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성애코드, 양날의 작두를 타다.
약속시간까지는 시간이 많이 남을 듯 하여 충무로에서 영화를 보기로 했다. 다른 건 별로 당기는 게 없어 <앤티크>를 선택했다. 달리 볼 것도 없었지만, 일단은 안구정화가 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에서. 기왕에 혼자 보는 거 눈으로 ‘떼박’타는 기분(!)으로 표를 끊었다고 하면 불쌍하게 들릴까?
몸소 극장에서 겪어본 바, <앤티크>를 보려는 극장의 관객은 십중팔구 소수의 이성커플과 대다수의 여성들이었다. 연신 ‘토 나온다.’ 면서 눈을 떼지 못하는 변태 같은 커플들, ○○가 게이였더라는 이야기, 눈은 영화를 보면서도 입으로는 영화와는 전혀 상관없는 기타 등등의 ‘이쪽’과 관련된 수다한 얘기들을 늘어놓으며 몰입을 방해하는 뒷자리의 무리들.
재미있는 건 집에 와서 이반시티 게시판을 확인해보니 여성관객들은 영화를 보러 온 남자커플들을 백이면 백 게이라고 하더라는 이야기였다. (그 와중에는 ‘이쪽’ 관객들이 영화를 보다가 남자끼리 보러온 듯한 무리들을 봤는데, 누가 맘에 들었더라는 ‘사람 찾기’ 식 글들도 있었지만.) 이것저것 검색해보니 ‘이쪽’에 관련된 연예인들의 얘기들이 수두룩하다.
-11월 15일
요즘 한국사회에는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이성애적 규범에 반기를 들고 나오는듯한 작품들이 쏟아져 나온다. 역사 속의 신윤복이 드라마에서 여성으로 ‘둔갑’(!)하는가 하면, 동성애적 향취가 물씬 풍기는 영화들 또한 절찬리 상영 중에 있다. 예전처럼 그렇게 무겁지도, 그렇게 키치스럽거나 캠프적인 색을 한껏 머금어 부담스럽지 않고 가볍게 다가갈 수 있는 작품들 위주라는 점도 흥미롭다.
<넘쳐난다…쩝…넘쳐나나?>
그와 관련해 문득 떠오른 건 얼마 전 다음 메인에서 접한 ‘금기를 깨는 작품들이 쏟아진다.’라는 기사의 표제- 나의 시기상조적 착각일 수도 있겠지만, 이만큼이나 차려놨는데 금기 어쩌고 하는 건 괜한 호들갑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시청률과 흥행을 노린 카드인지, 성소수자의식에 있어 제작진들이 한차례 각성한건지 아직은 모르겠지만, 그것들이 지금 시선을 집중시키며 나름대로 선전하고 있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해 보였으니까.
넘쳐나는 동성애코드는 작품의 틀을 넘어 이젠 일상의 대화와 연예인들의 인터뷰, 토크쇼 게스트의 수다스런 일화의 소재들로까지 이어진다.
가령 본인이 옷을 갈아입는데 불쑥 게이가 들어와 치근덕대니 ‘까고 싶었다.’ 고 말한 탑가수의 에피소드. 배역 연구를 위해 게이 바에 갔다가 대시를 받아봤다는 우스갯소리. 아니면 동성애 연기에 몰입하면 할수록 자기가 이성애자임을 깨닫게 되었다는 자기반성(?)적인 이야기. 동서고금에 정체성까지 막론하고 소문의 바이블로 통하는 ‘♡♡가 게이다’라는 정보까지도.
이런 종류의 이야기들이 썩 유쾌하게 들리지는 않지만, 굳이 개인적인 생각과 발언을 일일이 공론화시키면서 걸고넘어질 필요는 없어 보인다. 더구나 이들의 생각을 여과 없이 이 사회의 성소수자 지표로 볼 여지 또한 없다. 그들이 모두의 의사를 대변하지는 않을 것이기에. 성소수자들의 사활이 달린 공적인 문제를 담고 있는 것이 아니라면, 개인마다 동성애를 받아들이는 온도차가 다르다는걸 깨닫고 ‘그건 당신들 취향의 문제에욧.’ 이라고 얘기할 수도 있을 테니까. 이면에 정치적이고 권력적인 수많은 요소들이 연루되어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동성애에 대한 사람들의 입장은 무엇이 되었건 당신들의 자유라고 하는 편이 옳을 것이다.
