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당 (행동하는성소수자인권연대 웹진기획팀)
몇년 전, 강남에 있는 회사에 취직을 하면서 집을 옮겼다. 좁고 춥지만 정든 옥탑방을 떠난 나는 관악구에 위치한 원룸으로 이사했다. 수십 가구가 사는 대형 공동주택인 이곳은 회사와 가까웠고 이전보다 넓었으며 주방이 분리되어 있었다. 주거만족도는 당연히 높을 수 밖에 없었지만 단 한가지 걸리는 점이 있었다. 새로 살게된 집 1층에는 경비원의 주거공간도 함께 있었던 것이다. 노부부인 그들은 늦은 시간까지 불을 밝히고 집을 드나드는 사람들을 살폈다. 편하지 않냐고? 안심이 되지 않냐고? 그렇긴하다. 나는 안심하고 집으로 택배를 보낼 수 있었고 늦은 시간에 이상한 사람이 건물에 따라 들어오진 않을까 걱정할 필요가 없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좋은 점은 거기까지. 싱글인 나는 이따금 데이팅 어플이나 인터넷을 통해 만난 남자를 집으로 끌어 들이곤 했다. 술 한잔, 커피 한잔 이유는 다양했지만 솔직히 대부분은 섹스를 위해서였다. 특히나 흔히 말하는 ‘천년의 욕정’이 폭발하는 기간에는 짧은 간격 새로운 남자들이 현관 문턱을 넘어야 했다. 문제는 이 모든 남자들이 내 방으로 가는 유일한 입구인 경비실을 지나가야 했다는 것. 어쩌면 경비원은 내가 처음 보는 남자와 함께 집으로 들어가고, 몇 시간 후면 그들이 그곳을 떠나는 모습을 보았을지 모른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나는 순간 고민이 들었다. 만약에 누구냐고 물어보면 뭐라고 답하지?
성소수자인 내가 주거 공간에서 느끼는 불안
누군가는 그렇게 말할지 모르겠다. 그런걸 물어보는 경비원은 없다고. 방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마 모를거라고. 그렇지만 만약이라는게 있지 않은가. 특히나 우리 집의 경비원은 너무나 운이 좋지만 한편으로는 매우 불운하게도 새심하고 친근한 사람이었다. 일례로 집들이 때문에 직장 동료들을 한가득 불렀던 날, 경비원은 순찰을 돌다가 내가 사는 층을 지나치는데 소리가 조금 큰것 같았다고 그래서 항의가 들어올지 모르니 주의하는게 좋겠다고 연락하는 배려(?)를 보이기도 했다.(그건 분명 경고가 아니라 나를 걱정해서 해준 말이었다) 그런데 그 ‘조금 큰 소리’가 격정에 찬 신음이 될지 누가 알겠는가! 또 경비원 부부는 늘 나를 마주칠 때마다 안부를 묻고 상냥하게 대해주었지만 나는 그 대화가 ‘그런데 어제 저녁에 그 사람은 친구인가요?’라는 식으로 흐를까봐 경계를 하곤한다.
물론 생각해보면 말도 안 되는 ‘만약에’이다. 발생할 가능성이 거의 0으로 수렴하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미연의 사태에 내가 계속해서 집착하는 이유는 그로인해 발생할 결과가 너무 치명적이기 때문이다. 이 문제에는 다름 아닌 주거가 걸려있다. 가령 내가 동성애자라는 사실을 경비원 부부가 알았는데 사실은 그들이 성소수자를 혐오하는 사람들이면? 집을 드나드는 매 순간이 살벌한 가시밭 길이 될 것은 뻔하다. 혹은 만약 건물주가 동성애는 죄악이라고 믿는 보수적인 종교인이라면? 우연히 경비원을 통해 나의 성적 지향을 알게된 그 사람은 속으로 이렇게 외칠지 모른다. ‘세상에 내가 가진 건물에서 남자 둘이서 섹스를 하고 있다고? 신이시여 그럴순 없어. 이번 계약 기간이 끝나면 보증금을 확 올려서 짐을 싸게 만들어야겠네’
같이 사는 사람이 친밀한 공동체가 반갑지 않은 이유
모두가 부러워 하는, 건물을 깔끔하고 안전하게 관리하며 친절하고 배려심 넘치는 경비원의 존재가 불편해진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사실 원인은 간단하다. 내가 이성애자가 아니라는 것이다. 만일 그랬다면 내가 상대방을 성관계를 위해 집에 데리고 오는걸 경비원이고 건물주고 온 이웃이 다 알았다고 해도 이 정도의 위기감을 겪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마 저녁 시간과 주말 정도에나 있을 집 어딘가에서 흘러 다닐 걱정하거나 경비원 부부의 ‘요즘 젊은 것들은’하는 시선 정도를 걱정했겠지. 사람들은 이성애 섹스를 많이 하는 사람을 부러워 하거나 혹은 ‘별종’ 정도로 보지 축출하고 싶어 하지는 않으니까. 하지만 동성애는 다르다. 아예 사회에서 축출하고 싶어하는 이들이 있는데 이웃이나 세입자로 두고 싶지 않아하는 사람이 과연 없을까?
