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인련 웹진 "너, 나, 우리 '랑'" 9월호
- ‘벅차다’는 말의 의미재구성
소위 이 바닥에 나와 살아가고 있는 이반들이라면 누구나 ‘벅차다’는 말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는 익히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어쩌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 이런 말을 듣고 있을 수도 있고, 한번쯤은 누군가를 향해 “그 년, 벅차.”하며 일갈하는 짓을 해보았음직도 하다. 돌이켜보건대, 나 역시 이 ‘벅차다’는 말의 굴레 앞에서 자유롭지는 않았다. 그만큼 이 ‘벅차다’는 이반용어는 널리 사용되고 있고, 실제로 우리 곁은 벅찬 이들로 가득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도대체 우리가 아무런 거리낌 없이 사용하고 있는 이 질펀한 형용사는 어디에서부터 출발한 것일까. 문득 그것이 궁금해져서 그 연원을 알아보기로 했다. 국립국어원의 표준국어대사전에 의하면, ‘벅차다’는 말의 원래 의미는 크게 세 가지로 정의되는 것을 알 수 있다. 어떤 것을 대하기가 몹시 감당하기 어려운 상태를 일컫는 것이 그 첫 번째 의미이며, 기쁨이나 희망, 감격 따위가 넘칠 듯 가득한 것이 그 두 번째 의미다. 마지막 세 번째는 숨이 견디기 힘들만큼 매우 가쁜 상태를 말한다.
위의 세 가지 정의를 모두 고려해 보건대, 우리가 누군가를 향해 ‘벅차다’고 평가할 때는 대부분의 경우 부정적인 상황에서 발화되므로 첫 번째의 ‘대하기가 몹시 감당하기 어려운 상태’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겠다. 그러니까 우리가 말하는 ‘벅찬 사람’이란 사전적 의미에서 살펴보았을 때, ‘몹시 감당하기 어려운 사람’을 말한다고 할 수 있다. 누가 처음 이런 말을 만들어 내어 사용하기 시작하였는지는 모르겠지만, 바람기가 충만하거나 성적으로 문란한 상태를 말하는 이반 커뮤니티 내에서의 실제적 의미를 생각해보면 그 오묘한 쓰임새에 적잖이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이를테면, 파트너가 자주 바뀌고 성관계 횟수가 많은 이들은 감당하기 어렵다는 말이 되는 것이다. 사실 파트너와 진지하고 오랜 관계를 유지하길 원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아 상처받는 일이 비일비재한 커뮤니티 내에서 이런 용어가 쓰인다는 것은 백번 이해되고도 남는 일이다. 어떤 측면에서는 이 말이 안쓰럽고 안타까운 이반들의 현실을 투영하고 있는 것 같아 서글퍼지기도 한다.
하지만 제아무리 그렇대도, 벅차다는 말, 이대로 사용해도 좋은 것일까. 이 시점에서 우리는 ‘벅차다’는 말의 의미를 다시 한번 곰곰이 따져 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과연 우리가 ‘벅차다’는 말로 우리끼리 손가락질하고 소외시킬 필요가 있는 것일까?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보자. 가벼운 만남과 반복적인 헤어짐 앞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다고 자부할 수 있는 이반이 그렇게나 많을까? 어쩌면 벅차다고 욕하는 그 손가락이 나 자신을 향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만일 우리 대부분이 그러한 표피적인 만남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고 한다면, 그것은 우리들이 태어날 때부터 그렇게 생겨먹은 문란한 것들이기 때문일까?
어쩌면 우리들은 한사람도 빠짐없이 ‘벅차다’는 평가 앞에서 자유로울 수 없을지도 모른다. 사회에서 말하는 소위 ‘정상적인 관계’ 안에 속해 있지 않은 우리 이반들은, 커뮤니티 밖에서 보면 존재자체로 ‘제대로 벅찬 인간들’이다. 이 사회에서 결혼이라는 제도로 묶여 있지 않은 관계에서 갖는 모든 성적인 관계들은 ‘일반적으로’ 허용된 관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결혼 이외의 성적인 관계를 갖는 사람들은 일반, 이반을 떠나 모두 ‘벅찬 것들’이 되는 셈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성애자들 역시 동거나 혼전임신에 대해 그렇게나 말도 많고 탈도 많은 것 아니겠는가. 이 사회 안에서 누군가 자신의 성적인 자유를 공공연히 말하고 다니는 사람이 있다고 하자. 그에게 성적으로 문란하다는 여지없는 평가가 떨어지게 되는 상황은 별로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하물며 그토록 ‘오랫동안’ ‘야무지게’ 공격받아왔던 이반들에 대해서는 어떻겠는가.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사회의 ‘일반적’ 기준으로 우리 스스로에게 ‘벅차다’는 비난의 돌팔매질을 하는 것은 그다지 현명한 일로 생각되지 않는다. 납득이 가질 않는다면 길거리로 나서 ‘나는 동성애자이지만 평생 조신하게 신부수업하며 살았다’고 강변해 보라. 아무도 알아주는 이 없을뿐더러 그런다고 해서 이반들을 향한 사회의 차별적 시선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또한, 제도적으로 묶일 수 없는 한국 이반들의 현실에서 오로지 한사람의 낭군님, 혹은 마누라만을 위해 평생을 수절하는 일은 일어나기가 힘들기 때문에 우린 그 기준을 따라갈 수조차 없다.(물론 이건 제도적으로 묶일 수 있는 일반들도 마찬가지다.) 다시 말해서, 사회의 ‘일반적’ 기준을 맹목적으로 따라가는 한 우리는 계속해서 스스로를 공격해야만 하거나, 아니면 사회로부터 영원히 공격받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사실 우리가 진지한 관계를 오랫동안 맺지 못하고, 떠나는 애인의 바짓가랑이라도 붙들고 늘어지고 싶어지는 안타까운 상황을 일상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은 결코 우리들 스스로의 탓이 아니다. 우리는 언제나 달콤쌉싸름한 로맨스를 원하고, 장밋빛 사랑이 우리 눈앞에 영원히 펼쳐지길 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정당한 꿈이 이루어지지 않는 까닭은 무엇일까? 그것은 이 사회의 구조적인 차별 때문이다.
