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연(행동하는성소수자인권연대 웹진기획팀)

 

“사람이 언제 죽는다고 생각하나? 심장 깊숙이 총알이 박혔을 때? 아니. 불치의 병에 걸렸을 때? 아니. 맹독 버섯 스프를 먹었을 때? 아니야! 사람들에게서 잊혀졌을 때다.” 애니메이션 <원피스>에 나온 유명한 대사다. 대사가 나온 장면은 원피스의 많은 팬들에게 작중 최고의 장면 중 하나로 꼽히는데, 아마 누군가가 세상을 떠나도 그의 모습과 뜻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있는 한 그 뜻은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훌륭하게 표현해 내서 그럴 것이다. 2016년 4월 23일, 동성애자가 차별받지 않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다 우리 곁을 먼저 떠난 한 사람을 기억하기 위해 사람들이 모였다.

 

2016년 4월 23일 오후 2시

 

4월 23일의 오후,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 안의 푸르른 나무 옆에서 펄럭이고 있는 무지개 깃발을 찾기란 어렵지 않았다. 깃발 아래 15명 가량의 사람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는데 절반 정도는 행동하는성소수자인권연대(이하 행성인)에서, 나머지 절반 정도는 청소년 성소수자 위기지원센터 ‘띵동'에서 나온 사람들이었다. 아직 캠페인을 준비하는 중이라 관심을 갖는 사람들은 별로 많지 않았지만, 모두들 준비한 짐을 꺼내고 부스를 차리느라 분주했다.

 

무지개 깃발을 찾기란 어렵지 않았다

 

어느정도 준비가 끝나자 행성인 사람들과 띵동 사람들 모두 준비한 캠페인을 진행하기 시작했다. 행성인 부스에서는 육우당의 작품집을 비롯한 출판물, 행사 굿즈를 판매했다.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아 지나가던 한 분이 굉장히 관심을 보이며 부스에 다가왔는데, 부스를 담당하던 두 분은 오늘의 개시 손님을 놓치지 않으려는 모양새였다. 몇분에 걸친 열정적인 설명에 감동했는지, 그 분은 활동가 작품집에 작품집 저자의 친필 싸인까지—저자분도 같이 판매 활동을 하고 있었다—받아 갔다. 캠페인의 첫 출발이 순조로워 보였다.

 

부스 옆에서는 차별 발언으로부터 청소년 성소수자를 지키는 ‘방패’를 만들기 위해 포스트잇에 응원의 메시지를 붙이는 캠페인을 진행했다. 울고 있는 청소년 성소수자와 그를 향해 쏟아지는 공격들, 그 사이에 메모지를 붙일 철조망이 놓여있었는데 비록 캠페인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아직 붙어있는 메모지가 얼마 없었지만, 캠페인이 끝날 때가 되면 마치 ‘사랑’의 자물쇠가 가득한 남산 타워 전망대 철조망처럼 사랑 가득한 메시지가 철조망을 빼곡히 채웠으면 하는 진행자들의 바람이 느껴졌다.

 

돌아다니며 캠페인을 진행하는 사람들도 있었는데, 청소년 성소수자의 인권을 보장하자는 메시지를 담은 틀을 들고 인증샷을 찍는 캠페인이었다. 캠페인 도중 나이가 꽤 있어보이던 한 시민분은 적혀있는 메시지를 유심히 보시더니 자신도 찍겠다며 틀을 달라고 했다. 진행하는 사람이 사진을 찍게 그분에게 핸드폰을 달라 하자 자신은 핸드폰이 없다며 진행자들의 카메라로 많이 찍어달라고 부탁을 하기도 했다. 세 대의 카메라가 자신을 잘 찍은 것을 확인한 후, 그 분은 유유히 갈길을 갔다. 한편, 인증샷을 찍은 사람들에게는 초콜릿도 주고 있었는데, 부스 근처에 있던 몇몇 사람들은 배가 고팠는지 열심히 인증샷도 찍고 인증샷 만큼이나 중요한 당분이 들어있는 초콜릿도 받아갔다. 아마 활동가들은 초콜릿의 힘으로 더 열심히 캠페인을 진행하겠다는 다짐을 했…으려나?

 

 

함께 있어줄게!

 

보장하라! 청소년 성소수자의 인권!

 

띵동에서는 성소수자와 관련된 상식을 물어보는 ‘무지개 OX 퀴즈’를 진행했다. 빨강, 주황, 노랑, 초록, 파랑, 보라색의 문제판이 있었는데 문제판마다 깨알같은 띵동 홍보가 하나씩 들어 있었다. 문제를 많이 맞추면 사탕을 상품으로 가져갈 수 있었는데 사탕까지도 무지개 색의 포장지를 가진 사탕이 준비되어 있었다. 아쉽게도 포장지만 무지개 색이고 사탕은 하얀 색으로 되어 있었다. 사탕까지 색을 맞추기 위해서는 띵동의 재정 상황이 더 여유로워져야 할 필요가 있어 보였다. 그런 의미로 행성인과 띵동에 일시 후원을 해보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절대 이 글을 읽는 독자들에게 부탁을 하려고 쓴 문장은 아니다. 아닐 것이다. 아마도…?

