 뭘까. 서른이 넘은 남자가 끌리는 남자애와 몇 마디 했다고 진정이 안돼서 이렇게 유난을 떨다니. 끝인 줄 알았는데, 이런 감정은 이제 없을 줄 알았는데. 숨이 벅차 맥주도 잘 넘어가질 않아서 도련은 마시다 남은 맥주를 나무에게 붓는다. 한편 느닷없이 맥주를 마신 나무는 온몸을 부르르 떨고, 멍하게 서 있는 도련의 머리 위에 나뭇잎 몇 개를 후두두 떨어뜨린다. 그리고는,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다.

해는 쨍쨍 내리쬐고 낮술을 마신 나무는 노래를 부르고 그 옆에 도련은 얼굴이 달아오르고 또 온몸이 달아오른다. 그리고 손끝이 발끝이 귀두 끝이 짜릿짜릿해진다.

도련은 어느새 솟아오른 아랫도리를 감추려고 추리닝 바지를 계속 밑으로 밑으로 끌어 내린다. 참으로 뜨거운 한낮이다.

 

 

방으로 돌아온 소년은 도련에게 얻은 나무 그림을 벽 위에 붙인다. 그리고는 그림 속의 나무를 빤히 바라본다. 그러다 이 나무, 소년이 날마다 만나는 나무와 참 닮았다는 생각을 한다. 비록 그림 속에 있는 나무지만 창문 하나 없는 이 갑갑한 방에 나무 그림을 붙여 놓으니 조금이나마 숨이 트이는 것 같다. 그림 속에는 나무가 있고 햇살이 있고 바람이 있다. 가만히 보고 있으니 기분이 좋아진다.

다리도 퉁퉁 붓고 죽도록 피곤한데 잠은 오질 않는다. 하지만 자야 한다. 또 몇 시간 뒤면 일을 나가야 하니. 불을 끄고 누우니 방 안이 캄캄하다. 마치 관 속에 들어와 있는 느낌이다. ‘이 정도 어둠이면 나무도 잠들 수 있지 않을까?’ 하고 나무 생각을 하다가 소년은 총무를 생각한다. 항상 사무실에서 뭔가를 그리는 사람. 지나갈 때 투명한 창으로 얼핏 보면 어떤 때는 꼬마 아이를 또 어떤 때는 코끼리를 또 달을 또 고래를 그리는 총무. 나무가 말하던, 건너편 창문에서 나무와 소년을 뚫어지게 바라본다던 그 사람이 총무일까? 총무이면 어떨까? 하고 생각하다가 총무였음 좋겠다, 까지 생각하자 소년은 고개를 흔든다.

이 년 전 일어났던 ‘그 일’이 떠오른다. 그 아이가 떠오른다. 그리고 ‘그 일’ 이후의 모든 낮과 밤들이 스쳐 지나간다. 소년이 마치 벌레가 된 것 같던 시간들, 쓰레기였고 더러운 구정물이었던 시간들을 떠올리자 바짝 선 수천 개의 젖꼭지들이 온몸에 돋아나듯이 소름이 돋는다. 방 한 칸의 어둠보다 더 깊고 큰 어둠이 소년을 짓눌러 숨이 턱턱 막힌다. 그런데 다시 무언가를 기대하다니. 총무란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또 그 사람의 마음이 어떤지 알지도 못하면서 말이다.

소년은 낮에 잠깐씩 자는 꿈에서조차 언제나 누군가에게 쫓긴다. 알몸으로 그 아이와 뒤엉켜 숨을 할딱이던, 막 절정에 이르려던 순간이었는데 누군가가 손에 식칼을 들고 소년을 쫒아온다. 소년은 발가벗고 울면서 도망친다. 귀두 끝에선 정액이 뚝뚝 떨어진다. 누구냐고, 왜 나를 쫓아와서 괴롭히느냐고 뒤돌아서 묻고 싶지만 마음뿐, 소년의 다리는 멈추지 않는다. 어둠 속엔 아무 것도 보이지 않고 비릿하고 떫은 소년의 정액 냄새만 가득 퍼진다. 

일어나면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어있다. 잠에서 깨고 나면 어쩐지 비참해진다. 아무리 꿈이지만 발가벗고 울면서 뛰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똑똑”

잠깐 잠이 들었다 깬 소년이 눈을 뜬다. 분명 누군가 소년의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 같긴 한데, 그럴 사람이 없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아는 소년은 옆 방 사내가 방귀를 뀐 모양이라고 생각하고 다시 눈을 감는다. 그런데 다시 “똑똑” 소리. 어, 진짜 문 두드리는 소리다.

