웅(행동하는성소수자인권연대)



장소를 구획하는 체제, 공간을 채우는 대기의 온도가 나의 세계관을 구축하고 관계를 엮는다. 반대로 공간은 행위자에 의해 사후적으로 의미 부여되고, 이질적인 사건과 행위의 개입으로 새로운 장소성을 얻기도 한다. 주체의 내적 성찰은 외부와의 소통을 통해 공간에 힘을 불어넣는다.

 

공간을 논하며 주체를 숙고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나의 계층과 지위, 정체성을 부여하는데 있어 공간은 빠질 수 없다. 공간은 물리적 속성 외에도 사회체제로, 추상화된 공동체의 이미지로 나를 둘러싼다. 구성원마다 경험을 채우고 공유하는가하면, 기억으로부터 나를 구축하고 우리의 공간을 생성한다. 기억하기 위한 주체와 공동체의 노력은 당사자가 속해있는 공간에 의미를 덧붙이거나 충돌과 협상의 과정을 거쳐 공간의 역사를 재차 발굴하고 번역한다.

 

최근 극적인 무대가 되었던 장소들이 있다. 사건으로 돌출되는가 하면 즉각적으로 SNS와 인터넷 뉴스, 영상매체를 통해 파급되어 이목을 모았다. 일상의 공간은 사건에 패였고, 패인 자리엔 사람들이 모여 일상에 착색된 문제를 끌어올렸다. 일시적이나마 담론이 형성되었으며, 다른 장소와 사건을 엮어가며 지속적인 문제제기의 장으로서 공간을 재정의했다. 사건이 공간을 만들고, 공간으로부터 새로운 사건이 생성되었다. 절박한 이들의 삶이 공명하고 문제제기하는 과정은 주체가 공간 위에서 어떻게 성찰하며 집단을 형성하는가를 보여준다.



논쟁을 촉발하는 혐오담론의 피뢰침

ⓒ 권우성


5월 31일 홍익대학교 정문 앞에 하얀 수인 오브제가 설치되었다. 조소과 4학년 홍기하씨가 '환경조각연구' 수업 과제로 제작하여 '환경조각연구 야외조각전'(5.31~6.20)에 전시한 석고 수인상은 일간베스트(이하 ‘일베’) 유저임을 가리키는 손 형상을 본떴다. <어디에나 있고, 아무데도 없다>라는 제목 역시 일베를 설명하는 공공연한 수식이다. ‘200만명 회원제 사이트지만, 공개적 활동을 거의 하지 않으며 혐오를 유통한다’는 것이다.

 

제작자는 학생이며 작가이다. 학교와 수업의 질서 아래 작업을 계획하고 동의를 얻어야 한다. 더욱이 작업의도와 설명이 점수에 직결되는 만큼 작가는 독립적일 수 없다. 편의적으로 제작자 의미의 ‘작가’를 붙이지만, 맥락을 고려해야 한다는 점에 일반적 작가 개념과는 거리를 둬야 한다.

 

제작의도로 써낸 문장은 간명했다. 어디에나 있지만 아무데도 없는 ‘비실체성을 실체화’한다는 것이다. 말인 즉 담론을 구현하고, 유동적인 현상을 결정(結晶)화하겠다는 선언이다. 말마따나 조각 자체는 기념비적 양식을 따른다. 학교 정문에 배치하는 장소 선정도 전형적인 모뉴먼트 선전물의 배치방식이다. 다른 점이라면 일반적인 기념비가 사후 인물과 사건을 반영구적으로 남겨두는 것과 달리, 일베 수인상은 현상하는 이미지를 일시적으로 구현한다는 것이다. 수업과제라는 제한적 맥락과 석고의 물질성 또한 일시적 성격에 일조한다.

 

수인의 손끝은 피뢰침처럼 비가시적인 일베의 그림자를 한 곳에 모아둔다. 실체일 수 없다는 일베의 정동을 물신화하고, 동시에 정동의 부스터가 된다. 어떤 의미에서든 홍대 정문은 잠시나마 ‘성지’가 되었다. 작품은 관심을 한 몸에 받았고, 계산해뒀는지 모르지만 작가의 한마디 한마디는 이슈가 되었다.

