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대가 너무 컸기 때문일까. 도무지 영화 <쌍화점>은 이해할 수가 없는 그런 ‘이상한’ 영화였다. 영화를 관람한 동성애자들이 입을 모아 불쾌했다고 이야기하는 것을 보면 감독이 밝힌 그대로 <쌍화점>은 결코 동성애를 전면적으로 다룬 이른 바, ‘퀴어영화’는 아닌 듯 하다. 영화는 동성애를 단지 소재로 가져왔을 뿐, 그 안에서 동성애자에 대한 이해를 찾아 볼 수는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한겨레신문에 언급된 ‘멜로드라마 최후의 장애물은 성정체성’이라는 유하 감독의 표현은 절로 고개를 갸웃거리게 한다. 게다가 이것은 단지 동성애자 관객들만 느끼는 감정은 아닌 것 같다. 변심한 애인 홍림을 슬픈 눈으로 기다리는 왕이 화면에 등장할 때마다 객석 여기저기서 웃음이 터져 나왔던 것을 보면.


 영화<쌍화점>은 절대 권력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동성애자인 왕은 36명의 미소년으로 구성된 친위대를 두고, 건룡위라고 이름 붙인다. 영화는 첫 장면에서부터 사랑하는 사람과 왕에게서 도망치려한 한 소년의 처리 문제를 둘러싼 갈등을 보여줌으로써, 이들 건룡위가 왕의 절대권력 아래서 성적자기결정권을 박탈당하고 얼마나 억압적인 상황에 놓여있는지를 보여준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왕 이외에는 성경험이 전혀 없는 홍림이란 인물은 자신의 정체성을 고민하거나 진지하게 생각해 볼 기회조차 차단당한 채, 왕과의 잠자리를 이어나간다. 마치 동성애자들이 이 사회의 성적 억압 속에서, 정체성을 고민할 기회조차 박탈당한 채, 이성애자로서 살아가기를 강요받는 것과 닮아있는 상황이라 볼 수 있다. 단지 권력을 가진 가해자가 동성애자인 왕이고, 그 안에 희생양이 되는 사람들이 이성애자들이 되는 위치이동이 일어났을 뿐이다. 역지사지의 문제의식이 드러나는 순간이다. 그러나 영화 <쌍화점>은 운 나쁘게도 이러한 신선하고 발칙한 문제의식을 끝까지 힘 있게 끌고나가지 못한다. 


 비극은 왕이 자신이 사랑하는 홍림을 부인인 노국공주와 동침시켜 후사를 얻고자 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한다. 왕은 영화 속에서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을 닮은 아이를 후사로 얻고 싶어서라고 항변하고 있지만, 권력을 지키기 위한 그의 비인간적 처세가 화면을 압도하고 있었기 때문에 아무도 왕의 사랑에 공감하지 못하게 되는 비극이 시작되고만 것이다. 아무리 잘 봐준대도, 홍림에 대한 왕의 사랑은 권력욕을 뛰어넘지 못하는 내면적 갈등의 수준에 머물러 있는 것으로 보인다. 성정체성을 뛰어넘는 사랑이 권력에 대한 욕망을 뛰어넘지 못하는 것은 참으로 이상하게만 보일 뿐이다.


 왕의 이러한 권력에 대한 집착 아래, 왕비와 관계를 가진 후 이성에 눈뜨기 시작한 홍림은 몸 가는 데 마음 간다는 명제를 몸소 보여주는 인물로 그려진다. 그가 왕과 왕비 사이에서 생겨나는 감정적 갈등을 가볍게 뒤로 하고, 오직 육체에 대한 욕망을 떨치지 못한 채 왕비에게 빠져드는 모습은 이제껏 충성심으로 왕과 잠자리를 해왔으나 왕을 사랑해오지는 않았다는 것을 분명하게 알 수 있게 한다. 이후, 영화 속 홍림은 왕의 육체나 사랑에 대한 일말의 그리움도 드러내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으로 이러한 믿음에 확신을 더한다. 다시 말해서, 홍림은 남성성을 거세당했던 한 소년이었을 뿐, 한때 왕을 사랑했고 이어 왕비도 사랑하게 되는 양성애자로 보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는 행보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때문에 영화의 마지막에 가서 ‘나를 한번이라도 사랑한 적이 있느냐’는 왕의 비장한 물음에 ‘한번도 없다’고 대답하는 홍림의 대사가 슬프고 가슴 아리게 느껴지기보다는 정말 단 한번도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마저 들게 만들고 말았다.


