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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적지향 · 성별정체성

[논바이너리] 남자 아니고 여자 아니고 논바이너리

by 행성인 2023. 6. 23.

* 본 원고는 행성인 회원아카데미에서 기획한 캠페인 중 하나인 <남자 아니고 여자 아니고 논바이너리>의 결과물입니다. 이번에 취합한 논바이너리 당사자들의 이야기들은 지난 5월 아이다호데이 집회와 SNS에 전시한 바 있습니다. - 편집자 주

 

 

행성인 <남자 아니고 여자 아니고 논바이너리> 캠페인팀

 

 

논바이너리를 알고 이해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논바이너리라고 커밍아웃을 해도 “그래서 남자야, 여자야?” 하는 질문을 받기도 합니다. 그래서 행성인에서는 논바이너리 가시화를 위해 논바이너리 당사자들의 이야기를 모아 보았습니다. 논바이너리는 우리 곁에 있습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왕자입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보통 이렇게 인사를 시작합니다. 당신처럼 제 아랫도리에게 안부를 묻기보다 평범한 방식으로 말입니다. 제 다리 사이에 무엇이 달려 있는지 궁금합니까? 타인의 가랑이에나 호기심을 가지는 당신의 비루한 호기심에 유감을 표합니다. 또한, 그 호기심을 드넓은 세상에 뱉어버리는 당신의 무례함에도 저는 감탄을 금치 못하겠군요. 당신은 천재입니다. 제 가랑이에는 빛과 어둠, 꿀과 소금, 성수와 오물이 모두 혼재하며 물론 당신을 위한 자리는 없습니다. 무슨 뜻이냐고요? 당신 알 바 아니라는 뜻! 그럼 안녕히 가십시오. 당신의 고간에 조의를 표합니다.

 

 

 

비인간동물과 인간동물 모두를 착취하고 억압하는, 성별이분법, 축산업, 자본주의 등으로 얼룩진 시스템을 철폐하기 위해 운동(movement, not exercise)하고 있습니다.

 

성별이분법 철폐하라! 축산업을 철폐하라! 자본주의 철폐하라!

모두가 해방되지 않으면 아무도 해방될 수 없다!

우리의 해방은 연결되어있다!

성별이분법이라는 억압을 벗어던지고 해방됩시다!

지금당장 논바해방! 트젠!

지금당장 동물해방! 투쟁!

 

 

 

어릴 때부터 저를 여성이나 남성이라고 느끼지 않았어요. 어느 쪽에도 소속감을 느낄 수 없었어요. 항상 맞지 않는 옷을 입고 우스꽝스럽게 걸어 다니는 기분이 들었어요. 그러다 논바이너리라는 단어와 비수술 트랜스젠더라는 단어를 만났을 때, 비로소 맞는 옷을 찾은 것 같았어요. 어떤 사람들은 언젠가 바닷가에 별장을 짓고 싶다는 꿈을 꾸잖아요. 저는 그런 느낌으로 언젠가 가슴이 사라지면 좋겠다는 꿈을 꿔요. 그렇다고 남자가 되고 싶은 건 아니에요. 보이쉬한 여자로 보이고 싶지도 않아요. 그래서 머리를 밀었어요. 여성스럽지도 남성스럽지도 않은 것 같아서요. 그게 제가 할 수 있는 트랜지션이었어요. 아, 근데 제 두상이 예쁘대요 :D

 

 

 

논바 여기있다!!!!!!!!!!!!!! 우리도 바다의 새처럼 자유로울 가치가 있는 사람이야 여자 아니고 남자 아니고 ’기타‘에 속하는 사람이야 우리는 언제나 존재한다

 

 

 

저는 사회에서 말하는 '여성적인' 모습의 논바이너리 입니다. 사람의 겉모습으로는 그 사람의 젠더를 파악 할 수 없습니다. 중성적인 외형만이 논바이너리의 모습이 아닙니다. 세상에는 다양한 논바이너리들이 많고 모두 존중받고 사랑받을 가치가 있습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논바이너리 젠더리스 트렌스젠더 자유 라고 합니다. 어릴 때는 막연하게 남자가 되고 싶다고 생각했고, 점점 자라면서 교복 치마가 너무나 불편하고 유방과 브래지어가 싫었습니다. 그 이유를 알게된건 고2 좋아하는 배우가 논바이너리라는 사실을 알게된 후였습니다. 논바이너리로 젠더정체성을 확정한 후 저는 그 어느 과거보다 자유롭습니다. 숏컷이 디스포리아 해소에 큰 도움을 주었고, 여러 종류의 가발과 옷들을 통해 다양한 종류의 스타일을 시도해보고 나니 더 즐겁더군요. 논바이너리는 당신 옆에 있습니다.

 

 

 

내가 (아마도) 처음으로 젠더 디스포리아를 경험했을 때의 사진이다. 25개월이었고, 여자 색깔의 여자 옷이 입혀졌다는 것이 불쾌해서 울음을 터트렸다. 어린 내가 한복이 아니라 다른 것을 불편해 했다는 것을 양친은 몰랐다. 지금도 모른다. 이후로 주어지는 모든 여아용을 거부했지만, 그 대신 남아용이 주어지는 것에도 석연치 않아 하며 자랐다. 남자와 여자로 이분된 화장실을 이용할 때마다 미묘한 굴욕감과 모멸감, 자기혐오가 얕게 쌓여갔다. '젠더' '퀴어' '디스포리아' '논바이너리' 이런 용어들을 하나도 알지 못한 채 청소년기에 정체화를 했다. 어느 쪽도 아닌 사람으로.