 

 

무지개 OX 퀴즈

 

그렇게 캠페인이 무르익어갈 때 즈음, 본격적인 추모문화제가 시작되었다.

 

2시 53분

 

추모문화제는 문화제 기획단이 섭외한 하자작업장학교의 바투카다 공연으로 시작했다. 부드러우면서도 힘 있는 목소리와 다채로운 악기들이 만들어낸 노래는 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끄는데 성공했다. 마치 홍대에서 하는 버스킹을 보는 것처럼, 수십명의 사람들이 공연을 보러 몰려들었다. 공연이 한창 진행되던 중 행성인의 청소년팀 팀장 사과가 무지개 깃발을 들고 춤을 추러 나갔다. 사과는 한참동안 무지개 깃발을 들고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깃발을 흔들며 춤을 췄다. 아마 문화제가 무엇을 위한 문화제인지 사람들이 더 알아주기를 바란 사과의 마음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인상적인 첫 공연이 끝난 후, 사람들의 발언 시간이 시작되었다.

 

 

버스킹이 아닙니다 사과의 마음

 

첫 발언자인 KNP+의 소리씨는 성소수자가 이 사회에서 받아야 하는 차별에 대해, 노들 야학의 교사인 두번째 발언자 현정민씨는 장애등급제와 부양의무제가 장애인들의 삶을 얼마나 힘들게 하고 있는가에 대해 이야기했다. 특히 이분은 자신의 동료이기도 한 송국현씨가 장애 1급을 받지 못해 활동보조인이 같이 있지 않아 사고로 세상을 떠난 이야기를 하며 눈물을 보이기도 했다. 사람이 물건처럼 등급을 받아야 하는 세상 속에서 물건이 아닌 사람으로 살고자 하는 모든 이들의 눈물이었다. 발언이 끝난 후에는 행성인 몸짓패의 공연이 이어졌다.

 

 

무지개는 어디에 있어도 예쁘다

 

이후 세 사람이 추가로 발언을 이어갔다. 첫 발언자인 행성인 청소년인권팀의 사과는 청소년 성소수자 당사자로서 청소년은 미성숙하고 돌봄이 필요한 존재가 아닌 스스로에 대한 자기결정권을 가진 사람이라는 것을 강조하였다. 아마 청소년 성소수자였던 육우당을 기리는 문화제인 만큼 가장 문화제의 뜻을 가깝게 느끼고 있을 그의 발언은 짧지만 진심이 가득한 발언이었다. 두번째 발언자인 띵동의 에디씨는 트랜스젠더로서 무시되거나 억압될 수 없는 성소수자의 존재에 대한 발언을 이어나갔다. 이분은 그 외에도 성소수자들의 넘쳐나는 '매력'에 대한 자부심을 보여주기도 했다. 사실 부정할 수 없었는데,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다 넘쳐나는 자신만의 매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지막 발언자인 홈리스야학의 림보씨는, 자신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남에게도 당연할 것이라 생각하지 말라는 굵은 메시지를 던져주었다. 자신의 이야기를 담담하게 말하려고 하였으나 중간 중간 감정이 복받쳐 발언자가 발언을 멈추기도 하였지만, 누구도 빠짐없이 조용히 발언자를 위해 기다려 주었다.

 

세 발언 이후 미스터 어깨꿈과 철이 팀의 공연이 이어졌는데, 공연 팀 중 미스터 어깨꿈씨가 도착하지 않아 철이씨 먼저 공연을 시작했다. 공연 소개를 다단계로 하여 사람들의 호기심을 끌어내려는 주최측의 창의력과 진행력이 엿보이는 부분이었다.

 

 

철이 “빨리 오세요…”

 

이후 마지막 세 사람이 발언을 이어갔다. 첫 발언자는 성소수자 부모모임의 성소수자를 자녀로 둔 어머니 하늘씨였다. 성소수자 당사자가 아닌 성소수자의 부모로서 풀어나가는 이야기는 많은 사람들에게 호소력있게 다가간 듯 했다. 두번째 발언자는 성동장애인자립생활센터의 최진영씨로, 발언문을 읽기가 어려워 같이 발언문을 쓴 다른 분이 내용을 대독하였다. 차별로 인해 고통을 겪어야 했던 사람들과 함께하고 그들을 잊지 않겠다는, 모두가 항상 해 온 이야기지만 계속 해야만 하는 이야기를 다시 상기시켜 주었다. 마지막 발언자인 행성인의 모리씨는 차별이 가득한 잔인한 세상 속에서 이를 바꾸기 위해 노력한 육우당을 잊지 말자는 담담하지만 잊지 말아야 할 마무리 발언을 해 주었다.