(하지만 취향의 연장선상에서, 그들은 자기 발언들에 대한 얼마만큼의 후폭풍(?)을 감수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동성애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듯 하다가도 결정적으로 선을 그어버리는 이중적 잣대의 과잉에 대해 우리는 그들이 오히려 제살만 깎아먹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얼마든지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저들 중 누구는 자신의 정체성을 숨기기 위해 괜히 오버하여 ‘연막’을 치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추측을 가지며 얼마든지 뒷담화를 나눌 수도 있는 노릇이다.)
하지만 최근에 접할 수 있었던 위와 같은 이야기들에는 걸고넘어질 법한 공통점이 발견된다. 이전보다 거론되는 빈도수가 높아진 데다 정도에 있어서도 훨씬 가벼워진 ‘동성애’라는 단어 사용,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성애자와의 접촉이나 경험들이 무슨 색다른 경험이라도 되듯, 혹은 가십거리이기나 한 것 마냥 포장되는 경향들. 자기들과는 관련된 바 없다는 식으로, 더불어 앞으로는 ‘그들’을 조심하라는 우스갯소리로 갈무리되는 분위기 까지-
동성애자를 연기하는 배우, 동성애자와 관련된 경험이 있었던 연예인, 누군가가 게이라는 소문들은 수두룩한데, 정작 동성애자들의 모습은 그들의 입담과 소문에 묻혀버리거나 왜곡되어 버리니 개인 취향이라고 치부하고 호박씨만 까먹기엔 어딘지 심기가 불편하다.
기실 동성애자의 존재가 사회에 관용적으로 수용되고, 매체의 양적 증가 뿐 아니라 질적 변화가 시도되는 작품들이 속속 등장하는 요즘의 경향은 가히 고무적이랄 수도 있겠다. 이제 동성애에 대한 터부와 금기의 분위기는 존재의 무거움을 거둬내고 당당히 매력적인 일상의 소재들로 전환되었으니까- 더 이상 어린시절의 상처, 동성애자가 ‘될’ 수밖에 없던 심적 충격 같은 이야기들은 적어도 작품 속 그들 인생에 짐이 되지 않는다. 무겁고 슬프기만 했던 동성애자는 이제 한층 넓어진 동성애코드의 스펙트럼 아래 생기발랄한 모습으로 거듭난다. 여기저기서 동성애자들이 튀어나와 끼를 발산하니 주위의 반응 또한 이전과 같지 않다. 혐오와 거부의 저기압전선은 작품의 섬세한 감정선에, 또는 꽃미남 배우들의 훈훈함에 무장해제 된다. 영화와 드라마, 토크쇼, 개그프로나 UCC 등 장르를 망라하고 등장하는 동성애코드 덕에 대중들은 거부에 대한 내성이 생긴 것도 같다. 이렇게 동성애코드에 대한 최근의 인상은 이런저런 경로들을 통해 일상의 현실로서 받아들여지거나 가벼운 유머소재로, 타인의 취향 문제 정도로 순화되는 데 까지 온 것처럼 보인다.
한층 가벼워진 분위기 속에 동성애 코드는 이제 소비자들의 입맛을 고려하며 어떤 포장지를 입고 나올지를 고민하고 있다. 살짝 나사 빠진 동성애/이성애의 이분법적 단절의 빈틈을 통해 쏟아져 나와 예쁘게 포장되고 진열되면 금기 따위는 대수롭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동성애에 대한 일련의 미화들이 기존의 차별적인 구분을 완전히 뿌리 뽑지는 못한다. 취향에 있어 동성애가 갖는 취약성이라고 해야 할까. 여전히 그것은 조롱의 대상으로, 타인의 특별한 취향으로 좌우되며 시선을 모으고 있다. 허용된 금기의 주변문화는 제 차별기제를 드러내기도 이전에 가벼운 ‘특이체질’ 정도로 취급되고, 종지에는 ‘인간애’라는 보편적 휴머니티로 뭉뚱그려지는 어색한 감동의 도가니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된다.