만약 우리에게 차별이 없다면, 종로 뒷골목에서 그저 한번 만났을 뿐인 사람의 적극적인 구애에 마음을 빼앗겨, 몸을 허락하고, 한달도 안 되어 깨지는 일이 그렇게나 자주 일어날까? 우리가 만약 이반이라는 사실을 숨기지 않아도 되는 상황이라면, 이성애자들처럼 생활 속에서 상대의 취향과 성격, 인간적 됨됨이등을 종합적으로 판단하고 진정으로 좋아하게 되었을 때, 관계를 시작해도 늦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굳이 찜질방이나 번개를 전전하면서 사람 냄새를 맡기 위해 방황하는 일도 현저히 줄어들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또한 만약, 우리가 사회 속에서 스스럼없이 당당한 커플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면 과연 어땠을까. 부모와 친구들에게 ‘이 사람, 내 애인이에요.’하고 우아하게 나설 수 있는 분위기가 조성되어 있었다면, 마치 불륜을 저지르고 있는 듯한 기분 더러운 사회적 압박감과, 불안정한 관계에 대한 개인적 불안감 따위가 우리를 이토록 괴롭혔을까.
우리에게 닥쳐오는 일련의 불안한 감정들과 갖가지 사회적 상황들은 서로 상호작용한다. 그 상호작용의 결과물은 사랑의 과정에서 있을 수 있는 위기의 순간마다 우리로 하여금 관계를 쉽게 포기하게 한다. 그리고 그런 식의 ‘관계의 포기’는 차별이 존재하는 한 여지없이 반복된다. 그런 경험의 반복들이 자신을 포함한 이반전체에 대한 불신으로 옮아가면서, ‘이반 것들은 원래 다 벅차’라고 신세한탄하며 가슴을 부여잡게 되는 일들이 발생하는 것이다. 그쯤 되면, 데뷔할 때 꿈꾸었던 이반으로서의 건강한 미래나 삶의 의미 따위는 애저녁에 종로 어딘가에서 술 한잔과 함께 잃어버린 지 오래다. 그러다보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 잘 모르는 사람들과의 의미 없는 섹스만을 반복하면서 ‘진짜 사랑은 없다’고 입버릇처럼 말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이글을 읽는 지금 이 순간, 또다시 누군가는 운명의 희생양이 된다. ‘이렇게 우겨봐야 천성이 벅찬 것들이지.’라고 은연중에 의심하고 있는, 바로 당신으로 인해.
우리는 결국, 서로가 서로에게, 관계를 오래 맺기 힘든 사람들이고, 믿을 수 없는 사람들이며, 언젠가는 떠날 ‘벅찬’ 사람들이다. 그 때문에 우리는 서로를 조금씩 깔보기도 하고, 또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누구나 예외 없이 외롭다. 과연 우리는 이런 우리의 암울한 자화상을 향해 ‘벅차다’고 손가락질해야 하나? 아니면, 사랑하는 사람조차 남들에게 자랑스럽게 이야기하지 못하게 하는 이 사회에 대해 분노해야 하나?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우리는 사회를 향해 동성애자차별반대만을 외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정체성을 떠난 좀더 넓은 범위에 걸쳐 성적인 자유를 돌려달라고 외쳐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정상적인 관계라는 틀 안에 묶여서 순결을 강조하고, 조신한 생활을 영위해 나가는 사람들을 찬미하면서 ‘벅찬 이’들을 향해 비난을 퍼붓는 것으로는 진정한 로맨스와 참된 의미의 자유를 얻을 수가 없다. 물론 한사람을 향한 끝없는 열정과, 아낌없는 희생, 때로는 미움, 어쩌면 안타까움, 가끔씩 슬픔, 언제나 따뜻함과 이해의 감정을 갖는 것은 매우 자연스럽고 권장할만한 연애 태도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런 기회에 놓여 있지 않은 다양한 사람들의 사적인 영역에 대해, 하나의 기준으로 맘대로 손가락질해도 좋은 것은 아니다. 우리 모두가 한사람도 소외되지 않고 참된 의미의 자유를 얻기 위해서는 이런 것도 사랑이고, 저런 것도 사랑이라는 너그러운 이해와 관용의 태도가 필요하다고 믿는다.
여기서 우리는 처음의 ‘벅차다’의 사전적 의미로 다시 한번 돌아갈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앞서 언급했듯, ‘벅차다’의 그 두 번째 의미는 기쁨, 희망, 감격 따위가 넘칠 듯이 가득한 상태를 말한다. 우리는 이제부터 ‘벅차다’는 말을 사용할 때, 좀더 적극적으로 이 두 번째 의미를 상기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종로, 혹은 홍대 어디쯤에서 마주치게 되는 이른 바 ‘벅찬’ 이들을 볼 때면, ‘아, 저 사람은 진정한 사랑을 찾느라 가슴이 벅차올라 있구나.’ 하고 생각할 준비를 이제부터라도 해두는 것은 어떨까. 지금까지와는 완전히 다른 의미에서 우리 사회의 ‘벅찬 년’들을 향해 미소를 띄워줄 준비를, 우리 모두가 해두는 것은 우리 생각보다 우리 자신에게 큰 변화를 가져다줄지도 모른다.
해와 _ 동성애자인권연대 걸음[거:름] 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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