 

 

 

남자도, 여자도 아닌 나를 표현할 명확한 단어가 어디있을까? 그렇다, ’논바이너리‘라는 단어를 2019년 말 경남퀴어문화축제에서 처음 접하고 다시금 나를 표현하는 언어에서 해방감을 느꼈던 순간을 기억한다. 나는 뚜렷하게 남성성을 추구하지도, 여성성을 추구하지도 않는다. 나는 그저 내가 살고싶은 대로 살고, 하고싶은 대로 살고있을 뿐이고, 그러한 생활 양식이 남성적, 여성적이라고 “굳이” 분류될 뿐이다. 평소엔 나를 남성으로 분류하는 제도권과 사회에 일일이 대꾸하기 귀찮아서 그저 살아갈 뿐이지만, 나는 내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 꾸준히 고민을 멈추지 않는다. 논바이너리로 정체화하는 것은 그러한 과정 중에 하나이지만 현 시점에서 나를 그나마 잘 설명해주는 단어인 것 같다. 나는 나답게, 어떠한 틀에 규정당하지 않고 그저 자유롭게 살고싶다. 홍석천 선생님의 말을 조금 인용해본다. 논바는 당신의 가족, 형제, 친구일 수도 있습니다.(그리고 일용직 건설노동자일 수도 있다.)

 

 

 

나는 미술작가이고 해당 사진은 나의 논-바이너리 정체성을 사진으로 표현한 것이다. 타인에게 내가 ‘남성’으로 소개되는게 불편하다. 회원가입을 하거나 기록을 남겨야 하는 순간 두 가지 선택지 중에서 매번 망설인다. 여성? 나는 여성이 아니다. 그럼 남성? 지정된 ‘남성’으로 나를 적어야겠지. 그래야 아무 문제 없이 순간을 넘기고 다음으로 넘어갈 수 있으니. 열심히 논-바이너리가 무엇인지 설명해야 하는 상황이 생긴다. 나는 논바 당사자인거지 논바를 연구하는 사람이 아닌데 내가 설명할 수 있는 것 이상을 물어보면 할 말이 없다. 내가 할 말이 없어지면 다시 존재의 온전성은 위험받는다. 너가 논바이너리라면서 왜 대답을 못해. 논바는 내 정체성이고 난 당사자로서 내 정체성을 느끼고 감각하는 사람이지 정체성 이론을 통달한 사람이 아니다. 논바다운 옷차림은 뭘까 지정성별 남성인 내가 치마를 입으면 논바인 것인가? 머리를 길러야 논바인가? 남성용 농구복을 입으면 논바가 아닌가? 농구복은 입지 않는다. 안 예쁘니깐. 하지만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가만히 있으면 나는 무수히 남성이 되어지는데 어떻게 해야 내가 나로서 있을 수 있을까?

 

 

 

언젠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나의 진정한 모습을 알아줄까요? 나는 딸도 아들도 아니고, 언니도 오빠도 형도 누나도 아니라는 것을. 그럼에도 나 자신일 수 있다는 것을.

 

 

 

논바이너리가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해서 이 사진을 보고 계신가요? 어떤가요, 제가 논바이너리처럼 보이나요? 성별이 '모호하게' 보이나요? 어떤 성별인 것이 '티'가 나나요? 그럼에도 '지정성별은 짐작이 가'기라도 할까요? 저는 매일같이 성별을 읽히고 판단당합니다. 저는 제 모습을 가지고 노는걸 좋아하지만, 제가 어떻게 한다고 해도, 저는 논바이너리로 읽힐 수 없습니다. 논바이너리라는 단어조차 낯선 이들은 '네가 어떻게 그거야' 너는 이런 성별로 읽히는데.'라고 말할지도 모릅니다. 마치 논바이너리가 특별하게, '논바이너리처럼' 생겨야만 하는 것 처럼요. 논바이너리는 반드시 모호해야 할 필요도, 반드시 남을 햇갈리게 해야 할 필요도 없습니다. 내가 무엇을 걸치든 걸치지 않든, 상대가 읽든 실패하든, 어떤 형태로 존재하든 내가 논바이너리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습니다. 내가 어떻게 하든 저는 논바이너리처럼 생겼습니다.

 

 

 

세상에 이런 사람들도 있다는 것만 알아주기만 하면 이 논바노코는 너무나도 행복할 것입니다. *^-^*

 

 

 

저는 논바이너리 입니다! 하나의 성별에 나를 얽메이지 않고 선택한 정체성 입니다!

 

 

 

이 아이는 어렸을적부터 자신을 여자애도 남자애도 아니라고 생각하였고 장차 성장하여 스스로의 성별에 '논바이너리'라고 이름 붙일 수 있는 피곤한 회사원이 되었답니다. 세상에서 미끄러지고 거부당하는 우리의 정체성에 치얼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