 한편, 왕의 절대 권력의 공간을 벗어나려는 홍림과 왕비의 급박하고 스릴 넘치는 시도들은 영화의 곳곳에서 드러난다. 서로의 금지된 육체를 거부하지 못하고 왕의 권력을 피해 숨어드는 두 사람의 모습은 동성애자로서 공감할 만한 부분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성적 억압은 때로 몸이 먼저이고, 후에 마음이 뒤따르게 되는 기묘한 경험을 제공하기도 하는 것이다. 이러한 관계는 어쩌면 매우 자연스러울 수 있다고도 생각한다. 그러나 영화 속에 일곱 차례나 등장한다는 정사신은 이들의 관계가 단지 육체에만 머물러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스러울 만큼 긴장감이 없었고 지루했다. 왕과 홍림의 동성정사신이 동성애자인 내가 보기에도 징그럽게 느껴졌던 것에 비하면 조금 나은 상황일지도 모르겠으나 ‘쟤들 또 하나?’하는 물음이 머릿속에 스쳤던 것을 보면 별로 공감 안 되는 정사들이었던 것만은 확실한 것 같다. 항간에 기사화되어 떠도는 조인성 엉덩이에 대한 입소문조차 별 볼일 없다고 느껴졌으니까 더 할 말이 없다. 


                                             * 사진출처 _ 영화 <쌍화점> 홈페이지


 앞서 말했듯, 영화<쌍화점>은 절대 권력에 대한 영화다. 왕의 절대 권력은 점점 폭력으로 변해가고, 광기를 동반한 그의 독재와 소통 없는 강요는 점점 그 포악한 이빨을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이러한 권력의 문제는 현대의 한국으로 옮겨왔을 때 생각해볼 지점이 많은 것 같다. 알아선 안 되는 비밀을 알게 된 이들을 모두 제거하고, 반대하는 목소리는 찍어 누르는 영화 속 왕의 일련의 행동들은 절대 권력의 속성에 대해 설명한다. 이와 같은 왕의 모습에서 우리는 우리 시대의 독재자들의 모습이 모자이크되어 떠오르는 것을 본다. 그리고 영화는 그러한 권력이 가지는 대표적 속성인 일방적 강요가 불러오는 비극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볼 기회를 가져다준다.  

 그러나 이 모든 해석의 지점들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 동성애자로서 불쾌하다. 역사 안에서 동성애자들은 한번도 주류였던 적이 없었다. 설사 그가 왕이라는 신분을 가지고 있었다할지라도, 역사는 그들을 한번도 한사람의 인격체로서,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제대로 평가했던 적은 없었다. 이것은 동성애자들이 단 한번도 주류였던 적이 없었음을 반증하는 사실이다. 그러나 한국 메이저 영화에서 동성애는 <왕의 남자>에서처럼 절대 권력을 가진 폭군이나, 이 영화에서처럼 사랑과 권력에 눈이 멀어 이성마저 마비된 왕의 이미지로만 그려지고 있다. 이것은 영화가 어떤 의도를 가지고 만들어졌든, 간과할 수 없는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남근중심주의에서 벗어난 멜로를 만들고 싶었단 유하 감독의 말이 무색할 정도로 동성애자를 향한 감독의 시선은 이 영화에서 결코 올바르지 않다. 오히려 <쌍화점>에 등장한 왕은 감독의 무의식적인 호모포비아의 발현에 가깝다고 느껴진다. 대다수의 이성애자 관객들은 아마도 이 영화의 숨은 의미에 대해 생각하기보다는 동성애자들이 사회 전반에 등장하게 되었을 때 ‘발생할 리가 없는’ 얼토당토않은 혼란에 강조점을 찍을 수도 있을 법하다. 동성애를 홍림에게 ‘전염’시키고, 그것도 모자라 사랑한다며 동성애를 강요하는 왕의 모습은 이 사회의 호모포비아들이 흔히 동성애자들에 대해 오해하는 알레르기 반응들 중 하나이니까.


 기회가 허락한다면, 유하 감독이 역사 속으로 사라져간 민중들 속에 언제나 존재하였으며, 온갖 차별과 억압을 이겨내며 역사의 뒤안길에서 묵묵히 제 인생을 살아내었던, 진짜 성소수자들의 모습을 이해하고 그들의 서러운 삶을 따뜻한 시선으로 끌어안는 영화를 다시 만들어 주었으면 한다. 그런 것을 바라는 것은 너무 무리한 기대일까. 그것이 너무 무리한 기대라면, 다음부터는 동성애를 그저 상업적 흥미를 불러일으키는 소재의 하나로서 차용하지는 말아주었으면 한다. 그렇게 조롱당하기엔 이 사회에서의 우리의 삶이 너무나 버겁고 외롭고 고통스럽다.




해와 _ 동성애자인권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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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02.10 11:58 신고 [Edit/Del] [Reply]
    글에 쓰인 것처럼 홍림은 왕과 함께 동침하다가 하루 아침에 왕의 명령으로 왕후와 동침하게 되는데 이는 홍림이 왕에 대한 애정은 군신으로써의 애정 이상의 것이 아니라는, 즉 홍림은 게이가 아니라는 것에 대한 반증입니다. 진짜 게이는 왕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는 홍림과 왕후 관계에 대한 질투 때문에 처음부터 끝까지 복수의 칼날을 거두지 않는 불같은 인물로 등장합니다. 왕후 역할은 꿔다놓은 감이 없지 않지만 어쨌든 지배국의 여인이라는 위치 때문에 근근이 존중받는 캐릭터인데 어쨌든 그녀도 홍림을 간절히 원하게 되면서 <쌍화점>은 세 남녀의 삼각관계 이야기에 인간의 포악함이 관계를 얼마나 망쳐놓을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휴먼드라마입니다. 거기에 멜로성향이 약간 묻어있는.

