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벗(행동하는성소수자인권연대웹진기획팀)
제가그동안 경험해왔던 교육은
오늘날 보통 교실(강의실) 안에서의 구도는 항상 교사(교수)와 학생(수강생)으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그 구도에서 힘은 가르치는 교사에게 절대적으로 부여되어 왔고요. 교실 앞 쪽 칠판은 오롯이 교사의 영역이고 교사의 지시 (혹은 명령)에 한해 칠판 앞으로 나갈 수 있어요. 또한 질문이나 대화도 마음대로 할 수 없어요. 그 시간은 교사의 시간이거든요. 질문을 하더라도 질의 응답정도로 축소 되고, 설령 기회가 오더라도 질문은 쉽지 않아요. 교사는 해당 과목의 지식 정보를 꿰차고 있다고 여겨지기에, 그 질문이 교사로부터 검열 당할까 (예를 들어, 내가 수업 내용에 벗어나는 질문을 하는 건 아닐까) 두렵거든요. 우리는 교사로부터 일방적으로 끊임없이 정보를 주입당함으로써 그 수업은 진행됩니다. 그 자리에 계속 앉은 채로 한 두시간 동안 내내 한 사람의 혼잣말을 경청해야만 합니다. 대학을 다니며 수강하고 있는 지금도, 그런 교수님들의 수업을 들을 땐 절로 몸이 비틀어지고, 핸드폰을 쳐다보고싶다는 충동이 일어요. 그 와중에 전달되는 지식들은 귀를 통과하고는 흩어지고 말지요. 필기를 하더라도 평소에는 들여다보지 않고, 그나마 시험이 닥쳤을 때 열어보고는 노트를 닫아버려요. 저의 경우, 그동안 학교에서 배운 교육 내용들을 제 일상 곳곳에 적용하고 내면화했던 경험은 극히 드물었던 거 같아요. 그나마 겨우 제 관심사에 해당하는 경우에 한해서 말이죠. 그 관심사가 수업중에 다뤄졌을 때, 저는 한편으로는 그에 관해 교사에게 여러 질문을 던지고, 또 주변 학생들과 생각을 나눠 보고 싶은데 다른 한편으로는 그게 참 쉽지 않아요. 질문과 대화를 하려면 교사의 수업 진행을 중단해야 하고, 흐름이 끊기고, 교실이 소란해지고, 때문에 교사가 설정해놓은 진도에 도달하지 못할 수도 있어서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질문을 꼭 해야겠다고 하면 망설임을 안고 용기를내어, 또 시간 뺏는 걸 미안해하면서 하게 돼요.
이런 구도가 유치원, 초중고, 그리고 대학교에서까지 이어지면서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걸로 여겨왔던 거 같아요. 저 뿐만 아니라 다른 많은 분들도 학교에 대한 기억이 이와 비슷하리라 생각해요. 또 이는 오랜시간 지속되어 왔고요. 배움의 현장에서 교사와 학생 사이에는 늘 그렇게 힘이 작동했어요. 그렇다면 과연 ‘배움’이란 뭘까요? 교사가 일방적으로 전달한지식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기만 하는 게 과연 정상일까요? 그 지식을 외워서 시험을 치루고 좋은 성적을 받았다면, 그건 과연 제대로 된 ‘배움’일까요? 막상 우리는 시험이 끝나고 문제집과 시험지를 버리고 심지어 불태우는데도요. 만약 그렇지않다면 당연히 바뀌어야 하지 않을까요? 그 ‘배움’이 그저 점수가 올랐다는 성취에 그치지않기 위해서요. 성적의 변화가 아니라 ‘나’의 변화로 이르도록 말이죠. 모든 교육 현장이 그렇게 바뀔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싶지만 정말 쉽지 않은 일 이에요.