 

논쟁이 촉발된 가운데 작가는 석고상 뒤에 숨었다. 인터뷰에 응하며 일베와 관련된 '논란과 논쟁을 이끌어내기 위한 의도'였다고 명확한 의도를 둘렀지만 논란의 내용에 작가는 말을 아꼈고, 이야기할 필요도 느끼지 않는 듯했다. 의도적으로 관객의 버튼을 누르고 빠지는 술책이자 이기는 게임을 위한 거리두기로 보였다. 포스트모던 미술 뒤에 숨은 작가의 무관심한 거리두기의 무책임이 반복되었다.

 

문득 2008년 4월18일 서울 국제갤러리에서 김홍석 개인전에서 열린 ‘창녀찾기’ 퍼포먼스가 오버랩되었다. 전시 오픈 당일 120만원 상금을 준다며 진행된 이벤트는 관객 무리 중 성매매 여성을 찾으라는 것이었다. 단서도 주지 않은 행사는 성노동자 여성의 사회적 이미지와 인식에 편승하고 상금 앞에 계층을 박제하는 것으로 당시 크게 논쟁이 되었다. 작가의 입장은 이슈 유발 외에는 어디에도 없었다.

 

‘저자는 죽었다’는 롤랑바르트의 문장을 포스트모던하게 해석해온 90년대 말 이후의 작가군은 작가로서 주체를 삭제하고, 텍스트를 관객에게 던짐으로써 비주체성을 체현한다. 하지만 그럴수록 부재하는 작가의 그림자는 짙어진다. 담론의 전장 가운데 작가는 어디에 있는가. 씹다 버린 껌을 줍자고 관객들이 몰려드는 것이 아니라면, 작가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작업에 어떤 방식으로 책임을 지고 담론장에서 역할을 할 것인지가 작가주체의 윤리적 문제로 남는다.

 

수인상을 둘러싼 논쟁에 작가의 책임은 보류되었지만, 작품의 지분을 고수하는 점은 인상적이다. 작가는 ‘작품에 부정적인 반응을 예상했었다, 계란을 던질 수도 있겠다 생각했는데 실제로 일어나는 걸 보고 놀랐다’ 며 표현의 자유를 인정한다. 예의 거리두기는 일련의 부담에 불안하게나마 자유를 확보했을 것이다. 이와 상반되게 작품을 훼손하는 행위에 대해서는 책임져야 한다고 못 박으며 자못 단호한 면모를 보이기도 한다. 작업에 대한 거리두기를 견지하면서 작업의 물신성을 비호하는 것일 테다.

 

혐의가 붙는 지점은 담론의 피뢰침을 응시하는 작가의 시선이다. 혐오표현을 전시하는 것이라는 비판에 작가는 오브제가 제 손을 떠난 양 담론을 관망하지만, 동시에 오브제를 통해 담론의 중심을 점한다. 이는 실재하지 않는 척 하지만 어디에나 존재하겠다는 ‘팔루스’적 선언이다. 실체로 세워둔 작품 뒤에 작가 실체를 숨기면서 담론의 질서를 구획하고 관망하겠다는 것이다.

 

문제적인 화두를 던지는 예술의 전위적 속성을 들며 유럽과 미국 등지의 예를 들어 비교하는 접근도 있지만, 혐오표현에 대한 제도적 보호는커녕 장기적 담론이나 여론이 구축되지 않은 한국 상황은 선진적 맥락과 전혀 동등하지 않다. 더구나 ‘어디에나 있지만 아무데도 없다’는 일베의 공식은 책임 없는 표현의 자유만을 요구할 뿐이다. 전라도 낙인, 희생자 비아냥은 ‘일베’에 이르러 가시적인 집단으로 조직되었다. 일베는 불특정성과 익명성에 자신을 감추지만, 동시에 어디서든 존재를 드러낸다. 세월호 희생자와 유가족을 욕되게 하고, 서거한 전대통령을 희화화하며, 소수자 혐오를 즐기는 행위를 수행함으로써 일베는 제 실체를 구성한다. 여기에 작가는 다시금 일베를 ‘실체 없는 집단’으로 전제하고 굳이 그 실체를 구현함으로써 실체와 비실체의 순환을 역으로 수행한다. 쌍방향의 실체화가 교차함에 따라 일베 수인은 혐오수행의 실체를 눈가림한 실체로서 공공장소를 점한다. 수인상은 실체 없는 혐오를 방관하며 누가 책임질 것인지에 묵묵부답으로 응한다.