소년이 방문을 열자 김 씨 아저씨가 서 있다.

“어, 잤는가? 일 나가기 전에 밥 안 먹나? 오늘 고시원 사람들 몇이 모여서 대패삼겹살 먹으러 가는 날인데 자네도 같이 가지. 같이 돈 모아 먹으면 더 싸게 먹을 수 있네. 고기가 얇긴 하지만 그래도 먹을 만하네. 왜? 설마 고기를 싫어하는가?”

소년은 두 눈을 깜빡거리다가 “아니요. 잠깐만요.”하고 옷을 걸치고 나온다.

김 씨 아저씨를 따라 밖으로 나가니 김 씨 아저씨와 함께 막노동을 나가는 아저씨 둘과 중국집에서 배달하는 사내와 돈가스 가게 주방에서 돈가스를 튀기는 사내, 그리고 총무 도련이 서 있다. 소년은 도련과 눈이 마주치자 괜히 쑥스러워 발끝만 내려다본다. 소년도 부르자고 김 씨를 부추긴 건 자신이면서 막상 소년이 나오자 도련도 소년을 제대로 쳐다보지 못하고 돈가스 사내를 쿡쿡 찌르며 장난을 건다.

대패삼겹살. 1인분에 1500원인, 대패로 민 듯이 얇게 썬 싸구려 삼겹살이다. 하도 얇아서 구워 입안에 넣으면 씹히는 맛도 없이 목구멍으로 넘어가지만 그래도 고기인 건 분명하다. 그리고 이렇게 고기 냄새 맡으며 싼값에 고기를 먹을 수 있는 곳을 찾기란 쉽지 않다. 다들 대패삼겹살집 옆에 있는 궁전갈비에 가서 소갈비 원 없이 씹는 게 소원이다. 하지만 누구도 그 말은 입 밖에 내지 않는다.

일을 끝마친 사내들 사이엔 소주가 한잔씩 돌고 아직 일해야 할 도련과 소년은 고기를 바쁘게 입에 넣는다.

어젯밤에 옆 동네 고시원에서 불이 났다. 몇 사람은 형태도 없이 불에 타 죽었고 몇 사람은 불에 타다가 병원으로 옮겨졌다고 한다. 여기 있는 이들 모두 그 소식을 들었지만 이 말 또한 어느 누구도 입 밖에 내지 않는다. 그저 잔을 기울이고 삼겹살을 열심히 넘긴다. 그리고 텔레비전에서 나오는 개그 프로그램을 보면서 낄낄거린다.

“아줌마, 여기 쏘주 빨간 걸로 한 병 더요. 그리고 계란찜 하나만 서비스로 더 주소.”

그렇게 종일 막노동해 육만 원 번 김 씨와 이 씨, 오늘 인력시장에서 일을 못 구해 하루를 날린 오 씨, 온몸에 식용유 냄새 잔뜩 밴 돈가스 사내와 배달 늦었다고 오늘 하루에도 쌍욕을 수십 번은 들은 중국집 배달 사내, 그리고 대패삼겹살을 허겁지겁 먹는 소년과, 그 소년을 훔쳐보며 혼자 웃는 도련의 하루가 저물어 간다.

 

 

“자고 갈래?”

도련의 방에 그림을 구경하러 온 소년에게 도련이 한 말이다. 둘은 빤히 바라보다가 손으로 입을 막고 소리 없이 웃기 시작한다.

소년은 혼자 자기도 좁은 이 방에서 자고 가라는 말을 한 도련이 귀여워서 웃고, 도련은 불쑥 그런 말을 꺼낸 자신이 멋쩍어서 웃는다.

소년은 도련의 침대 위에 눕고 도련은 의자를 책상 위에 올리고 침대 옆 바닥에 눕는다. 도련이 불을 끈다. 하지만 불을 꺼도 방 안은 어둡지 않다. 창 밖 네온사인이 번쩍일 때마다 소년의 얼굴도, 도련의 얼굴도 알록달록한 빛들로 번들거린다.

‘숨 막히게 답답해서 진절머리가 나는 이 방이지만 너랑 함께 있으니까 그래도 이 방이 처음으로 견딜만해. 네가 옆에 있어서 좋다. 정말 좋다.’라는 말을 소년에게 하고 싶지만 도련은 그 말들을 꾹 눌러 담는다. 그리고는 천장 위에 다닥다닥 붙은 별 스티커를 빤히 바라본다. 도련이 오기 전에 이 방에 머물렀던 총무 가운데 한 명이 붙였을, 반짝이지 않는 별 스티커들을 보며 도련은 오랜만에 정말로 반짝이는 별을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오랜만에’라는 말에 갑자기 도련은 목이 멘다. 도련에게는 ‘오랜만에’라는 말을 붙여야 할 것들이 너무도 많다.