우선, 권력의 위계가 뚜렷하게 작동하는 교육 현장에서 바로 이 권력, 힘power이 분산되어야 하니까요. 교사와 학생, 누군가가 권한을 내려놓고 다른 누군가에게 그것을 넘겨준다는 건 어려운 일이에요. 어떤 교사들은 민주적으로 수업을 진행하고 싶다고 말하면서도,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다며 고민을 토로하기도 해요. 부여된 교사의 권한을 내려놓고 학생들과 함께 수업을 진행할 의사가 있는데, 그 마저도 방법을 몰라서 할 수가 없는 거죠. 이미 그 구조가 고착화되어 있으니까요. 어찌보면 이 권력 관계는 한국 사회에 깊게 뿌리박혀있는 기성의 권력 구조와 위계 질서의 연장선이 아닐까 해요. 학교에서는 교육을 통해 그것이 재생산 되고요. 그렇다면 교육 현장 안에서의 이 위계적 구도에 균열을 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할까요? 불평등한 권력 관계의 구조가 당연하게 작동하게끔 만드는 ‘문화’부터 바꾸려는 노력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물론 이 문화를 바꾸려는 움직임은 사회 구석구석 여러 곳에서 일고있어요. 저는 그 움직임 중 하나로 ‘평화교육’에 대해서 이야기하려고 해요. 저는 한달 전부터 대학 강의를 통해 ‘평화교육’에 참여하고 있어요. 그런데 이 강의는 저의 경험상, 전에 겪어 본 적 없는 전혀 새로운 교육(수업) 이라서 제 교육 수기를 회원들과 한번 나누어보면 어떨까 싶은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이 웹진을 빌어 몇차례 나누어 써보고자 합니다.
평화 교육이 말하는 ‘평화’와 ‘교육’은.
저는 평화라고 하는 것에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았어요. 그저 이상적이면서도 추상적인 개념 정도로 여기고는 말았죠. 그나마 주변에서 평화에 대해서 들었던 기억을 돌이켜보자면, 남북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때나, 성당에서 ‘평화를 빕니다!’ 하고 인사를 하거나, 어느 고즈넉하고 조용한 장소에 갔을 때 평화롭다, 라고 표현했던 경우가 전부인 것 같아요. 여러분은 ‘평화’라고 한다면 어떤 기억, 이미지가 떠오르시나요? 사실 일반적으로 평화는 전쟁, 불안, 폭력이 부재한 상태로 이해되어왔어요. 특히 여기서 폭력이라고 하는 것도 직접적인, 물리적 폭력에 국한 되어서요. 하지만 전쟁이 없다고, 불안하지 않다고, 폭력이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그 자체로 평화의 상태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가시적인 전쟁이 없더라도 분단의 긴장상태가 줄곧 이어져오고, 나는 평안하지만 그게 다른 누군가에겐 폭력이 되고, 직접 폭력 상황에 놓여있진 않지만 지속적으로 착취 당해 오고 있다면요?
평화교육에서의 평화는 직접적, 물리적 폭력에만 국한하지 않고 그것을 작동하게끔 만드는 구조적 폭력과 문화적 폭력에까지 주목합니다. 일상 속 관계 안에서 가볍게 오고가 는언어 〮행동에서부터 특정하게 벌어진 사건에까지 폭력이 어떻게 반복적으로 구현되어 구조화되고, 문화적으로 어떻게 합리성, 정당성을 띄는 지 말이에요. 그 폭력은 바로 불평등한 권력 관계에서 만들어지고요. 따라 서평화 교육은 바로 우리 일상과 주변, 그리고 사회에 자연스럽게 자리잡고있는 불평등한 힘의 관계를 배경으로한 모든 차별과 폭력의 구조와 문화에 대한 감수성을 키우는 교육이라고 생각해요. 그 구조와 문화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관계와 관계 사이의 복잡하게 얽혀있는 갈등을 구체적으로 분석하고 파악함으로써 갈등의 성격을 전환시키고 더나아가 예방의 차원으로 가져가는 것으로까지 이어지도록 하는 게 평화 교육의 목적이에요. 그런 의미에서 평화 교육이 추구하는 평화란 직접적 폭력의 부재를 넘어 구조적, 문화적 폭력의 부재를 지향해요. 평화학자 요한갈퉁의 말을 빌리자면, 평화란 “모든 종류의 폭력이 없거나 폭력이 감소하는 것”, “갈등을 비폭력적이고 창조적인 방식으로 변형하는 것”이에요.
그래서 평화교육에서는 먼저 낯설게하는 작업을 많이 합니다. 낯설게하는 작업이란 말 그대로 교실 안에서 익숙하게 물들어있던 것들, 일상적으로 자연스레 행해지던 것들에 균열을 내는 작업인데요. 먼저 교실의 구도부터 바뀝니다. 병렬적으로 줄세워져있는 책상들은 해체되어 원을 그리고 그 원을 따라 학생들이 앉습니다. 교육 진행자도 예외는 아니고요. 교육 진행자에 대한 호칭도 –교수님, -선생님이 아니라 이름 뒤에 –님을 붙여서 부릅니다. 이는 학생들이 서로를 부를 때에도 마찬가지에요.