 

문제가 개별 작가에게 집중되는 것은 작가로서 작업을 전시한 학교와 수업환경에 대한 시선을 차폐할 우려가 있다. 어떤 맥락에서 제작되었는지, 작품제작과 장소선정을 용인한 학과와 교수의 입장은 어떤 것인지, 담론의 책임은 누가 지어야 하는지 물음표가 붙는 이상 결과물만 보고 이야기할 수 없다. 이번 사건에 대한 학교의 방관은 2014년 같은 행사에 전시된 ‘세월호 발언대’에 정치적 발언을 하지 않을 것을 요구하며 작가에게 각서를 쓰라고 했던 태도와 상반된다. 비일관적인 태도는 수업이 진행되는 과정에 작가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궁금해진다. 작가의 눈이 어떤 수업에서, 어떤 논의와 승인을 거쳐 만들어졌을까. 일베의 행위를 기념비화한 작업에 ‘다양한 입장표명’으로 치부하는 학교의 입장은 무엇일까. 책임을 표현의 자유로 에두르는 학교의 실체야 말로 논쟁을 관망하며 시스템을 좌우하는 대타자일 터, 솟구치는 담론에 몸을 피신한 작가에 대한 비판은 그의 의도를 비판 없이 속개한 조건들로 확장되어야 한다.

 

홍익대 총학생회를 비롯한 안팎의 단위와 개별 주체들이 성명을 내고 이를 물었다. 하지만 논쟁이 촉발되고 오래 지나지 않아 수인상은 자신의 신분을 밝힌 이들의 즉자적 분노에 의해 파괴되었다. 예의 반달리즘에 대해서도 의견이 갈린다. 즉각적인 관객의 분노 가득한 행동을 지지할 것인가, 호흡을 길게 잡고 작가의 책임을 물으며 그가 학생으로 소속된 수업의 진행방식과 학교의 입장을 물어야 하는 걸까. 판단의 선택지를 양분하는 것 역시 작업의 실체를 중심에 두는 함정에 빠지는 것은 아닌지 신중해진다. 이는 기념비적 설치물이 설치물로만 완성될 수 없는 근거이기도 하다.

 

 

부재의 장소에 모여드는 애도와 분노의 정동

 

의도적으로 어그로를 끌고 시각적 불편과 관심을 집중시키는 공간적 전략이 있다면, 대중의 기억을 통해 특정 장소에 의미가 집중되는 공간이 있다. 최근 대도시를 중심으로 일시적인 군중점거가 두드러졌다. 특히 최근에는 SNS를 통해 사람들을 순간적으로 집결시킴으로써 일시적인 점거 공간의 좌표를 산개한다.

 

점거의 배경에는 여러 상황들이 있다. 개발논리와 투기자본 앞에 생존공간을 사수하기 위한 시급한 투쟁이 있는가 하면, 장소의 주체가 사라진 자리를 기억하기 위해 모여드는 사후적 점거가 있다. 여기서는 애도를 바탕으로 이뤄지는 점거에 초점을 두고자 한다. 특히 근 몇 달 간 서울 한복판에는 애도를 목적으로 점유된 장소들이 있다. 집단 감수성의 민감도가 높아진 것일까, 사회의 부조리가 많아진 것일까? 둘의 선후관계를 단정할 수 없지만, 중요한 점은 희생자에 대한 공감이 사회구조적 문제와 연결되고 있음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애도의 공간에서 형성된 담론장은 추모와 기억을 바탕으로 사회에 문제를 제기함으로써 공간의 성격을 재정의한다.