‘오랜만에, 오랜만에, 오랜만에…….’

도련이 마음속으로 되뇌다가 자기도 모르게 그 말이 입 밖으로 튀어 나온다.

“오랜만에.”

“응? 뭐라고요?”

소년이 침대 밑으로 고개를 내밀어 도련을 본다. 도련과 소년의 두 눈이 마주치자 소년이 말한다.

“실은 나, 밤엔 잠이 잘 안 와요.”

그러자 도련이 갑자기 침대 위로 올라간다. 그리고는 소년을 꼭 껴안는다. 한 사람이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떨어질 좁은 침대 위에서 도련과 소년이 숨을 죽이고 꼭 안고 있다.

서로를 꼭 안고 있는 두 사람, 그 둘을 품은 로얄고시원, 그 로얄고시원을 품은 둥근 지구가 천천히 돌고 있다. 그 지구에서 수많은 연인들이 서로를 보듬고, 입 맞추고, 사랑을 나누고 있을 것이다. 도련과 소년처럼.

 

 

새벽 두 시. 나무 옆에 소년이, 그 옆에 도련이 서 있다.

첫눈을 꼭 이 나무 옆에서 맞아야 한다고 우기던 소년이 기어이 새벽에 잠자던 도련을 깨워 밖으로 나온 것이다.

소년과 도련은 눈을 맞으며 두 손을 꼭 잡는다. 도련이 장난스럽게 소년에게 입을 맞춘다. 그러자 소년도 꼭 같이 한다. 그렇게 장난치다가 둘은 깊고 깊은 입맞춤을 나눈다. 코끝에 내려앉은 눈은 차갑지만 둘의 혀는 뜨겁다. 도련과 소년이 입을 맞추자 옆에 있던 나무가 맥주를 마시지도 않았는데 갑자기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다. 갑자기 밖으로 뛰쳐나와 둘 다 맨발에 슬리퍼 차림이라 발이 시려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면서도 두 사람은 더 깊고 뜨겁게 입을 맞추고 코를 비비고 서로의 몸을 쓰다듬는다. 그리고 나무의 노랫소리에 맞춰 도련과 소년의 성기가 서로를 향해서 솟아오른다. 나무의 노래를 들으며 도련과 입맞춤을 하던 소년은 생각한다. 사람들이 나무를 왜 가로수(歌路樹)라고 부르는지 이제야 알 것 같다고 말이다.

소년이 키스를 하다 갑자기 뭔가 생각난 듯이 눈을 반짝이며 도련을 조심스레 밀어낸다.

“왜, 왜 그래? 한참 좋았는데.”

“나랑 돌멩이 좀 줍자. 할 일이 생각났어요.”

둘은 키스하다 말고 내리는 눈을 맞으며 돌을 찾기 시작한다.

소년이 주먹만 한 돌을 찾아 손에 쥐고 어딘가를 향해 던진다. 아주 힘껏. “쨍”소리와 함께 나무 옆에 있던 가로등이 깨진다. 하지만 겉의 유리만 깨지고 아직도 불을 밝힌 가로등 전구는 깨지지 않았다. 도련이 소년을 한 번 바라보더니 손에 쥐고 있던 돌로 가로등 전구를 맞힌다. 빗나갔다. 다시 던진다. 빗나간다. 도련은 좀 민망한지 이번엔 있는 힘을 다해 던진다. 드디어 “쨍” 소리와 함께 가로등 전구가 완전히 나가고 가로등 불빛이 꺼졌다. 뜨거운 빛이 사라진 나무 위로 조용히 눈이 쌓인다.

소년이 갑자기 도련을 끌어안는다. 도련은 영문은 모르지만 소년이 좋아하니 소년을 꼭 안고 같이 좋아하는데 갑자기 도련의 핸드폰이 울린다.

“네. 총뭅니다. 아니 늦은 시간에 무슨 일로. 저 지금 잠깐 밖에……, 네? 수도가 터졌다고요? 네. 제가 지금 바로 갈게요.”

도련은 고시원으로 급하게 뛰어가고 소년은 그런 도련을 보다가 나무에게로 간다. 하지만 나무는, 아무···말이···없···다······.

소년은 나무의 마른 몸을 한 번 쓰다듬고는 도련이 있는 로얄고시원으로 뛰어 간다. 수도가 터졌으니 오늘 밤은 자기 글렀다고 생각하면서.

눈이 푹푹 나리는, 깊은 밤이다.


