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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성인 20주년

[20주년 맞이 역대 운영위원장의 글] 행동하는성소수자인권연대의 20주년을 축하드립니다 - 내 삶을 바꾼 단체, 행성인

by 행성인 2017. 9. 6.

이경(행동하는성소수자인권연대)

 

 

동인련, 이제는 행성인이 벌써 20주년이랍니다. 오랜 시간 회원이자 활동가로 있었다는게 특별한 일은 아니지만, 저에게 이 단체는 특별합니다. 어쩌면 20대와 30대 전부를 관통하는 유일한 공간이라고도 할 수 있겠네요. 그만큼 여기서 만난 사람들, 겪었던 일들은 제 삶을 변화시켰어요. 저 또한 누군가에게 그런 사람이었을까요? 서로의 삶을 변화시킬 일들을 우리가 함께 만들어왔을까요?

 

행성인을 처음 만난 건 2001년 늦가을 어느 집회에서였어요. 다른 회원들도 행성인과의 첫 대면의 경험을 비슷하게 말해요. 몇 년 전에 행성인 회원들에게 설문조사를 했거든요. “거리에 오롯이 선 무지개 깃발”. 그것이 행성인의 첫인상이었어요. 광장에서 나를 알아봐주고 내가 알아볼 수 있는 시그널. 한미 FTA 반대 집회에서, 반값 등록금 집회에서, 노동자대회에서, 부산 영도의 85호 크레인 앞에서, 퇴진의 촛불을 든 겨울 광장에서, 우리가 모이는 모든 광장에서, 무지개를 쫓아온 사람들을 만나고 이들과 함께 행성인을 이루게 되었죠.

 

“함께 행진할까요?”

 

행성인은 연대의 자리에서 많은 회원을 만났습니다. 함께 세상을 바꾸려는 사람들과 거기에 무지개 색의 자긍심과 함께 행진한 시간들, 그것이 행성인 20년의 색깔을 만들어 왔다고 생각해요.

 

때로는 함께 지내온 주변 사람들의 삶이 나를 바꿉니다. 제게는 행성인 회원들이 그랬어요. 그래서 제게 행성인에서의 성소수자 운동은 옆에 있는 친구의 얼굴처럼 늘 구체적이었어요. 육우당과 함께 한 시간은 청소년 성소수자 인권활동의 밑거름이 되었어요. 2003년 어느 집회에서 처음 만난 윤가브리엘은 제게 HIV/AIDS 인권 운동의 창이 되어주었습니다. 2009년 뇌종양으로 애인을 잃고 마음 둘 곳이 없을 때 행성인 회원들은 그를 함께 기억해주고 위로가 되는 소중한 공동체이기도 했습니다. 성소수자 노동자로써 자신의 삶을 들려준 소중한 분들도 생각나네요. 나는 남자도 여자도 아니라고 하셨던 우체국 노동자 선배님의 삶을 통해 성별로 갈라진 일터를 정말 바꿔야겠다고 마음 먹게 됐고요. 수 년 전 신입회원 모임 참석자를 맞이하러 나간 충정로역에서 만난 이들이 지금은 행성인에 없으면 안될 활동가들이 되었습니다. 지난 15년간 행성인에서 만난 모든 사람들이 제 삶을 채워주었습니다. 그리고 행성인을 통해 내 삶이 바뀌어갔어요.

 

행성인은 20년 중 가장 큰 변화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힘에 부치는 일도 많고 앞이 잘 보이지 않기도 하지요. 많은 성소수자들이 직접 나서고 있고, 그만큼 활동 영역이 넓어졌습니다. 요구와 기대가 커지고 있는데 그에 비해 공간도 돈도 사람도 부족한 운동이 바로 성소수자 운동이거든요. 하지만 정말 가슴 뛰는 변화입니다. 지금껏 부단히 노력해온 성소수자 단체와 활동가들의 역사를 기억하면서요. 더 이상 숨죽이지 않고 눈에 보이는 사람으로 살 것이며, 내가 나서서 변화를 이루겠다고 선언하는 성소수자들을 통해 성소수자 운동의 현재와 미래를 가늠하는 시기입니다. 내가, 스스로, 바꾸겠다는 사람들이 행성인과 함께 하고 있습니다. 다양한 정체성만큼 다양한 모임이 운영되고, 다양한 성소수자 운동의 요구가 표출되고,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한 영역에서 연대하게 된 것만 봐도 그런 변화를 느낄 수 있습니다.

 

제게 어떤 운동이 필요한지 묻는다면 저는 한 명 한 명이 지닌 힘을 조직하는 운동, 나의 힘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지게 되는 운동, 그러한 경험을 축적해가는 운동이 행성인이 가장 잘 할 수 있는 운동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러니까 저는 앞으로도 그러한 힘을 엮어내는 조직활동가이고 싶습니다. 사람 한 명의 역동이 만들어내는 파장은 큽니다. 다만 그걸 단체가 어떻게 확장하고 연결시켜줄 수 있는지에 따라 그 힘은 배가 될 수 있습니다. 제가 15년 전 동인련이라는 단체를 통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았고, 그것을 찾기까지 적극적으로 도와줬던 동지들이 있어서 행복했던 것처럼, 지금 행성인에 그런 회원들이 더 많이 필요합니다.

 

동인련부터 행성인에 이르기까지, 이 작은 곳에서 짧게든 길게든 함께했던 많은 분들이 있습니다. 덕분입니다. 저를 여기까지 데려와주셔서 고맙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끊임없이 내 삶을 바꾸는 단체, 행성인에 더 많은 분들이 함께 해주시면 좋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