 

지난 17일 새벽 서울 강남의 노래방 건물에서 낯선 남성에 의해 20대 여성이 살해당했다. 가해자의 진술에서도 드러나듯 명백한 증오살인이었다. 하지만 경찰은 정신질환자 소행으로 결론 내렸다. 그리고 2주가 지난 6월 2일 오후, 서울 지하철 2호선 구의역 스크린도어 사고로 용역업체 직원이었던 19살 김아무개씨가 숨졌다. 맥락은 전혀 다르지만, 두 사건은 제도적 약자와 사회적 소수자를 둘러싼 환경 안에 포개진다.

 

사건의 맥락을 읽어가는 집단의 해석이 사건을 ‘우발적 사고’, ‘묻지마 범죄’의 불특정성에 증오살해에 희생된 여성, 불안정한 노동구조와 부조리한 노동시스템에 의해 희생된 비정규직 용역노동자로 명명했다. 사후적 네이밍은 관점이 개입하기에 사회적이며 정치적이다. 이는 개별 희생을 공동체의 문제로 자리매김하는 것이기도 하다.

 

사회적 취약함은 공간의 미장센을 통해 가시화되었다. 밤과 어둠, 사람이 없는 좁은 장소에서 일어난 사건은 비정규직 용역노동자의 작업환경, 일상적 위험에 노출되어 있는 여성의 시공간을 압축한다. 절체절명의 순간, 희생자들이 느꼈을 공포와 절대적인 고립감을 읽어내는 행위는 사지로 몰아넣는 사회적 구조의 만연한 문제를 극단적으로 노출한다. 일상의 균열로부터 생사의 고립을 만드는 혐오를 읽어내고, 부당한 대우와 기관의 거짓 은폐를 드러낸다.

 

당사자가 사라진 자리에 당사자를 기억하고 당사자로부터 행동을 이끌어내는 의식화는 필름 느와르적 암흑공간으로부터 사건을 돌출해낸다.[각주:1] 불안과 고립이 집단적 분노로 끌어올려지면서 공간은 힘을 얻는다. 의식화된 매체는 CCTV의 몇 초 되지 않는 화면이 부르짖는 반혐오의 비명을 전달한다. 스크린도어 바깥 선로 난간에서 다가오는 열차를 몇 초간 마주해야 했던 공포와 두려움을, 살아남은 이의 절규를 전한다. 피륙으로 쓰인 유가족 발언문의 단어 하나하나가 충격과 슬픔으로 요동쳤고, 대중의 각성을 풀무질한다.

 

사진출처: 강남역 10번 출구 페이스북 페이지 (https://www.facebook.com/gangnam10th/)

 

두 사건이 발생한 장소는 추모의 자리가 되었다. 희생자를 애도하면서 삶의 위협에 노출된 환경에 공감하는 메모가 수천 장씩 붙고, 못 다한 삶을 안타까워하는 선물들이 놓였다. 사건이 빠져나간 공간은 비었지만, 비어있는 자리에 수천수만의 추모와 분노의 문장들이 유리벽을 가득 채웠다. 포스트잇이 잔뜩 붙어있는 강남역 캐노피와 구의역 스크린도어는 혐오와 부조리의 사선에 몰린 여성, 비정규직 노동자의 공간을 극적으로 돌출한 얼룩이고 괴물의 형상이었다. 수만 개의 문장들이 얼기설기 덩어리를 이루며 빌딩 숲 사이에 스크린도어 아케이드에 머리를 쳐들었다.

 

행동으로 돌출한 애도의 공동체 속에서 희생자는 매끈한 차별구조에 틈입한 맹점으로 공간을 찌른다. 여기 있어야할 당신의 부재에 대중의 울림은 증폭된다. 기억의 실체는 이 세상에 없지만, 연결된 기억은 거대한 실체의 행동으로 발현한다. 집단의 애도는 부재한 희생자의 자리를, 빠져나간 사건의 공간을 다시금 실체화한다. 실체가 없는 것처럼 연출된 일베의 혐오가 수인 오브제로 재차 실체화되며 기념비적 모뉴먼트로 솟아오른 것과 달리, 사라진 실체 위를 가득 채운 분노와 애도가 현장에 상연되며 새로운 실체로서 집단행동이 이뤄진다.