 수상 소감

 

 여기, 사랑에 빠진 두 사람이 있다. 둘은 마음을 나누고 서로를 보듬으며 입 맞추고 사랑을 나눈다. 두 사람은 이 세상 수많은 연인들이 그러하듯 평범한 연애를 한다. 하지만 두 사람이 남성과 여성이 아니라면? 두 사람의 사랑이 이성애자의 사랑이 아닌 순간, 평범했던 연애는 순식간에 ‘비정상적’이고 ‘부도덕한’ 연애로 바뀌어 버린다. 현실에서 성소수자들의 사랑은 이토록 힘들고 어렵다.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감정마저 부정당하고 공격당한다. 성소수자라는 이유만으로 모욕과 멸시를 당하고 차별에 시달린다. 상처 받은 사람들은 자기를 숨기며 고통스럽게 살아가고 때론 목숨을 끊고 이 세상을 등지기도 한다. 나는 비정상적이고 부자연스러운 것은 성소수자들이 아니라 성소수자들을 차별하고 억압하는 이 현실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토록 평범한 연애를 비정상적인 연애로 만드는 현실을 꼬집고 싶었다. 그리고 동성애 차별과 편견을 부추기는 온갖 통념들에 맞서고 싶었다. 동성애자들은 ‘뇌구조가 다르거나’ ‘특이한 사람’들이 아니라 이성애자들과 똑같이 사랑을 하고 이별을 하는 평범한 사람들이라는 것, 내 곁을 지나치는 사람 중에 한 명일 수도 있고 곁에 있는 친구거나 이웃일 수도 있다는 것. 나는 평범한 연애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너무도 자연스럽고 지극히 평범한 동성애자의 사랑 이야기. 그리고 그 사랑의 힘으로 이 정신 나간 자본주의 체제가 만들어낸 온갖 차별과 억압을 부수고 싶었다. 소설 속의 두 주인공은 어둡고 깊은 밤을 날고, 또 날아 결국에는 만난다. 그렇게 희망이 싹트는 걸 노래하고 싶었다.


 작년 여름, 퀴어퍼레이드에 처음 참가했다. 성소수자들의 자긍심 행진을 지지하는 마음으로 참가했는데 생각지도 못한 기쁨과 감동을 맛보았다.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고 세상 밖으로 나온 성소수자들의 자신감에 오히려 내가 더 큰 해방감을 느꼈다. 그리고 함께 연대하는 사람들이 곁에 있으니 성소수자들도 힘을 얻어 더 큰 소리로 더 큰 몸짓으로 자신들의 존재를 알렸다. 그 순간, 무엇도 두려울 게 없었다. 서로 떨어져 있으면 자신감을 잃고 고립감에 쉽게 무너지지만 함께 힘을 모으면 우리는 더 단단해진다. 그동안 성소수자 운동은 동성애자 혐오와 차별에 맞서 열심히 싸워왔고 많은 성과를 얻어냈다. 하지만 반격도 만만치 않다. 지배자들과 보수교계는 힘들게 쌓아올린 성과들을 뒤흔들며 처음으로 되돌리려 한다. 그 시도에 맞서려면 성소수자들과 함께 싸울 더 많은 사람들의 연대가 필요하다. 퀴어퍼레이드 행진을 하며 생각했다.

‘내가 꿈꾸는 평등한 세상은 동성애자 해방의 세상과 맞닿아 있다, 그러니 앞으로 함께 더 열심히 싸워야겠다.’


 육우당의 일곱 번째 친구가 되고 싶었다. 그가 꿈꾸던 동성애자 해방 세상을 위해 함께 싸우고 싶었다. 오래 전 그의 시와 흔적들이 내 마음을 흔들어 놓았듯이 내 이야기가 누군가의 마음을 흔들길 바란다. 아주 조금이라도 흔들려 더 많은 사람들이 육우당의 일곱 번째 친구가 되길 바란다. 그리고 외면하거나 도망치지 말고 혹은 낙원을 꿈꾸며 환상에 숨지 말고, 지금 발 딛고 있는 이곳에서 차별과 억압에 맞서 싸우길 바란다. 

 더 큰 목소리로 더 큰 연대로 성소수자의 존재를 알려야 한다. 더 이상 성적지향 때문에 그 누구도 차별 당하고 상처받거나 아프거나 죽지 말아야 한다. 


 어둡고 깊은 밤을 날아서 여기까지 온 이 소설이 동성애자 해방 세상을 꿈꾸는 사람들에게 닿길 바란다.


- 이은미


육우당 문학상 수상자 인터뷰 - 서울신문

http://media.daum.net/special/5/newsview?newsId=20130423025715301&specialId=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