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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성인 활동/활동 후기

"차별과 혐오를 조장하는 의견광고 게재, 이대로 좋은가?" 토론회 리뷰

by 행성인 2015. 3. 13.

웅(행동하는성소수자인권연대)

 

 

 

 

서울시민 인권헌장 불허로 시작된 ‘무지개 농성’이 끝나고 며칠 후인 12월 11일,  한겨레 신문에는 ‘광주시 인권헌장과 인권조례의 문제조항을 개정해 주십시오’라는 제목으로 의견 광고가 게재되었다. 동성애를 호도하고 성소수자의 인권을 모욕하는 명백한 혐오 광고였다. 시청 농성 기간 동안 관련 소식을 성실하게 기사로 전해 온 터라 배신감과 불신이 높아졌음은 자명했다.


성소수자 운동 진영이 처음부터 혐오 광고에 민감하게 대응한 것은 아니었다. 따지고 보면 혐오 광고에 불쾌함을 표시하며 직접 행동을 보인 시점은 소위 ‘진보 지향’ 신문들이 광고를 게재한 이후였다. 성소수자 친화적인 논조로 제도 비판적인 기사도 마다하지 않는 이들이 혐오 광고를 싣는 이중적 태도는 상식 밖의 이해를 요구했던 것이다.

 

이러한 배경 위에 3월 6일 성소수자차별반대 무지개행동에서 주최한 토론회 <차별과 혐오를 조장하는 의견광고 게재, 이대로 좋은가?>가 진행되었다. 성소수자 인권 운동가와 언론 분야 종사자들이 한자리에 모인 자리에서는 보수와 진보를 막론하고 혐오 광고가 게재되고 있는 상황에서 언론의 필터링 구조, 혐오 광고의 파급력, 혐오 광고에 대한 후속 대응을 논의했다.

 

 

혐오 광고의 효과와 언론 환경의 취약성


발제를 시작한 행동하는성소수자인권연대 이나라 활동가는 혐오 세력 광고가 ‘사회적 합의’를 운운하며 차별 논리를 이용하고 조장함으로써 성소수자의 인권 전반을 위축시키고 오염시킨다고 주장한다. 언론 매체의 지면을 할애함으로써 혐오를 의견으로 만들고 폭력과 차별을 정당화할 수 있다는 논지이다.


발제문에 순차적으로 정리된 혐오 광고 편람은 광고 게재 시점에 따른 논조 변화를 확인시켜준다. 정리에 따르면, 2007년 차별금지법 제정 반대 운동 당시 성소수자 혐오 세력이 가시화되고 2010년에 이르러 주요 일간지에 혐오 광고가 실리기 시작했다. 2010년 <인생은 아름다워> 드라마를 필두로 차별금지법, 학생인권조례, 서울시 인권헌장 등 이슈가 터져나올 때마다 혐오 광고가 나왔다. 성소수자 인권 운동이 성장하고 가시화될 때마다 혐오 세력은 광고에 제 존재를 드러내며 소위 ‘세력’으로 전면에 등장, 세를 과시해 온 것이다. 광고가 게재될 때마다 연명하는 단체들의 이름 변화도 주목할만 했다. 초기 ‘바른’, ‘애국’ 등 소위 ‘착한’ 단어들이 단체명에 붙었다면, 최근에는 ‘인권헌장 반대’, ‘국가인권위원회 해체’ 등 노골적일 정도로 구체적인 목적을 이름에 기입한다. 이들 광고가 뼛속까지 노골적이게 된 데에는 모종의 수사 강화를 통한 정치적 메시지 전달효과를 노린 것도 있겠지만, 이들을 규제하는 장치가 부재한 현실 또한 반영한다.