 

사건으로 의미화된 공간은 우리의 일상에 녹아 발견하지 못했던 차별을 재차 인식하게 했다. 강남역 사건의 경우, 지속적인 페미니즘적 발화와 의식화가 꾸준히 차별을 각성케 하고, 사건을 통해 폭발했다. 이미 지난해 메르스 사태 이후 온라인 게시판의 자조적인 의식화가 메갈리아로 발현된 바 있다. 일상적인 젠더차별구조를 흔드는 저돌적 움직임은 ‘나는 여성입니다’ 해시태그로, 이어 ‘나는 여성이 아닙니까’를 화두로한 성소수자 여성들의 집단적 운동으로 울림을 구체화했다. 뉴스의 가십처럼 공포를 선동하며 개인을 비인간화했던 범죄들에도 혐오가 구획되어 있음을 발견하게 되었다. 사회의 부조리로, 혐오와 차별로 세상에서 삭제되고 세상을 떠난 이들에 대한 기억이 집단 속에서 공명하고 연결된다. 희생자를 기억하는 수천 개의 행위 자체가 공간을 돌출하게 만든 것이다.

 

애도의 과정에서 사람들은 낙차를 체감하기도 했다. 가방 속에서 나온 용역노동자의 컵라면을 보며’ 조금만 여유가 있었더라면 덜 위험한 일을 택했을지도 모른다’는 기성 정치인의 발언은 공중의 애도공간이 모두의 공감과 연결될 수는 없음을 보여준다. 정신질환자의 범죄로 몰며 사건의 본질을 엄폐하는 정부부처의 수습이 있는가 하면, 희생자의 부주의로 사고가 난 것이라 단정하며 사건을 축소하는 해당기관의 무책임이 있었다. 사회에 만연한 혐오에 분노하는 태도를 반대하며 ‘순수한 애도’를 강조하는 비아냥도 있었다. 하지만 눈을 치켜 뜬 집단 대응은 공간이 어떻게 민주주의적으로 점유될 수 있는지 보여준다. 언어를 세공하고 이를 나누는 과정은 또 하나의 공동성명이 되었다. 우리는 ‘우연적으로 살아남은 존재’이자 ‘잠재적 희생자’이기도 하지만, 체제 위에서 타인을 삭제하고 무시할 수 있는 ‘(잠재적) 가해자’이기도 하다. 저항과 반성이 동시적으로 발생하는 집단적 각성은 비판적 주체의 성찰을 행동으로 연결하는 교두보가 된다.

 

혐오폭력으로 사건을 기억하며 자신의 아픈 기억을 문장으로 새기고 책임을 묻는 이들의 문장이 SNS를 통해 외부로 파급되었다. 강남역 캐노피는 혐오폭력을 기억하는 이들의 일시적 저장고 기능도 했다. 추모를 위해 현장을 들른 이들은 현재하는 혐오와 폭력의 경험들을 눈으로 읽을 수 있었다. 메모에서 메모로 눈을 옮기며 서로 간 공명하는 경험 또한 집단의식의 새로운 감각이다.

 

희생자의 생애와 교감하고 그를 둘러싼 환경에 자신의 위치를 동질화하면서 여기 모인 이들이 스스로를 ‘당사자’로 명명한다. 의도적으로 자극적인 화두를 던지고 솟구치는 담론에 작가적 거리두기로 피신했던 상황과는 궤가 다르다. 희생자가 부재한 장소는 사회의 혐오에, 부조리한 시스템에 희생되고 모인 공간으로 호출된다. 충격적인 사건의 현장은 당신과 내가 처한 취약한 현실에 동질감을 느낄 수 있는 장소이기도 하다. 지하철역 선로, 밤의 화장실, 공구 가방에서 나온 컵라면 하나가 구조에 얽매인 신체와 공간을 매개하고, 사라진 이에 대한 기억을 붙잡는 지표가 된다. 굶주린 그의 몸을 그리며 정부의 경영효율화로 안전업무를 외주화하고 매뉴얼을 무시한채 위험에 홀로 노출시킨 사회의 오작동을 연결시킨다.

