웅(행동하는성소수자인권연대 HIV/AIDS인권팀)
사건과 이슈가 끊이지 않았던 한 해였다. 때를 달리하며 파고를 높이는 반동성애진영의 차별선동 속에서 HIV/AIDS는 대표적인 혐오수사로 아무여과 없이 발화되고 유통되었다. 복지예산은 잘해야 제자리걸음이고, 여전히 에이즈 환자를 받아줄 요양병원은 없다. ‘약은 좋아지는데 감염인들은 이러고 산다’ 는 분노가 올 한해 한국 사회 감염인 삶의 지표를 고스란히 드러냈다. 미 연방정부는 2015년 세계 에이즈의 날 슬로건으로 'The Time To Act Is Now'를 제창했다. 우리에게도 절실한 구호다. 하지만 문장의 맥락과 두 국가의 HIV/AIDS 환경을 비교하면 구호에 새겨진 절실함은 이내 어색함으로 착색된다.
그러나 힘 빠지는 차별선동구호와 제도적 퇴보 한편에는 에이즈 이슈를 공유하고 대응을 모색하는 노력 속에 관계를 넓히고 목소리를 높이는 공동체의 성장 역시 마음에 새겨야 한다. 최근 UNAIDS낙인지표조사 준비단이 2015년 HIV/AIDS 10대 이슈를 정리한 바 있지만, 필자는 이슈들과 거리를 달리하며 성소수자인권단체 행성인 HIV/AIDS 인권팀원의 관점으로 2015년을 조망해보고자 한다.
치욕의 2015
1.
사무실을 옮기고 단체이름을 바꾼지 얼마 되지 않은 3월 즈음, 경찰서에서 소환장이 날아왔다. 수동연세요양병원(이하 수동병원) 염안섭 원장이 고소했다는 소식이었다. 1월 에이즈 환자 건강권 보장과 국립 요양병원 마련을 위한 대책위원회(이하 ‘요양병원 대책위’)가 ‘수동연세요양병원의 사실왜곡에 대한 입장표명 및 법적대응 기자회견’을 가지며 감염인의 의료환경과 수동병원의 실태를 대중에게 알린데 대한 수동병원측의 대응이었다. 당시 필자는 기자회견에 ‘성소수자혐오세력을 등에 업고 에이즈혐오를 조장한 수동연세요양병원을 규탄한다!’ 를 제목으로 글을 보탰다. 이에 수동병원 염원장은 당시 행성인 홈페이지에 게재된 글을 증거 삼아 명예훼손과 모욕죄로 필자를 고소했다. 필자 뿐 아니라 기자회견에서 수동병원을 비판한 이들 대부분은 졸지에 피고소인이 되었다. 운영위원장으로 인준된지 얼마 지나지 않아 받은 고소장이었기에 원치 않게 현란한 신고식을 치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겉으로는 별일 아니다 치부했지만 예기치 않게 고소장을 접한 가족들의 불안은 쓸데없는 정서적 소모를 동반했다. 따지고 보면 사소한 법적 싸움이고 시간을 투자할 일도 크지 않았지만, ‘고소’니 ‘소환’이니 하는 살벌한 언어들은 일상 곳곳에 발목을 잡으며 사람을 위축시켰다. 화초 같은 내 인생에 생채기 나는 건 당연지사. 10월 경, 피고소인 전원은 결국 혐의 없음을 판결받았다. 처분 결과 통지서에 적힌 ‘혐의 없음’과 ‘죄가 안됨’ 판결엔 헛웃음만 난다.
법정 싸움과 별개로 염안섭은 올 한해 반동성애 차별선동 사절단이 되었다. 퀴어퍼레이드 전후를 기점으로 염원장은 기독교 방송과 언론, 토론회 등지에 신출귀몰 나타나 얼굴을 비췄다. 동성애의 폐해를 알리는가 싶었지만 정작 주변 사람들은 남성동성애자의 센조이 전도사 정도로 그를 기억한다. 그의 문장을 빌리면, 바텀들은 항문성교를 하기 전 샤워기를 20cm 가량 자신의 항문에 삽입하여 씻어낸다. 차별선동적 언사는 차치하고라도, 혐오가 빚어낸 그의 SF적 상상력은 가공할 종교의 은혜이지 싶다.
퀴어퍼레이드를 앞두고 메르스 광풍이 불었고 그 속에 또다른 혐오논리가 바람을 탔다. 메르스와 에이즈바이러스가 만나 슈퍼바이러스가 된다는 괴담은 ‘에이리언 바텀가설’을 넘어 분자스케일의 콩가루 상상력 무지개 꿈나라를 펼쳤다. 반동성애를 외치기 위해 퀴어보다 더 퀴어한 상상력을 펼쳐내는 이들의 가공할 신실함에 어디부터 손을 봐야 할지 견적 잡지 못하겠다 전해라~
2.