이어서 발제한 한겨레 노동조합 미디어국의 최원형 국장은 소속 기관에 대한 비판과 자기반성으로 논의를 시작했다. 언론사에 소속된 그로서는 내부 구조를 문제시 할 수밖에 없었으리라 보여진다. 편집진에 자율권이 허용되더라도 언론사는 시장 경제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광고 수익에 운영을 의지할 수밖에 없는 신문 매체의 구조적 특성은 혐오 광고를 온전히 막아낼 수 없다는 것이 그가 전하는 언론사 운영의 구조적 문제였다. 편집국에 전권을 위임하더라도 정치적 퇴행 분위기 속에서 편집자가 온전히 혐오 발언을 여과할 수 있을지는 회의적이다. 최원형 국장은 언론사의 독자적인 판단으로 혐오 광고를 완벽하게 막을 수 없음을 호소하며 외부 여론의 중요성을 언급하고 외부의 개입과 공동의 대응을 모색할 것을 요청했다.

 

 

진화하는 혐오 광고, 필요한 대응은?


혐오 광고가 등장하고 한동안 성소수자 운동 진영은 무대응으로 일관했다. 반동성애의 얕은 논리와 미미한 존재감은 무시해도 되는 것으로 지나쳤다. 초반 주력 신문에 광고가 게재될 때에도 위기감은 있었지만  ‘며느리가 게이라니’ 따위의 카피센스에 탄복할 정도였지, 별다른 대응은 없었다. 저들은 우리와 다른 사람이고, 우리와 다른 세계에 사는 사람일 뿐, 이 나라의 보수 정권 위에서 성소수자 친화적인 제도들을 요구해야하는 마당에 저들은 상대할 겨를도 없거니와 상대할 가치도 없다는 것이 근래까지의 중론이었다.


하지만 이슈가 터질 때마다 주력 언론에 지면을 차지한 광고는 세를 과시하기 좋은 매체였다. 한편으로는 광고를 게재하면서 논리를 키워가는듯한 인상까지 줬다. 종교, 군대, 복지와 세금, 심의에 이르기까지 성소수자 이슈가 뜰 때마다 혐오 광고는 종속변수처럼 발맞춰 엉성했던 논리에 살을 붙여나갔다. 뻔뻔하리만치 근거 없는 자신감, 어색하기 그지 없던 편집 구성은 게재될 때마다 다듬어져 나왔다. 토론 패널로 참여한 한국게이인권운동단체 친구사이 이종걸 사무국장의 언급처럼 허무맹랑한 논리일지라도 근성 있게 광고를 실으며 문장을 다듬고 편집을 세련되게 하면 힘이 붙기 마련이다. 여전히 우리 관점으로는 터무니없는 혐오 논리지만 저들은 유사과학적인 자료들을 증거로 제시하며 논리의 합을 맞추고 안정된 편집 기술을 구사한다(적어도 그렇게 보인다). 시종일관 이들이 고수하는 과장과 과잉의 수사법과 논리는 이제 비웃음 너머 의도적인 전술로까지 비쳐진다. 지속적인 가시화는 이들의 엉터리 논리를 익숙하게 만들고 평소 성소수자에 편견이 없는 대중에게마저 혼란을 가중시킨다.


근성 있게 광고를 게재하며 논리와 감각을 키우게 된 배경에는 이들이 몇 백 만원의 광고 비용도 지속적으로 지출할 수 있는 재력을 갖고 있음을, 마음만 먹으면 교인 몇 백 명도 동원할 수 있을 정도로 혐오 세력이 확장된 현실을, 무엇보다 사회적으로 보수화된 퇴행적인 정치 환경을 반영한다. 사회가 보수화되는 가운데 세력을 넓히는 혐오 세력은 극우 정치에 불을 당긴다. 발제자와 토론자가 제시한 사례들은 더 이상 혐오 세력을 무시할 수 없음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지속적인 협박성 광고는 야당의 중진의원들로 하여금 차별금지법안 발의를 철회하게 만들었다. 진보 성향 신문들의 혐오 광고 게재는 성소수자 인권 운동 진영으로 하여금 진보와 보수를 막론하고 혐오 광고가 게재되고 의견으로 취급될 수 있음을 일깨워줬다. 조정 역할을 해야할 국가인권위원회마저 동성애혐오 발언을 일삼는 보수 기독교 목사를 비상임위원으로 위촉하고, 유엔 보고서에 세월호 사건마저 누락한다. 이는 정치적 퇴행의 현실 속에서 혐오 세력이 보수 정권을 등에 업고 활보하고 다니는 현실의 일면이다. 하수상한 시절에 냉철한 판단력으로 정치적 이상을 지키는 것이 너무도 어려워졌다.