 

 

 

사진출처: 구의역 스크린도어 9-4 승강장 페이스북 페이지 (https://www.facebook.com/guuiscreendoor)

 

희생자를 애도하고, 폭력의 기억을 담은 작은 메모들은 대도시적 스케일과 속도에 비하면 사소하기 그지없고 망각되기 쉽다. 하지만 문장이 기입된 종이쪽지들이 겹쳐 도시에 문제적 풍경을 만들고, 혐오의 경험을 이으며 폭력의 일상을 엮어내는 ‘풀뿌리 스펙터클’은 영세한 개별주체들이 사회에 문제를 제기하는 오랜 전술이다. 30년 전 미국의 HIV/AIDS 위기 당시 희생자를 기억하기 위해 만든 수만 장의 메모리얼 퀼트를 만들어 사람들과 기억을 나누는 행위처럼, 서울시민인권헌장이 폐기된 서울시청 본관 로비를 가득 채운 분노의 목소리들처럼 집단적 애도와 분노의 표출은 현장의 개별주체들을 연결하고 나아가 시공간을 공명한다. ‘연결될수록 강하다’는 문구가 우리가 차별당하고 있다는 경험을 연결시키고 착취와 배제에 저항한 역사를 관통한다. 강남역과 구의역으로 연결된 애도의 장소는 홍대의 자리로, 퀴어퍼레이드에 뒤이어 접한 올랜도 펄스 클럽 성소수자 총기난사 사건에 애도하기 위해 모인 군중으로 연결된다. 혐오가 폭력의 실재로 도래하고 집단 재난으로 출몰하는 시대에 애도의 장소들이 국지적으로 발생한다. 애도의 대상에 대한 우리의 기억은 그/녀의 생애를 발굴하고 공간에 엮는다. 연대의 지도를 그리는 시도는 다시금 어두운 하늘 위에 별자리를 그리며 우리가 살아낼 방향을 모색하는 행위이기도 하다.

 

어떻게 기억할 것이며, 기억을 어떻게 남길 것인가. 끝없는 질문을 만들어내는 비판적 성찰이 공간의 가능성을 연다. 비판적 집단행동이 공간의 성격을 규정해나간다. 그리고 새롭게 의미 부여된 공간이 주체를 의식화한다. 공간에서 일어난 사건이 공간을 통해 기억되고, 공간을 경유하는 추모와 분노가 행동으로 이어진다. 공간과 기억을 어떻게 연결시킬지에 따라 세상을 바라보는 시야가 넓어진다. 공간과 주체는 상호작용한다.

 

 

절체절명의 일시적 점유, 지속적 발화 
 

사진출처: 강여사 님 트위터 (https://twitter.com/goodnearing)

 

집단의 목소리가 교착되었을 때, 당사자의 삶은 고립되고 위축된다. 교섭과 소통의 통로가 막힌 상황에서 주체는 무단, 불법으로 구분되는 행위를 실행한다. 일방적인 점거이지만, 폭압에 생존이 막힌 상황에서 당사자의 몸부림은 무시와 망각의 공간에 균열을 내고자 한다. 계란으로 바위치기와 다름없지만, 공중 점거는 많은 이들이 목격할 수 있는 장소적 이점을 취한다.

 

6월 2일 오후, 경기도 수원시 수원역 앞 육교에서 휠체어장애인이 육교에 묶어놓은 줄에 매달렸다. 경기 420장애인차별철폐공동투쟁단(이하 경기420공투단) 이도건 집행위원장이었다. 시위는 앞선 사례들보다 짧게 진행되어 한 시간도 채 지나지 않아 끌어내려졌다.