7월 초, 대구퀴어퍼레이드가 성황리에 진행되었다. 준비단은 프레스를 엄격히 관리하고 보수기독언론인 등 요주의 인물들 관상을 뿌리며 사전 단속을 단단히 했다. 하지만 틈은 있었다. 국민일보 백상현기자는 정보가 공유되기 전부터 대구퀴퍼 행사장에 살포시 잠입해 에이즈 인권팀이 제작한 <4-60대 동성애자 감염인 보고서>를 구입, 에이즈혐오기사에 악용하는 패기를 보인 것이다.
기사의 영향은 생각보다 거셌다. 가장 먼저 인터뷰 구술자들의 불안은 말할 것도 없었다. 관점에 따라서는 우리가 의도적으로 기자에게 보고서를 전했다는 오해도 나올 수 있는 상황이었다. 혐오와 차별선동 위협이 커뮤니티 내 오랜시간 쌓아온 신뢰에 위기가 될수 있음을 뼈저리게 느꼈다. 결국 유통상의 책임을 지고 보고서는 폐기되었다.
이후에도 백상현기자는 에이즈 유관 기관과 단체 홈페이지에 게재된 성소수자 에이즈 관련 연구와 자료들을 긁어내 제 악의성 기사에 양념처럼 버무렸다. 그는 최근 바른성문화를위한국민연합이 11월 23일 개최한 ‘대한민국 에이즈 예방에 대한 정책 포럼’에 ‘대한민국 청소년들이 꼭 알아야 할 에이즈 관련 지식’을 주제로 발표했다. 같은 자리에 발표자로 나선 염안섭 원장(수동연세요양병원), 길원평 교수(부산대)와 이름을 나란히 하며 반동성애의 대표 언론책을 꿰차는 순간이다.
당장 생각나는 이슈들만 정리했는데도 분기마다 에이즈혐오의 새로운 국면이 파고를 높이며 몰려드는 느낌이다. 하지만 아직 끝나지 않았다. 시절은 바야흐로 여름을 지나 가을에 접어든 10월이다. <동성애·동성혼문제, 어떻게 봐야하나 토론회>에 KBS 이사 조우석은 ‘더러운 좌파’라는 희대의 드립을 들고나와 동성애자 혐오의 폭풍전선을 만든다. 역시 동성애의 더러움을 수식할 레토릭에는 에이즈가 빠지지 않는다.
공영방송의 이사직함을 숨기고 개인차원으로 참가했다 변명하는 치졸함도 그렇지만, ‘좌파와 동성애의 더러운 커넥션’, ‘동성애자는 더러운 좌파’라는 전형적인 종북게이 담론을 입증하려는듯 그는 좌파 동성애자의 표본으로 현장에서 활동하는 이들의 내력을 고스란히 노출한다. 위키에서 성소수자 활동가들의 정보를 긁어오는 수고는 평가하건대 혐오발화수행의 창조적 지평이다. 집단을 향한 혐오가 특정 개인을 겨냥한 폭력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는 기점이기도 했다. 경악스러운 참신함은 아직도 당사자들에게 트라우마로 남아있다.
3.
반동성애 세력들의 혐오발언과 차별선동만 있던 것이 아니다. 매년 이런 얘기 하는게 지겹지만, 사회에는 여전히 에이즈에 대한 부정적 인식과 당사자에 대한 차별이 노골적으로 일어난다. 혐오세력이 메르스와 에이즈를 슈퍼바이러스로 믹스업하는 동안 메르스 중앙거점병원으로 지정된 국립중앙의료원은 병상확보를 명분으로 에이즈환자를 비롯한 저소득층 환자들을 내쫓았다. 그런가하면 보라매병원은 에이즈환자 치과진료에 앞서 예방이랍시고 사방천지에 김장비닐을 씌워놓았다. 지난 5월 에이즈환자 치과진료를 거부했던 병원이다. 인권단체와 질병당사자들의 비판을 받고 변화한 게 저 정도라니.
10월 말부터는 보건복지부 에이즈예산 삭감 예고가 감염인 커뮤니티를 흔들었다. 그동안 지원되었던 간병예산이 대폭 삭감된다는 소식이었다. 기초수급을 받는 와병환자들의 치료접근권에 심각한 위협이 되었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당장 활동가들이 국회에 제 집 드나들듯 하며 예산 담당 위원들과 읍소와 요구 사이의 줄타기를 해야 했고, 요구안에 절대 미치지 못하는 금액이 가까스로 증액되었다. 급한 숨은 돌리지만, 여전히 밀린 간병비는 예산의 숨통을 죈다. 언제까지 이렇게 숨구멍만 열어놓고 급급하게 살아야 하나?
