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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소수자와 가족

필리핀 아버님 장례식에 다녀와서: 동성결혼으로 새로운 가족이 되는 것

by 행성인 2015. 10. 12.

 

여기동 까야사(행동하는성소수자인권연대)


 
1.     아버님의 장례식


저의 남편은 8년 간 한국에서 일해온 필리핀 출신의 이주노동자 입니다. 올해 5월 결혼을 하고 이제 5개월이 되어갑니다. 내년 남편의 나라 필리핀으로 이민을 앞두고, 아버님께서 많이 편찮으시다는 소식을 가족들로부터 전해 들어 추석 연휴 동안 아버님 병문안을 위해 필리핀으로 출발하였습니다.

 

필리핀, 민다나오섬, 수리가오시 아몬따이 해변

 


2015년 9월 26일. 처음 밟는 남편의 나라 필리핀, 남녘에 있는 민다나오섬, 수리가오시의 작은 아몬따이는 넓고 푸른 바다를 낀 마을로, 코코넛과 바나나 그리고 광물 자원이 풍부한 곳이었습니다. 아버님은 올해 89세로 8남매를 두셨고 남편은 막둥이로 자랐습니다.


집에 도착했을 때 아버님은 생각보다 많이 편찮으셨습니다. 뇌졸중이 갑자기 와서 말을 못하시고 음식 섭취와 거동도 하지 못하는 위독한 상태로 누워 계셨습니다. “저는 당신 아들 찰스와 결혼한 여기동 까야사 입니다. 아버지, 저는 당신의 아들 입니다. 찰스와 함께 오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용서해주세요.” 라는 말로 인사를 드렸습니다. 저희 결혼식에 참여하지 못한 가족들을 위해 결혼 사진을 전해줬더니 받아서 거실 탁자에 세워 놓았습니다. 가족들은 제가 도착하기 전부터 사진과 한글 ‘환영’을 새겨 넣은 플래카드를 걸어 놓고 맞이해주셨습니다.

 

 


 
하룻밤을 자고 나니 아버님 상태가 조금 나아졌습니다. 다시 인사를 드리면서 결혼 사진을 보여드렸더니 유심히 보시고 당신 손을 내밀어 저의 손을 잡아 이마에 대고 축복해주셨습니다. 이는 필리핀 인사라고 합니다. 부모님 손이 사랑과 축복을 의미하고, 자녀가 부모님의 손을 이마에 맞대는 것이 존경을 의미한다는 것도 새롭게 알았습니다.
 

 

매형, 조카와 함께 집 앞 바닷가를 거닐었습니다. 코코넛 나무로 둘러싸인 해변에서 아이들이 물놀이 하는 모습이 전형적인 필리핀 풍경이었습니다. 마을 성당은 공소로 신부님 없이 운영되는 작고 아름다운, 가난한 교회였습니다. 마을 친척과 이웃들은 저를 반갑게 맞이해주셨고, 아이들은 한국에서 온 작은 눈의 외국인을 신기해 했습니다. 바닷가와 성당 그리고 마을에서 뛰노는 아이들을 보면서 남편의 어린 시절이 머리 에 그려졌습니다.

 

 

 

 

 

가족들과 시내에 나가 점심을 먹고, 돌아오는 길에 저녁 먹거리 장을 봐 저녁을 함께 먹으면서 가족들은 남편의 안부를 묻고, 저희 결혼생활과 가족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형제들이 아버님의 간병인 고용과 비용 지불에 관한 가족회의를 열면서 제게도 참여를  제안하여 가족회의에도 참여했습니다. 마지막 날 아침, 아버님을 목욕시킨 후 남편이 제게 선물해준 티셔츠를 입혀드리고 작별했습니다.

 

귀국을 위해 다시 마닐라로 돌아와야 했습니다. 저녁 즈음 누나 가족들과 함께 시내에 갔습니다. 누나 가족들은 저희 결혼식에 오셔서 1주일 간 함께 지냈기 때문에 저를 매우 친근하게 대해주셨습니다. 조카들에게 책을 선물하고 바닷가 근처 수산시장에서 해물요리를 함께 먹으며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특히 매형은 우리 결혼식장에서 교회 식구들이 불러준 ‘사랑이 이기네’을 자주 흥얼거리셨고, 그 의미를 물어 설명해드렸습니다. 