이런 일을 겪다보니 나는 최근 등장한 ‘마을 공동체’나 ‘주거 공동체’에 대한 담론에 대해서도 다른 감정이 든다. 같은 건물이나 동네에 사는 이들과의 교류가 전무하고 그래서 주거공간 기반 커뮤니티가 존재하지 않는 도시 거주 환경에 대한 문제제기는 꽤 오랜시간 이어져 왔다. 그래서 때로는 단체 차원에서 혹은 지자체 차원에서 사람들이 서로 연결된 주거 환경 조성을 위한 노력을 하곤 한다. 이 같은 사업은 마을 단위로 혹은 건물 단위로 추진되기도 한다. 아예 사는 건물 안에 공동의 교류 공간이 존재하는 건물도 지어진다. 어떤 사람들은 이 같은 노력이 급속한 도시화 이후 소멸해버린 근거리 공동체를 복원하고 사람들이 협동하고 서로를 돌보는 문화를 만들어 낼 것이라고 보곤한다.
평등한 주거 공간을 희망하며
그리고 나 역시도 그런 전망에 공감한다. 홀로 살기는 자유롭지만 무척이나 외로운 일이기도 하다. 늦은 밤 드라마를 보며 홀로 술을 홀짝이다 보면 부담없이 불러내 같이 한잔 할 동네 친구가 있으면 어떨까도 싶다. 그런 사람이 같은 건물에 산다면 금상첨화겠지. 문제는 그 사람이 내가 퀴어문화축제에서 신나게 뛰어 놀던 동안 맞은 편에서 십자가와 피켓을 들던 사람이 아니리란 보장이 없다는 것이다. 물론 성소수자 운동의 영역에서 일상이 예외일 수는 없다. 하지만 적어도 나는 내가 사는 곳에서까지 그 일을 하고 싶지는 않다! 그래서 때로는 들어갈 때 나를 맞아주는 사람 하나 없고, 아래층에 사람이 살기는 하는지 알 수가 없던 옥탑방이 그리워지는 것이다.
한국에서 성소수자의 공간을 연구한 다수의 학자들은 이태원에 게이와 트랜스젠더 밀집 구역이 형성되는 것이 가능했던 이유로 다양성을 지목한다. 원래 국적·계층이 다양한 동네였기에 성소수자들 역시도 별다른 어색함 없이 그 곳에서 자신을 드러낼 수 있었다는 것. 그리고 거꾸로 이는 이태원의 거주민들이 성소수자들의 존재를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 결과를 낳기도 했다. 가령 나는 한 논문에서 이태원에서 식당을 운영 중인 중년 이성애자 남성의 인터뷰를 읽을 수 있었는데, 그는 처음에는 가게를 찾는 트랜스젠더들에게 반감이 들기도 했지만 자꾸 보다보니 익숙해지고 친밀감도 느끼게 되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것은 이태원의 이야기고 관악구의 원룸촌에서 거주 중인 사람들에게 같은 수준의 인식을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웃과 이웃이 어우러져 서로를 돌보고 함께 머리를 맞대고 공간을 가꾸고 친밀감을 형성하는 주거 공동체가 나에게도 이상적인 때가 올까. 성소수자의 존재가 친숙해지고 모두 비슷하게 보이던 사람들이 서로의 차이를 알게 된다면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때까지 나는 가장 고립되고 외로운 공간에서 살때 가장 안전하다고 느낄 것이다. 부디 이상향이라도 평등하게 가질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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