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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V AIDS

CLEAN -지워짐을 위한 기록-

by 행성인 2015. 12. 5.

4+ (행동하는 성소수자 인권연대)

 

 

 

 

매일 특정한 약을 복용해야 하는 일은 습관이 되지 못하는 거 같다. 약을 복용한지 2년이 되어감에도 나의 유전물질 어딘가에 숨어있는 HIV 바이러스보다 내가 먹는 약이 더 낯설게 느껴진다. 약을 꺼내 삼키는 일련의 동작이나 약을 복용한 시간을 확인하는 내 모습을 보면 마치 나 자신이 아닌 타인의 모습을 보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언제부터인가 나의 하루에서 바이러스 증식을 억제하기 위한 치료제를 삼키는 시간이 중요해졌고 그럴 때면 나는 약을 삼키는 행동을 반복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나는 내 삶의 이방인이 되었고 나의 몸은 나를 유지하고 감각을 이어나가는 기관이 아닌 약을 먹는 시간의 신체로 전락했다.


그래서 난 나를 거부하고 싶었다. 이방인이 된 내가 다시 나의 삶의 주체가 되기 위해 약 먹기를 거부하고 싶었다. 병에 대한 두려움이나 미래에 대한 절망으로 스스로를 포기하는 행동이 아닌 내 하루의 시간을 재구성하는 행동으로 약 복용을 멈추자는 것.


하지만 사람은 대개 실천할 수 없는 생각들을 하는 법이다. 난 약 먹기를 멈추지 못한다.

약 먹기를 멈추면 내 몸속의 HIV는 임파구를 자신의 DNA로 결합시키며 증식할 것이고 나의 생은 빠른 속도로 불타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문득 내가 먹는 알약들의 형태를 분해해서 지워버리고 싶다고 생각했다. 바이러스에 감염 된 이후 변화된 나의 시간과 의미들도 약과 함께 같이 지워버리면 어떨까?


저마다의 다른 환경, 생김새, 나이와 성격들을 가진 감염인들의 삶은 감염 이전의 시간으로 되돌아갈 수 없었고 나와 같이 거리의 이방인들이 된 것처럼 보였다. 그건 눈으로 구별할 수 없지만 그 사람의 눈빛과 태도로 짐작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다.


하얀 종이에 약을 가루로 빻아 물에 녹여 칠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사라진 약의 형태는 변형되어 종이 위에 새로운 질감이나 색으로 남겨질 것이고 그 안에는 병으로 달라진 감염인들의 삶과 시간들이 함께 담겨진다. 그리고 물에 녹은 약처럼 HIV/AIDS라는 병을 둘러싼 사회적 맥락이나 관념들도 물에 같이 녹아들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작업은 회화가 아닌 퍼포먼스이다. 약을 분해하고 녹이고 칠하는 과정으로 끝나는 작업이 아니라 이 병이 사회적인 질병에서 벗어나 감염인들이 더 이상 이방인이 되지 않을 때 끝을 맺는 작업. 이 작업들이 그저 의미가 있었던 지금은 쓸모없는 종이, 버려져야 할 종이에 불과해질 때 완성될 수 있는 퍼포먼스인 것이다.

 


끝으로 이 작업을 진행하며 남긴 짧은 메모를 덧붙인다.

 

 

- Clean은 HIV/AIDS 감염인들이 복용하는 치료제를 물에 녹여 캔버스에 색이나 질감의 형태를 남기는 연작의 이름이다. 바이러스 양성 판정과 치료의 시작과 함께 삶에 변형이 생긴 이들, 병을 둘러싼 사회적인 맥락이나 관념들을 물에 녹여 형태가 지워진 약처럼 이 캔버스도 종국엔 어떤 의미도 남지 않고 또한 어떤 의미도 담을 수 없길 바라는 하나의 의식이다.

 

- HIV/AIDS 치료제를 물에 녹여 캔버스에 칠하는 작업을 진행하는 동안에 사람들은 내게 HIV/AIDS의 비싼 약값과 국민의 세금으로 감염인들을 지원하는 것의 필요성에 대해 의문을 갖고 얘기를 해왔다. 그런데 다국적 제약회사의 약에 대한 특허권이 갖는 비윤리성과 공공의료의 역할에 대해서 자신의 의견을 들려주는 사람은 없었다. 그건 무척 서글픈 일이었다.

 


「글쓴이는 2013년 12월 9일 HIV/AIDS양성 확진 판정을 받았으며 이후 프로젝트 4+ 라는 이름으로 질병과 소수성을 주제로 한 영상, 글, 퍼포먼스 등의 작업들을 진행하고 있다.
글쓴이의 독립출판물 책 <종이>는 독립출판서점 더북소사이어티, 책방 만일, 200/20, 햇빛서점에서 구입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