    단지 잘생기고 몸 좋은(뭐 조인성의 몸이 좋다고 말하기엔 어패가 있다고.. 보면서 생각했지만서도 므흣..) 배우들과 건룡위 꽃미남들의 등장으로 퀴어 운운하는데 제가 볼 땐 전혀 퀴어스럽지도 않고 퀴어라는 이름을 갖다붙이기에는 좀 미안한 전개였습니다. 완벽한 일반 멜로드라마일 뿐, 남자가 남자를 사랑하는 이야기는 없는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왕이 홍림을 사랑하는 것이 유일한 퀴어라인인데 이것 역시 파괴에 초점이 맞춰져 있기 때문에 사랑이야기는 희석된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남 배우의 엉덩이나 혀놀림과 같은 흥행 요인 때문에, <색, 계>앞에 명함도 못내밀 자세들이지만 그래도 우리나라에서 거의 찾아볼 수 없는 식스티나인이나 뭐 그런 것 때문에 퀴어가 어쩌네 파격이 어쩌네 하는 게 좀 같잖아 보입니다. 혀 낼름이나 수없이 등장하는 정사장면은 반복에 지루할 뿐 감정을 끌어내지도 못할 뿐더러 그 와중에 격분하는 왕에게 이입하자니 이건 또 너무 관객에게 많은 동요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극단적이라는 게, 포장이라는 게 전부가 아닐텐데. 이 영화는 너무 많이 포장되어 있고 알맹이는 너무 작은 작품입니다. 김대우 감독이 만들었다면 좀 달랐을텐데.

    왕이 마지막 질문도 홍림이 왕을 남자로 바라본 적이 없다는 것이 드러난 상황이기 때문에 약간 미련한 질문이지만 거기에 솔직하게 대답하고 나중에 속았음을 안 홍림의 눈동자가 흔들리는 것도 조금은 애매하다고 느낄 수 있죠..
    • 해와
      2009.02.11 01:51 신고 [Edit/Del]
      정말 그렇죠? 개인적으로 주진모의 연기는 좋았지만 시나리오 자체에 헛점도 많고, 성소수자에 대한 이해도 거의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언제쯤이면, 브로크백 마운틴처럼 괜찮은 메이저 퀴어영화를 한국에서도 만들 수 있게 될까요.
      지나치게 우울하거나, 억지로 밝게 만든 퀴어영화가 아닌 실제 우리의 모습이 담긴 작품들이 나와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어떤 작품 단 하나에는 세상을 바꿀 힘은 없겠지만, 각각의 작품 그 자체가 하나의 사회 의식의 반영이고 바뀌어 갈 미래 그 자체라고 저는 믿습니다. 때문에, 좋은 퀴어 작품들이 많이 등장하는 것은 미래를 바꾸는 일이 될 수도 있겠죠. 때문에 저에게는 좋은 퀴어작품이 많이 등장하는 것이 매우 소중하게만 느껴지네요. 웹진에 자주 들러서 좋은 의견 많이 주세요.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2. Joga
    2009.02.11 14:49 신고 [Edit/Del] [Reply]
    퀴어의 삶을 다룬 영화/드라마/다큐멘터리들에 대해 더 많이 알고 소개하고 소개 받고 싶어요.
    우리나라는 이 분야에 거의 문외한이나 다름 없다고 생각합니다. 김조광수 감독님이나 이송희일 감독님이 이제 막 시작 하신 단계라고나 할까.
    • 해와
      2009.02.11 17:47 신고 [Edit/Del]
      저는 개인적으로 마이클 커닝햄의 소설들을 좋아합니다. 많이 읽어 본 것은 아니지만요. 디아워스나 세상 끝의 집 같은 경우는 영화로도 제작되어서 감명깊게 봤는데요.
      아, 그리구 요즘 자나,돈트 라는 동성애가 정상인 세상을 다룬 뮤지컬이 공연중이래요. 기회가 되면 보러 가고 싶군요. 그리구, 최근에 코퍼스크리스티라는 연극에 대해 알게 되었는데 예수가 동성애자로 환생하여 구원하러 온다는 내용을 다뤘다가 미국보수기독교 세력에게 폭탄테러 위협까지 받았었대요.재밌죠?ㅋ 우리나라에서 공연은 불가능할 것 같고, 원문을 구할 수 있다면 개인적으로 한번 보고 싶네요.^^ 우리도 이제 시작하는 단계니까 조만간 훌륭한 작품들이 쏟아져 나오지 않을까 기대해봅니다. 안나오면 제가 쓰려구요 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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