강의가 있기 전에 사전에 지정된 자료를 읽어오는 숙제가 있는데요. 이를 토대로 토론이 진행됩니다. 보통 토론이라고 한다면 딱딱하고 긴장이 흐를 것 같지만, 이 강의 안에서 만큼은 그렇지 않습니다. 해당 자료를 읽고 드는 생각을 되짚어보는 작업으로서 서로 ‘대화’를 나눕니다. 교육 진행자는 토론 중에 자료의 주제와 조금은 벗어나도 괜찮다 고격려해요. 이와 관련한 정말 중요한 규칙이 있습니다. 간단히 말하자면 ‘좋아좋아’, ‘서로서로’, ‘많이많이’, ‘섞어섞어’ 등 총 네가지인데요. 먼저, ‘좋아좋아’는 주류교육에 익숙해진 우리들(학습자)이 수업 중 공개적으로 말하기가 낯설고 두렵고 걱정스러울 수 있는데 이로부터 벗어나 보다 자유롭고 다양하고 역동적으로 자신의 생각을 말할 수 있도록 화자의 말에 “좋아요, 괜찮아요”하며 격려하는 것입니다. ‘서로서로’는 특정한 사람만이 말하는 게 아니라 최대한 많은 사람들, 구성원 전부가 다 대화에 참여함으로써 다양한 사유들이 오갈 수 있도록 독려하는 걸 말합니다. ‘많이많이’와 ‘섞어섞어’는 대화에 있어 축적의 역할을 합니다. 대화의 내용은 최대한 많을수록 그리고 다양할수록 좋으니까요. 이렇게 서로의 다양한 이야기가 자유롭게 나누어질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된 것 만으로도 구성원들 모두 입가에 미소를 띤 채로 수업에 참여할 수 있어요. 또한 그래서 사실 교육 진행자와 학습자 간의 경계는 생각보다 짙지 않습니다. 물론 교육 진행자가 학습자들이 모르는 개념을 전달할 때에는 가르침-배움의 구도가 잠시 형성 되지만 그것은 진행자로서 역할일 뿐, 우열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구성원들 한명 한명이 모두 자기 목소리를 가지고 있고, 또 자신을 자유롭게 표현하죠. 그동안의 주류 교육에서는 교육자의 일방적인 ‘가르침’이 그 중심이라면, 평화 교육은 ‘배움’입니다. 우리는 구성원 간의 이러한 ‘서로배움’을 통해 더많이 배우고 사유하고 성찰할 수 있으니까요. 평화 교육은 평화-폭력의 개념과 담론에 대해 그리고 이의 배경이 되는 권력의 이해 관계에 대해 본격적으로 들여다보기 이전에, 이처럼 먼저 현장에서 권력을 분산시킵니다. 그리고 그렇게 분산된 권력은 더이상 부정적 의미를 담고 있지않아요. 관계안에서 긍정적으로 상호 작용 합니다. 서로의 영감을 나누고 관심사를 공유하고 의문을 던지고 함께 답을 찾아가는 과정을 거치면서, 그것을 자신의 일상에 대한 반성과 성찰의 기회로 바꾸고 제 것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권력은 건설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불평등한 권력 관계 안에서 차별과 억압, 폭력으로 드러나는 게 아니라 서로에게 긍정적이고 건설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힘em-power로 말이지요.
즉 평화 교육이 본격적으로 진행되기 전, 우리는 먼저 현장의 권력 관계를 낯설게 바라봄으로써 평화교육은 시작됩니다. 그리고 이는 나아가 우리 일상 주변부로, 사회로, 국가로 향해 권력 관계를 낯설게 바라보도록 가능성을 열어줍니다. 또한 그 힘, 권력이 어떤 관계와 맥락안에서 작용하느냐에 따라 부정적으로, 차별과 억압과 폭력으로 작동하는지, 혹은 긍정적으로, 자존감을 높이고 감수성이 깊어지도록 em-power로 작동하는 지도 말입니다.
지금까지는 평화교육 수강을 시작하며 들었던 생각과 느낌들을 차근히 정리해보았는데요. 다음에는 평화와 교육이 맞닿았을 때, 평화 교육에서 알아간 개념들과 그것을 주변적 경험, 사례에 적용하고 분석하는 작업들 등에 관련해서 더 이야기 해볼까 합니다. 이제야 비로소 평화 교육에 대해서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꺼내야 할 것 같은데 이렇게 마무리가 되어 아쉽네요. 하지만 앞으로 평화교육에 대해 더 나누고 싶은게 많고 앞으로도 많을 예정이니까요. (아직 강의가 많이 남았어요.) 그럼 다음 편에서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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