 

이미 지난 5월 13일부터 경기420공투단의 경기도청 점거가 이어지는 상황이었다. 이들은 경기도에 장애인 이동권 보장, 최중증장애인 24시간 활동지원, 장애인 지역사회 자립생활권리 보장 등 10대 요구안의 수용을 촉구하며 도청 예산담당관실을 점거했다. 최근 경기도가 약속한 각 시·군의 장애인 이동권 예산을 무산시킨 태도는 도지사가 시·군의 특별교통수단 도입과 운영에 필요한 예산을 최대한 지원하도록 규정한 ‘경기도 교통약자의 이동편의증진에 관한 조례’ 19조를 위반한 것이기도 하다.

 

장애인이동권이 보장되지 않는 사회에서 장애인은 ‘어디에나 있지만 아무데도 없는’ 이의 표본처럼 인식된다. 하지만 비슷한 수식을 공유하는 일베가 타인을 짓누르며 심리적 안식처를 확보하는 안락을 취한다면, 후자는 나를 불안정하게 만들고 비정상으로 호명하는 체제에 문제를 제기한다는 점에 다르다. 차별적인 체제 위에서 차별받는 타자로서 나를 드러내는 것은 내면의 두려움과 자기검열 뿐 아니라 외부에서 주입하는 무식와 무관심, 수치심과 혐오를 이겨내는 시련을 감내하겠다는 의지표명이기도 하다.

 

공중이라는 공간적 위험부담을 지고 생사를 건 투쟁은 일차적으로 대중에게 충격효과를 주지만, 수개월, 수년을 이어가는 공중점거는 지구전을 피할 수 없다. 심신의 고통을 담보해야 하며, 올곧이 나 혼자 만들 수도 없는 것이다. 일베의 수인이 학교의 수직적인 용인과 기만 위에 구현되었다면, 생존을 건 싸움은 물밑 연대와 지지를 기반으로 지속할 수 있다. 몸을 던진다는 점에서 소신공양에 가까운 싸움은 담론의 씨앗을 뿌린다. 이 과정에 만들어진 연대의 사다리는 더 이상 절규가 필요 없는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는 과제를 재차 상기시킨다.

 

허공에 매달린 시위는 즉자적 절규의 가시성 전략을 택한다. 소통을 단절하고 고립무원을 자처하는 상황은 이제껏 살아온 당사자의 삶을 압축한다. 사선에 직접 올라 자신의 절규를 공중에 울리는 행동은 역설적으로 ‘어디에나 있지만 아무데도 없는’ 이가 어딘가에 존재함을 알리며 존엄한 생존을 외치기 위한 신호를 보낼 수 있는 최후의 전술이다. 타협의 여지가 없는 싸움은 극한의 고독과 고통, 두려움을 수반한다. 생존을 위한 싸움은 일시적 점유를 통해 질서정연한 공간 위에 가시를 돋우며 이슈를 가시화한다. 1931년 5월 29일 평양을밀대에서 최초의 고공농성을 벌인 강주룡에서 시작된 계보는 생사를 걸고 자신의 권리를 찾기 위한 고독한 투쟁의 역사를 그린다. 그 자신이 발을 딛고 있는 땅은 없지만, 역으로 모든 공간에 노출되어있다. 공중에 매달려 보내는 전파는 미세하지만 단단하다.

 