취향의 문제 한편에는 사회문화적 차원의 우려와 비판들이 제기된다. 가령 ‘메이저급’ 영화와 드라마에서 동성애코드가 꽃미남 판타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나, 또는 시장주의 전략에 동성애가 편승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들이 그것이다. 이는 성소수자 인권을 논하기도 전에 이미 상품으로 포장되고, 좋은 작품들이 나와도 다른 측면으로만 부각되거나 묻혀버리기 쉬운 동성애코드의 현상들을 아우른다. 이들을 감수성에 앞선 자본의 힘이라고 한다면 또 한번 슬프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동성애코드를 둘러싼 개인적 취향의 문제와 사회의 비판점은 동성애코드의 이중적 속성으로 묶어낼 수 있을 듯 하다. 보다 일상에 가깝게 다가온 동성애코드의 취향과 성소수자에 대한 몰이해적인 인식 사이에 존재하는 불일치는 개인과 사회를 막론하고 차별과 향유가 동시에 가능한 다소 변태적인 상황들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렇다면, 취향의 이중적 성격에 대해 정작 당사자인 우리는(성소수자들은) 어떻게 접근해야 할까. 당장에 그들의 인식을 깨기 위한 행동에 대해 계획이라도 세워야 하는 걸까?
하지만 앞에도 말했듯 사회제도적 문제와 달리 취향은 일차적으로 개인의 문제이다. 더불어 그것은 제도와 체제변화를 요구하는 대사회적 투쟁과는 조금 다른 성격을 갖는다. 개인들에겐 필연적으로 사회의식이 반영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사회 규범적 변화가 곧바로 개인의 인식 변화를 동반한다고 확신할 수는 없다. 또한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그들의 취향을 일일이 지적하고 뜯어고치는 것이 능사는 아닐 것이다.
거꾸로 우리는 동성애자로서, 성소수자로서 우리 자신의 관점을 어떻게 만들어 나갈 것인지를 자문해볼 수 있다. 뜬구름 같은 이야기들에 함몰된 소문 밖의 동성애자들 자신이(혹은 드러나지 않은 채 여전히 소외받고 있는 성소수자 자신들이) 세상에 소통하기 위해 어떤 위치를 가져야 할 것인지, 나아가 소위 ‘부적절한’ 것을 향유하는 그들의 부적절한 취향에 대해 어떤 전략으로 자신의 존재를 효과적으로 드러낼 것인지의 문제는 보다 넓은 범주로서의 성소수자 운동의 현행과제를 시사하는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부적절한’ 것에 대한 그들의 취향에 동성애자로서, 성소수자로서 우리들은 어떤 전략을 구사할 수 있을까?
생각이 짧은 탓에 확실한 대답을 내놓지는 못하겠다. 주변 사람들과 얘기하면서 내 생각을 설득시키는 것만으로는 턱도 없을 것이고. 최근의 거슬렸던 장면들에 맞불이라도 놓듯 성소수자를 지지하는 연예인을 만나 인터뷰해서 잡지나 언론에 올려볼까? (…올려줄까?) 방송 관계자들이나 연예인들에게 자료집들을 만들어 배포하거나, 그들을 모아놓고 성소수자주제로 강의라도 하는 건 어떨까. (…하면 사람들이 올까?) 아님 작가나 연출자들을 방송국에 하나씩 심어놓거나, 유수의 포털 사이트에 접선을 해보는 건…전국의 이반들이 거국적으로 일어나 리플전쟁에 동참하는 건…. 당장의 생각들을 여기에 소개하자니 말할수록 부끄러워지니까, 일단은 이만큼만.
혼자 생각하면 유치하기 그지없지만, 머리를 맞대면 얼마든지 멋진 기획들이 만들어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지금도 그런 기획들이 여기저기서 논의되고 시도 중에 있으리라. 그들에게 지지와 관심을 표시하며, 우리도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얘기해보자.
웅 _ 동성애자인권연대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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