 

하룻밤을 자고 공항으로 출발했습니다. 이륙 3시간 전 형님에게 아버님이 운명하셨다는 전화를 받았습니다. 잠시 후 남편에게 전화가 와서 아버님의 부고 소식을 전하자 대성통곡하였습니다. 직장에 전화하여 허락을 받고 한국행 비행기표를 취소한 후, 장례식을 위해 다시 아버님 댁으로 출발했습니다.

 


한국의 장례 문화처럼 외가와 친가의 친척들, 마을 이웃들이 함께 모였고 가족들은 친척 어르신과 사촌들에게 저를 찰스의 배우자로 소개했습니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는데, 이 자리에서 가족들은 결혼식에 참여하지 못한 가족들을 위해 가져간 결혼식 동영상을 함께 봤습니다.

 

 

 

 

장례식은 작은 체육관의 노제, 성당의 장례미사 그리고 묘지 안장으로 치러졌습니다. 장례식을 앞두고 진행된 노제에서 가족들은 장례위원회로부터 국기를 받았습니다. 첫 번째 형제부터 순서대로 국기를 건네 막내까지 전해지고, 이를 받은 막내가 가족 대표로 노제에 참여한 사람들에게 인사말을 했습니다. 찰스가 참여하지 못했으니 저보고 이를 해줄 것을 요청하여 제가 인사를 올리기도 했습니다.

 

 

 

 

가족들은 장례미사의 모든 절차에 저를 포함시켜주셨습니다. 묘지로 이동하면서 먼 훗날 남편과 저도 이 길을 걷게 될 것을 생각했습니다. 어머니 묘지에 아버지 합장을 마친 후 마지막 인사로 한국식으로 큰절을 했습니다. 신랑 몫까지 4배를 했습니다. 누나에게 물어보니 이전에 남편이 어머니 산소에 한국의 향을 가져온 적이 없었다고 합니다. 아마도 이번 방문에는 엄마 산소 성묘와 아버지 장례식에 태우라고 향과 초를 제게 주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장례를 마치고 마닐라로 돌아오는 길에 누나는 남편이 좋아하는 필리핀 케익과 꽃게를 한국에 가져가라고 선물해주셨습니다.

 

신랑이 김해공항에 마중을 나와 반갑게 포옹해주어 기뻤습니다. 짐을 풀고 하룻밤을 지낸 후, 아침이 되어 아버님 장례식 동영상을 보여주기가 겁이나 머뭇거렸습니다. 잠시 후 남편은 동영상을 보고 슬프게 울었고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품어주는 것 뿐이었습니다.
 

 

2.     동성결혼으로 새로운 가족이 된다는 것

 

다행히도 남편은 점차 평온을 되찾고 저희는 일상으로 돌아왔으며, 이번 필리핀 방문을 통해 몇 가지 철학적 사유를 갖게 되었습니다.

 

첫째, 가족의 환대 입니다. 아버님 장례식을 계기로 처음 만난 필리핀 가족들은 제게 소중한 가족이 되어주었습니다. 저를 따뜻하게 맞이해준 필리핀 가족은 제가 외국인임에도 불구하고 장례식의 모든 절차에서 배제하지 않았습니다. 장례식장에서 가족들은 결혼식 동영상을 사람들에게 보여주면서 우리의 결혼을 부끄러워하지 않으며 우리를 온전히 가족으로 수용해주었습니다. 제 부모님이 돌아가셔서 한국에서 장례식을 치렀을 때를 상상해보면 우리 가족들은 도저히 행할 수 없는 사건입니다.

