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오 (행동하는성소수자인권연대 웹진기획팀)
하이얀 출발선에 선다. 쪼르륵 일렬로 선 아이들의 얼굴에 제법 투지가 불탄다. 깃발이 내려가고 아이들은 인정사정없이 달려나간다. 그러나 나는 채 5미터도 못 가 뛰는 듯 마는 듯 걷기 시작한다. 왼팔이 내 의지와 상관없이 하늘을 향해 뻗고 고개가 돌아가면서 입이 틀어지고 웃음이 실실 나온다. 웃지 않으려고 애를 쓰며 오른팔로 왼팔을 단단히 붙잡는다. 저멀리서 선생님이 빨리 뛰라는 험상궂은 신호를 보낸다. 절반쯤 걸었을 때 몸은 다시 내가 원하는대로 움직여준다. 웃음도 멈춘다. 천천히 슬슬 뛰어본다.
내게는 경련장애가 있다. 증상이 없어진지 10년도 더 지났지만 과거형이 아닌 것은 완치는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병원에서는 청소년기와 노년기에 두드러진다 점을 알려줌으로써 풍요로운 노년에 대한 기대를 일찌감치 접게 해주었다. 초등학교 체육대회에서 처음 나타난 증상은 점점 강도가 세지면서 중학교에 입학한 후부터는 일상생활 중에도 느닷없이 튀어나와 시시때때로 나를 곤란하게 만들었다. 횡단보도를 건너가다 도시락통을 떨어뜨리거나, 수업 중 선생님이 이름을 불렀을 때, 친구들과 놀다가 갑자기, 일어서려던 순간에, 발표를 기다리다가, 긴장하거나 동작을 옮기는 순간이면 어김없이 증상이 나타났다. 게중 달리기는 백퍼센트였고 처음 증상이 나타난 것도 달리는 중이었기 때문에 내게 달리기는 곧 경련과 진배없는 불안거리였다.
그렇게 학창시절이 지난 후에는 전력질주가 필요할만큼 달려볼 일이 없었다. 운동삼아 천변을 뛰거나 버스를 잡으려 달려보는 정도가 고작이었는데 그때는 강제로 뛸 필요도 긴장을 할 필요도 없었기 때문에 내 몸 상태에 따라 뛰거나 말거나 할 수 있었다.
증상이 없어진 지금도 왼팔은 내 몸에 안착해서 붙어있는 느낌은 아니다. 반쯤 분리되어 있는 기분이랄까. 힘을 잔뜩 주어 왼팔을 통제한다는 느낌이 강하다. 자연스럽다기 보다 억지로 움직여주는 것에 가깝다. 신경쓰고 있지 않으면 언제든 하늘로 솟구칠 준비가 되어 있는 나의 왼팔. 왼팔은 이렇게 생각하는 것 같다. 에구 너도 참 애쓴다. 내가 좀 따라 줄게.
늘 궁금했다. 다른 사람들은 자신의 몸에 어떤 감각이 있을까. 더불어 또 궁금했다. 출발선부터 끝까지 열심히 뛴다는 건 뭘까. 결승점에 도달했을 때 난 무엇을 느낄까.
그런 내게 드디어 달려볼 기회가 왔다. 연대체 회의에서 만난 한희(무지개행동/희망법 활동가)가 퀴어여성게임즈 무지개행동 계주팀에 참여해보지 않겠냐고 제안해온 것이다. 심장이 나대기 시작한다. 잘 못달리는데요. 라고 말하면서도 내심 이것이 기회다 싶기도 하다. 나는 무사히 뜀박질을 완주할 수 있을까. 제안을 수락하고는 기대반 근심반이 되어 하루에도 몇 번씩 맘이 널을 뛴다. 일생일대의 기회인 것만 같다가도 뻔히 달리기에 대한 트라우마를 알면서도 수락하는 건 민폐가 아닐까 싶다가도 혹시라도 만에 하나 경련이 일어나기라도 하면 어쩌나 걱정도 든다. 그러나 역시, 대회일이 가까워오면서, 차별금지법제정연대 지역 워크샵에서 잠깐 바톤 받는 연습을 해보면서, 살면서 불가능했던 목록 하나에 다가간 듯한 기대가 마음을 지배한다.
9월 8일 대회 당일, 텐션 충만한 선수들에 섞여 드디어 출발선에 선다. 신호가 울리고 주자들이 달려온다.
뛴다…
뛴다..
달려보니 역시 나는 잘 뛰는 사람은 아니었다. 전력질주라고 뛰었지만 달리면서도 느낄 수가 있었다. 속도감이 없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리고 나를 추월하여 달리는 선수들이 있었으니..) 그럼에도 같은 팀원들의 출중한 능력에 힘입어 결승전까지 무려 두 번을 더 출발선에 설 수 있었다. 총 세 번을 뛰는 동안 경련은 없었다. 내가 뛸 수 있는 최대한으로 뛰었고 다 뛰고 나서 팀원들과 박수를 치며 기뻐했다. 해냈다는 자부심에 더해 협동과 경쟁의 긴장, 체육관을 가득 메운 함성소리, 무엇보다 내 인생에 달리기로 결승전에 다 올라본다는 감개무량한 즐거움을 만끽했다. 후들거리는 다리와 함께 온 몸에 찌릿한 쾌감이 오래 여운으로 남는다.
그리고..
이 글을 쓰면서 전력질주에 대해 다시 생각해볼 수 있었다. 과연 나에게 전력질주란 뭔가. 학교에서 달리기를 할 때도 나는 언제나 끝까지 결승점에 도착을 했다. 비록 중간에 뛰기를 멈춘 적은 있었어도 중간에 이탈한 경우는 없었다. 어떻게든 도착하기 위해서 오른팔로 몸을 감싸안고 최대한 빨리 도착하려 내 나름 최선의 노력을 다 했다. 그럼에도 늘 완주했다는 데 자부심을 가지기는 어려웠다. 도착 후엔 항상 ‘넌 왜 안 달리니?’ 같은 말들이 기다리고 있었고, 경련을 들키고 싶지 않다는 불안감이 있었고, 통상적인 100미터 달리기에 대한 이미지가 있었고, 그에 따라 남들과 다르다는 인식, 남들처럼 뛰지 못한다는 비교와 비하가 있었다. 결승점에 들어와 느끼는 유일한 감정은 출발선으로 돌아가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감이었다. 그러면서 나 스스로도 나를 열심히 달리지 않는 사람으로 낙인을 찍었다.
여전히 경련이 주는 불안감이 있고 출발에 대한 공포가 있고 대관절 내게 달린다는 의미가 뭔지 잘 정리하기는 어렵지만, 하나는 알겠다. 어렸을 때의 내가 얼마나 전력질주했었는지를 말이다. 지금에서야 그때의 내가 더 느꼈으면 좋았을 감정들을 보태본다. 그때의 나에게 충분히 잘 달렸다고 말해주고 싶다. 도착 후 선생님의 시선을 피해 어딘가로 숨기 바빴던 아이가 웃을 수 있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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