비일비재하게 공중의 투쟁이 명멸하는 한국사회는 소통이 부딪혀 질식해가는 이들이 숨통을 트기 위해 결사적으로 땅 끝으로 올라온 두더지 같기도 하다. 곁을 놓지 말고 비참함을 함께 안으며 끈질기게 싸워야 한다는 메시지를 두더지에 비유한 엄기호의 통찰에서 더 나아가 두더지는 오랜 시간 땅 속에서 지층의 압력을 받고 동료와 함께 투쟁하다 어느 순간 땅 위로 박차고 올라와 눈먼 시선을 두리번거리고 신호를 보내며 당신과 같은 이들에 주파수를 맞춘다. 프리미엄 고속버스 등 이익이 되는 사업에 밀려나며 존재를 부정당하는 장애인의 투쟁은 밀양송전탑으로, 강정으로, 세월호 광화문농성장을 건너 반올림 농성장과 유성기업 농성장으로, 옥바라지 골목으로 지도를 그린다. 티브로드 하청 해고노동자가 한강대교 위에서 해고자 전원 복직과 고용승계 보장을 요구하는가 하면, 시청광장을 바라보는 광고탑 위에 기아자동차 고공농성자들이 1년 가까이 기아차 불법파견과 정몽구 회장 처벌을 요구하고 이제사 땅을 밟았다. 지난해, 시청광장에서 퀴어퍼레이드 행진단을 향해 손흔들던 이들의 빛나는 인사가 기억에 남는다. 하지만 땅을 밟고 이들을 기다리는 동료의 환대를 짓누르는 것은 경찰력이었다. 투쟁은 어디에서든 진행중이다.

 

 

언급한 공간들은 현재성을 띠기에 시급하고, 그 수명도 길지 않다. 기념비는 철거될 것이고, 애도와 분노의 공간도 곧 일상을 찾을 것이다. 나의 공간은 언젠가 파괴될 것이고, 폐허 위에 우리는 삶을 모색할 것이다. 그렇기에 공간에서의 기억이 중요하다. 지금 나의 공간에서 일어나는 시간들을 읽고 나의 언어로 남기는 작업이, 나의 언어를 집단의 목소리로 공명시켜 행동을 모색하는 작업이 중요한 까닭이 여기 있다.

 

그리고 우리의 공간을 이야기할 필요가 생겼다. 퀴어퍼레이드가 성황리에 마무리되었다. 수만 명의 성소수자와 지지자들이 광장에 모였고, 이는 일 년에 한번 대낮에 볼 수 있는 성소수자 스펙터클이다. 성소수자를 ‘군중’으로 부를 수 있는 자리이고, 시청광장이라는 상징적 공간에 모였다는 점만으로 퍼레이드가 갖는 의미는 크다. 반대세력 역시 이날 자신들의 세를 거리 위에 가장 크게 보여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삼았다. 지난해와 마찬가지로 경찰펜스를 사이에 두고 행사장 주위에 집결하여 반동성애의 판을 벌였다. 우리만의 축제라고 기념하기엔 전장의 성격이 짙고, 그럼에도 펜스가 무색하게 너나 할 것 없이 흥을 돋는 풍경은 기괴하다. 한국 특유의 역동성이라 칭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만, 그만큼 읽어낼 요소들이 산재해있다.

 

하지만 성대한 행진이 끝나고 고무된 에너지를 기억하기도 전에 미국의 성소수자 집단 총격사건이 들려왔다. HIV/AIDS 합병증으로 떠난 형제를 기리며 만든 클럽에서 발생한 사건이다. 사건을 접하고 많은 성소수자들이 공동체의 고취된 자긍심이 언제라도 생의 경계에 몰릴 수 있음을 확인했다. 애도의 역사 위에 증오가 한 차례 휩쓸면서, 반복되는 희생에 대한 애도를 고민하게 된다. 증오에 맞서 우리는 누구와 싸워야 하는지, 누구를 설득하고 협력하며 무엇을 원해야 하는지 새로운 고민들이 보태진다. 당신 삶의 끝이 던진 날카로운 문제제기가 우리를 영원히 포박한다. 생애의 마지막이 삶의 시작이라는 과제를 다시금 확인한다. 당신을 기억하며 지금 여기, 우리를 계속해서 읽어내는 작업이 한국사회의 성소수자 위상을 논할 수 있는 조건일 것이며, 지정학적 측면에서 성소수자 공간을 이야기할 수 있는 시작이 될 것이다.

 

 


 


  1. 공간의 장르적 속성은 손희정 선생님의 아티클에서도 이야기된다. 경향신문, [청춘직설]성(性)과 장애의 관점에서 보기, 2006. 6. 7. 링크: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606072120005&code=990100 [본문으로]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댓글을 남겨주세요

Name *

Password *

Link (Your Homepage or Blog)

Comment

Secr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