 

이후 앞에서 공연을 하기로 한 팀의 나머지 한 분이 도착하여 마지막 공연을 이어나갔다. 미스터어깨꿈은 ‘어차피 깨진 꿈’의 줄임말이라고 한다. 지난번 행성인에서도 강연을 해주셨던 박경석 노들장애인야학 교장선생님이었다. 공연자분들은 요즘 유행에 맞게 직접 만든 랩 가사를 소개시켜 주었다. 가사가 아주 인상적인데, 자신들은 ‘병신’이 아니라는, 조금은 직접적이면서도 우리 모두가 똑같은 사람이라는 메시지였다. 가사의 라임까지 잘 살아있어서 쇼X더머니 예선 통과 정도는 거뜬히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한편, 발언이 이어지는 중에도 부스 캠페인은 계속되었다. 지나가던 프랑스 교환학생들도 캠페인에 관심을 가진 듯 하였다. 활동가들에게 행사에 대해 물어보더니 메모지에 영어와 프랑스어로 응원의 메시지를 적어 붙이고 한참동안 진행되는 캠페인을 보다 갔다. 몇몇 활동가들은 "영어도 못하는 나는 이제 활동 못하겠다"는 농담을 하기도 했는데, 지속적인 활동을 위해 언어를 포함해 공부할 것이 산더미처럼 남아있다는 것은 사실인 것 같다.

 

 

글로벌 시대에 걸맞는 추모문화제

 

문화제가 막을 내렸다

 

그렇게 마지막 공연과 구호를 끝으로 육우당 13주기 추모문화제는 막을 내렸다. 단체 사진 촬영까지 마친 후, 사람들은 대학로 주변 행진을 위해 준비하기 시작했다.

 
4시 43분

 

오후 4시 43분, 펄럭이는 깃발과 스피커에서 울리는 'Born This Way'와 함께 행진이 시작되었다. 사람들은 각자 '혐오 할 시간 있으면 사랑이나 해', '청소년 성소수자의 인권 보장하라', '성소수자는 나이 순이 아니잖아', '우리는 벌써 성소수자다', '나는 이상하다, 고로 존재한다', '청소년의 성적자기결정권을 보장하라'는 메시지가 써있는 무지색의 종이를 들고 대학로 거리를 당당하게 걸어갔다. 행진을 하며 걸어가는 길에 앞에서 만난 프랑스 교환학생들을 다시 마주쳤는데, 이들은 행진하는 모습을 핸드폰으로 찍고 지나갔다. 아마 한국에서 잊을 수 없는 추억 하나를 쌓고 간다고 생각한 것 같다. 그들이 프랑스어로 무슨 대화를 나눴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들이 한국의 청소년 성소수자들에 대해 알게 되고 행사의 작은 순간이나마 함께 했다는 것은 분명했다.

 

중간 중간에도 행진 참가자들의 자유 발언이 이어졌다. 앞에서와 마찬가지로 청소년 성소수자가 여기에 있고, 단순히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만으로,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이유만으로, 스스로를 어떤 사람이라고 정의하는 이유만으로 차별받아서는 안 된다는 ‘이상’한 이야기를 거리에 있는 사람들에게 전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이야기를 주의 깊게 들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야기를 들은 사람 중 단 한명이라도 느낀점이 있다면, 그래서 전과는 다른 생각을 가지게 된다면 우리 곁의 차별이 조금이라도 줄어들 수 있지 않을까.

 

한편, 행진 내내 사복 경찰로 추정되는 사람들이 방해가 된다며 해산을 요구하였다. 더 이상의 차별을 막자는 목소리를 내려는 사람들과 그 목소리를 막으려는 사람들, 과연 누가 사회를 더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고 있고, 누가 사회가 더 살기 좋은 곳이 되는 것을 ‘방해’하는 지는 독자분들의 판단에 맡긴다.

 

 

“깃발아 휘날려라!”

“그래.”


5시 10분

 

5시 10분. 행진을 끝내고 돌아왔다. 모든 캠페인도 종료되었다. 사람들은 부스를 정리하고 짐을 챙기기 위해 분주히 움직였다. 모든 정리가 끝난 후에는 조만간 다시 만나자는 얘기와 함께 하루를 마무리 지었다. 어느덧 텅 비어버린 공원에서, 이 문화제가 있을 수 있게 노력한 행성인 청소년팀원들이 모든 마무리를 끝내고 남아있었다. 그래도 사실상 오늘의 주인공인데, 사진 한 장 정도는 찍어줘야 하지 않을까. 앞으로는 슬프고 힘든 일로 서로를 만나지 않고 행복한 일로만 만날 일이 있기를 바라며.

 

 

 

The end.

 

2003년 4월 26일 오후

 

“나 같은 이들이 다시 생기지 않도록 동성애자들의 차별을 없애는 데 힘써달라…사랑하는 형, 누나들의 한번의 노력이 다음 세대의 동성애자들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만들 것이다” - 육우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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