매체 특성상 광고는 여론을 조작하고 대중 여론인 양 호도될 수 있는 효과적인 전술로 이용되기 쉽다. 내용의 질을 떠나 그것이 가져올 효과를 무시할 수 없다는 얘기다. 언론개혁시민연대 전규찬 대표의 전언처럼 광고는 나치 시절 대중 여론을 선동했던 ‘무기’였고, 프로파간다 선전 매체로 남용되고 오용되기 쉬웠다. 그렇다면 규제가 최선일까. 대부분의 토론 참여자들은 규제가 대안이 아님을 강조한다. 많은 토론자들이 입을 모아 의견 광고는 혐오 광고로 변질될 수 있지만, 올바르지 못한 정책에 의견을 표현하는 채널이자 전술로서도 의미가 있다는 논지이다. 더구나 이나라 활동가의 비유처럼 거리 위의 혐오 세력들은 사회적 혐오라는 거대한 벽에 붙어 있는 오염 물질 같은 존재이다. 이들의 표현을 막는다고 혐오가 사라지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어떤 대응이 필요할까. 많은 토론자들은 여론 형성의 중요성을 피력했다. 전규찬 대표는 광고에 실리는 극단적 프로파간다는 사회적으로 규제하는 방안을 고민할 필요도 있음을 언급하며 언론 운동을 접합하는 방식으로 언론인권센터를 활용하거나, 성소수자 언론대책협의체를 구성해야 한다는 제안을 던지기도 했다. 의견 광고라고 해서 모든 광고 내용이 의견일 수 없듯, 폭력과 차별을 호소하는 메시지는 규제가 필요할 것이다. 물론 규제는 금지와 처벌로 접근하기보다 혐오 표현은 안 된다는 인식을 환기시키고 공유하는 차원에서 고민되어야 한다.


여론전을 머릿수 싸움으로 접근하려면 어려움이 따른다. 보수 기독교와 보수 정치가 결합한 혐오세력과 성소수자 운동은 나란히 놓고 정치력과 조직력을 비교할 수 없다. 혐오와 동성애 반대 민원 전화가 폭주하는 현상에 성소수자들은 무얼 하느냐고 책임을 묻는 것이야말로 현실을 외면한 요구일 것이다. 이에 언론 가이드라인이나 언론윤리지침 등의 여과 장치를 지속적으로 상기시키거나, 인권 감수성을 높일 수 있는 컨텐츠를 개발할 필요가 있다는 의견이 나오기도 했다. 무엇보다 사회적 소수자를 차별하는 혐오 표현은 안 된다는 인식을 환기시키기 위해 사회 내부의 공조와 연대를 넓힐 필요가 있다는 터네트워크 정혜실 대표의 의견은 당연한 귀결일지라도 울림을 줬다.

 

몇 년 전부터 행동하는성소수자인권연대에서는 혐오 세력과 혐오 표현, 혐오 광고에 대한 프로그램들을 진행해왔다. 단체의 목소리를 모아낼 수는 있었지만 단체에 국한된 논의였던지라 대응 방안을 실천에 옮기는 데에는 아쉬움이 있었다. 그런 점에서 이 날 언론인과 사회시민단체, 성소수자 인권 운동 진영이 함께 모여 이야기한 자리는 늦은 감이 있지만 언제라도 필요한 논의 테이블이었다. 문제를 확인하고 검토했으니, 오늘의 토론을 바탕으로 구체적인 행동들을 모색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