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에 나는 주택에 살았었다. 주택은 마땅한 놀이터가 없었고 나는 항상 동네 친구들과 차가 다니는 동네 골목에서 놀아야 했다. 그곳엔 놀이기구도 없었고, 보드라운 흙들도 없었지만, 우리의 골목은 우리의 공간이었다. 낮이면 우리가 맘껏 뛰어놀 수 있는 우리들만의 공간이었다.
놀이터란 뭘까. 세상을 놀이터에 비유한다면, 성소수자들은 세상의 놀이터에서 소외되어 있는 셈이다. 우리의 공개적 공간은 만들어지기도 힘들고, 우리는 일반들이 만들어놓은 놀이터 속에서 그들인 것처럼 놀고 즐겨야 한다. 물론 그들의 놀이터는 우리에겐 재미없고 심심한 공간이다. 우리는 그들과 다른 놀이터에서 우리들만의 공간을 갖고 싶다.
특히 청소년들은 더 심하지 않을까. 온통 성인들을 위한 놀이터인 이 세상에서 그들이 놀 수 있는 공간은 없다. 특히, 성소수자 청소년들이 갈 공간은 더더욱 없다. 그래서 나는 이번 놀이터가 참 반가웠다. 청소년. 그리고 성소수자인 그들을 위한 놀이터가 생겼다는 소식을 듣고, 나는 그들과 함께 놀아보기 위해서 놀이터를 방문했다.
스스로 만든 공간을 향유하다
이반 놀이터의 스탭은 모두 10대들이다. 기획단계부터 마무리까지 모두 10대 스탭들에 의하여 행사는 이루어진다. 사실 이제까지의 청소년 행사들은 대부분 성인들이 기획하거나 혹은 10대가 참여한다고 해도 주도적인 위치 혹은 조언적인 위치에서라도 성인들이 참여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 놀이터는 오롯이 10대들이 준비한다. 그들이 행사의 이름을 정하고, 장소를 섭외하고, 홍보를 하고, 프로그램을 기획한다.
물론 10대가 행사를 기획했다고 해서 그것이 온전히 10대들을 위한, 혹은 그들의 마음을 가장 잘 이해하는 행사라는 건 잘못이다. 하지만, 분명 10대들이 기획하는 행사라는 점은 의의가 있다. 그리고 그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신청자의 수는 올해 100명이 넘었다. 그것은 이것이 참여하는 10대들의 마음을 잘 읽었기도 했고, 그들의 커뮤니티가 단단함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실제로 참가자인 거북이씨는 이번 행사에 두 번째 참가하고 있으며, 이 행사가 10대를 대상화한 다른 프로그램들과 달리, 10대들이 행사를 기획해서 좋았다고 말했다. 그리고 스탭이었던 맑음씨도 이 행사의 특징으로 10대들이 만드는 행사라는 점을 말했다.
자유롭고, 의미있게 놀자
놀이터라는 제목은 프로그램 자체가 ‘놀자’라는 의미가 강하게 내포되어 있다. 하지만 프로그램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노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의미있게 놀겠다는 기획단의 의도가 잘 보인다.
우선 누구나 관심사인 연애이야기로 프로그램을 시작했다. 맑음님과 불곰님의 연애이야기에 참가자들은 집중했다. 일반 학생들과 생활하면서 그들의 연애이야기만 들어야 했던 참가자들에게 연애 강의는 아무래도 관심이 갈만한 주제가 아니었나 싶다.
프로그램 사이 쉬는 시간에도 어느 학교에 온 것처럼 왁자지껄한 참가자들을 만날 수 있었다. 수다보따리를 풀어놓는 참가자들의 대화 속에서 자기와 비슷한 친구들을 만났다는 안도감이 자리 잡고 있는 듯 했다.
골든벨이 끝나고 강의가 시작되었다. 학교에서 하는 성교육을 들을 때의 지루함은 온데간데 없고, 참가자들은 강연자의 섹스강의에 집중했다. 숨차게 달려와서 힘들 법도 한데, 이어 조를 짜더니 참가자들의 끼를 보여주는 시간이 왔다. 수학여행의 장기자랑을 준비하듯, 참가자들은 자신들의 공연을 결정하고, 또 다른 조의 공연에 열렬한 박수를 보냈다. 그리고 마지막 강의까지 마치고 나서야 프로그램이 끝났다.
앞으로 더 재밌는 놀이터가 되기 위해
반나절 정도 진행됐던 놀이터는 하루에 많은 프로그램을 진행하다 보니, 한번에 너무 많은 것을 담으려고 한 것 같았다. 그래서 참자가들의 집중도가 뒤에서 떨어지는 것 같았고, 프로그램도 준비된 프로그램을 모두 진행하느라 애를 먹는 모습이었다. 다음엔 이틀 정도 여유있게 프로그램을 잡거나 혹은 하루에 진행하게 된다면, 좀 더 프로그램을 줄이면서 충분히 내실있는 진행을 할 수 있다고 생각이 들었다.
놀이터에서 실시된 연애를 제외한 두 번의 강연은 사실 레즈비언에 해당하는 내용이 주류였다. 그래서 참가한 레즈비언들에게는 좋은 정보가 될 수 있었지만, 다른 성적 지향을 가진 친구들에게 조금 소외감을 주지 않았을까 하는 걱정이 들었다. 많은 성적지향을 가진 친구들이 놀러오는 놀이터이니 만큼 더 많은 성적지향을 고려한 프로그램들이 생겼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또 참가자가 워낙 많다보니, 스텝들의 일이 분리되지 못하고, 또 스텝들도 아는 사람들을 위주로 챙기다 보니, 소외감을 가진 처음 참가자들이 있을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놀이터에 더 많은 사람들이 함께 놀기를
하지만 놀이터는 이제 세 번째를 맞이했다. 앞으로 더 많은 친구들이 참여하고 발전시킬 수 있는 놀이터이다. 그리고 여전히 이 놀이터는 참가자들에게 의미있는 공간으로 남을 것이다. 그들이 놀 수 있는 곳이 부재한 현실속에서 이 놀이터가 그들에게 주는 의미는 크다고 본다. 그래서 이 놀이터를 만들어가는 사람들은 이 놀이터에 대해서 더 고민하고 많은 사람들과 함께 이 놀이터를 만들어 갔으면 좋겠다.
이 놀이터가 시간이 지날수록 10대 성소수자들이 꼭 참가하고 싶은, 매년 10대 성소수자들이 가장 많이 모여 놀 수 있는 놀이터로 자리잡기를 바란다.
욱 _ 동성애자인권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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