그럼에도 우리는 연대하고 성장한다
한 해가 어떻게 지나갔는지 정신 줄을 겨우 붙잡고 돌아보니 혐오와 위기에 대응해온 HIV/AIDS 인권활동들이 있었다. 가장 가시적인 것들을 꼽아보면, 최근 KNP+의 사랑방 마련이다. 사랑방은 감염인 단체의 양적 성장을 드러내는 중요한 지표이다. 장소가 생기면서 회의가 늘어났다는 투정은 나날이 HIV/AIDS 운동에 비중을 높여가는 KNP+의 메아리일 것이다. 사랑방은 자신들의 공간을 만들고자 했던 당사자들의 노고 뿐 아니라 주변의 지지와 후원이 있기에 가능했다. 양적 성장 속에서 커뮤니티 안팎으로 높아진 HIV/AIDS 감수성의 온도를, 깊어진 HIV/AIDS 운동의 연대를 엿보게 된다.
성소수자 커뮤니티도 의미 있는 한걸음을 내딛었다. 한국게이인권운동단체 친구사이는 올해부터 질병당사자모임 ‘가진사람들’을 발족했다. 이는 그간 쉬쉬했던 에이즈이슈를 우리의 문제로 끌어안겠다는 결단이기도 하거니와, 나와 동료의 아픔을 함께 나누겠다는 커뮤니티의 질적 도약이기도 하다.
그런가하면 행성인 HIV/AIDS인권팀은 세계 에이즈의 날에 맞춰 <행성인 회원을 위한 HIV/AIDS 가이드북>을 발간했다. 5년 가까이 활동해온 인권팀 활동이 집적된 가이드북은 공동체 안에서 알아야 할 질병의 상식과 서로를 배려하기 위해 새겨야 할 에티켓을 담고 있다. 뿐만 아니라 HIV/AIDS 운동의 역사와 인권팀의 활동 편람도 담아 인권팀 활동을 보다 용이하게 파악할 수 있도록 한다.
그리고 UNAIDS 낙인지표조사가 올해 말부터 준비과정을 거쳐 2016년 본격적으로 시작한다. KNP+를 주축으로 HIV/AIDS인권연대 나누리+ 가 공동으로 준비하는 사업은 기본적으로 한국의 감염인들이 인식하는 에이즈 낙인이 어느 정도인지 파악할 수 있는 조사연구 프로젝트이다. 주지할 점은 조사의 결과 뿐 아니라 과정 또한 중요하다는 점이다. 감염인이 직접 조사원이 되어 다른 감염인들을 만난다는 점에 낙인지표조사는 공동체 내부의 역량강화에도 역점을 두고 있다.
높은 파도 위에 깊고 넓게 뿌리를 뻗는다
반동성애세력의 집단적인 차별선동은 에이즈 혐오를 주요 무기로 삼는다. 성소수자를 향한 공격은 질병당사자들에게도 구체적인 위협을 가한다. 에이즈 약은 좋아지고 있지만, 감염인들을 둘러싼 제도와 사회인식은 험악해진다. 하지만 그 속에서 커뮤니티가 성장한다. 감염인들의 기갈이 공론장의 목소리로 다듬어진다. 집단적 존재감이 커지면서 HIV/AIDS 인식과 현실의 낙차 사이에 발생하는 배제와 대상화들을 문제로 인지하는 차별감수성도 높아진다. 체념하기보다 문제를 찾고 해결을 모색한다. 이는 현재 한국사회의 에이즈 운동이 또 다른 국면에 이르렀음을 보여주는 지표들이다.
만감이 교차하는 가운데 드는 고민들 중 하나는 행성인 에이즈인권팀의 자리선정이다. 커뮤니티를 대상으로 에이즈 인식 변화를 위해 활동해온 인권팀은 최근 어떻게 질병당사들과 밀착하며 연대할 것인지를 고민하고 있다. 활동이 구체적인 지도를 그려가고 있는 과정 속에서 관계는 더욱 직접적인 문제가 되었다. 2016년, 행성인 HIV/AIDS 인권팀은 만날 사람들이 많아지고, 들어야 할 이야기들도 많아졌다.
할 것이 많아진 지금, 우리는 HIV/AIDS 이슈를 함께 고민하고 활동을 모색할 사람들이 필요하다. 즐거운 고민, 함께 나눠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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