 

 

 

 

더불어 이번 방문을 통해 남편 큰누나의 큰딸이 레즈비언이고, 막내 매형의 조카가 게이였으며, 누나 사업장에서 일하는 직원이 트랜스젠더 여성이고, 아버님 장례식의 화환장식을 도와준 이들 중에 남편의 게이 친구가 있었으며, 이 친구의 말로는 장례미사를 집전한 신부님도 게이라는(?) 이야기 등 다양한 가족사와 배경을 알게 되었습니다.  성소수자는 아주 가까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조카들과 함께


 

가족들로부터 남편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남편은 초등학교 때 가족에게 동성애자 임을 커밍아웃하고 학교 행사에서 가장행렬을 한다며(아마도 여성복장의 학예회인 것 같습니다.) 필요한 옷을 만든다고 야단법석 떨었고, 심지어 그 행사에 부모님을 초대했다고 합니다. 가족들은 결혼도 못하고 타국에서 외롭게 이주노동을 하는 동생을 안쓰러워했는데 결혼을 한다니 반가웠다고 합니다.

 

필리핀은 가족간 유대가 깊은 국가입니다. 결혼한 후 남편은 제 이름에 집안명 ‘까야사’를 붙여 주었습니다. 제가 이름을 소개할 때마다 친척들이 무척 좋아하고 반가워했던 이유가 거기에 있었습니다.
 
둘째, 동성결혼은 가족간 사랑의 유대를 강화시키는 요인이 될 수 있습니다. 동성결혼은 배우자와 가정을 꾸리고, 양가의 새로운 가족이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동성애 혐오집단은 동성 결혼에 대해 가족을 파괴하고 부끄러운 것으로 낙인찍습니다. 낙인은 가족 내 혐오를 조장하고 가족 간 대립과 갈등을 증폭시키는 주된 요인 입니다. 반대로 가족이 동성 결혼을 축복해주고 자랑스럽게 여긴다면 가족 간 사랑과 우애는 더욱 커집니다.

 

미혼으로 표기된 부동산 등기부등본

셋째, 한국 사회뿐 아니라 국경을 넘어 차별과 혐오를 끝장내고 모든 사람의 자유와 평등을 위한 방법으로 동성결혼의 합법화가 필요합니다. 필리핀 가족들의 환대에도 불구하고 필리핀 사회는 카톨릭 종교 이데올로기가 주류입니다. 올해 필리핀 성소수자 커뮤니티에 속한 게이와 레즈비언 커플은 결혼신고를 거부당해야 했습니다.

 

저희 가족 역시 비슷한 일을 겪었습니다. 우리 커플은 내년 이민을 준비하며 마닐라 누나 동네에 작은 집을 하나 마련하여 남편 이름으로 등기를 신청했습니다. 하지만 등기부 등본 결혼상태란에는 싱글로 표기되어 있었습니다. 한국에서 결혼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혼인 증명서를 받을 수 없어 결혼증빙서류를 제출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동성결혼이 인정되지 않는 이상 우리 부부는 죽을 때까지 지속적으로 차별 받고 배제당할 것입니다. 동성결혼 법제화가 필요한 이유는 단지 한국 사회에서 만의 문제가 아니라 국경을 넘어 차별을 없애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넷째, 마닐라에서 잠시 미셸(전 이주노동조합 위원장)님을 만났습니다. 미셸은 3년 전 한국 정부에서 강제출국 당했으며 현재 ‘Migrante’라는 이주노동자 지원단체에서 열심히 활동하고 있습니다. 그의 안내로 사무실을 방문하여 활동가들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습니다. 반갑게도 이 단체에는 성소수자 분과가 설치되어 있었습니다. 마닐라에 있기 때문에 이민 후에도 다시 만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아버님, 부디 하늘 나라에서 편안한 안식을 누리소서. 그리고 아버님의 축복과 가족들의 환대에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당신들이 부족한 저를 가족으로서 자랑스럽게 여기듯, 저도 ‘까야사’ 집안의 가족 됨이 자랑스럽습니다.

 

끝으로 제가 필리핀 방문 동안 염려해주시고, 아버님의 명복을 빌어주신 모든 벗들에게 감사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