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현(행동하는성소수자인권연대)
활동하면서 후회되는 순간들이 여럿 있는데, 그중에 하나가 행성인(당시엔 동성애자인권연대)이 충정로에서 홍대로 이사갈 때 있었던 일이다. 당시 행성인은 새로운 활동 회원들이 많아지면서 더 좋은 사무실을 찾아다녔다. 예산에 맞으면서 접근이 쉽고, 크고, 엘리베이터가 있고, 턱이 없는 사무실들을 찾아 다녔다. 하지만 우리가 꿈꾸던 공간은 현실에 없었다. 그나마 비슷하게 찾아볼 수 있었던 후보들은 다들 어느 한 가지를 만족하지 못했다. 너무 비싸거나, 엘리베이터가 없거나, 대중교통으로 접근하기에는 너무 멀거나 등등. 그래서 회의를 했다.
나는 엘레베이터는 반드시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행성인에는 휠체어 이용 회원이 있었고, 아무리 비장애인 회원들의 참여를 늘릴 수 있는 공간이라고 해도 휠체어 이용 회원들이 아예 못 가는 공간이 사무실이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아예 그런 공간은 논의에서조차 거론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인권 단체니까 당연히 그럴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엘리베이터는 없지만, 다른 조건을 모두 만족하는 후보가 회의에서 계속 언급되고 어떤 가능성으로 이야기되는 것을 보고 화가 났다. 결국 흥분한 상태에서 공격적으로 이야기를 했던 것 같다. 그러지 말았어야 했는데.... 그 회의 자리에는 활동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새로운 사무실을 구하는데 적극적이었던 회원들도 있었는데, 내 화가 그들의 입을 막아버렸던 것 같다. 충분히 설명하고 설득해야 하는 거였는데, 그렇게 할 수 있는 일이었는데, 그러지 못했다.
그렇게 장애인 접근권을 "지킨다고" 분노하긴 했는데, 과연 나는 활동하면서 얼마나 장애인 접근권에 신경 썼나. 행성인에서 여러 활동들을 했지만, 내가 정말 진지하게 장애를 가진 회원들과 함께하는 활동에 대해 고민한 적이 있을까. 많은 경우에 '인권 단체로서 이 정도는 신경 써야지'라며 몇몇 가이드라인에 따르는 정도에 그치지 않았나. 그러다 보니 힘들 때는 그저 일이 많아지는 정도로 느꼈던 것 같다.
얼마 전에 한국농인LGBT 노프라이드 선언문을 보고서도 여러 생각이 들었다. "농인이 올지도 모르니, 농인이 오면 필요해서가 아니라 농인에게 내가 하는 활동과 그 내용을 전달하는 마음"으로 농접근권을 고민한 적은 없던 것 같다. 장애 운동에 연대하고 관심을 두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어쩌면 이 사회가 아주 가끔씩 성소수자를 시혜적으로 대하는 것에는 느끼는 민감함이 그 자리에만 머물러 있던 건지도 모른다.
이런 이야기를 하다 보면, 나부터도 그래서 어디까지 고민하고 공부해야 하는 걸까라는 부담이 느껴진다. 이런 부담이 반발로 변하는 것도 종종 보게 된다. 모두가 함께 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기 위한 가이드라인 같은 것들이 도움이 되기도 하지만, 그 규칙이 나를 지배하면 안 되는 것 같다. 인권에 대해서 알아간다는 것이 지켜야 하는 규칙이 늘어나는 일이 아니라,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을 알아가는 일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모를 수 있고, 잘못할 수 있다는 걸 받아들일 수 있을 때, 하고 싶은 이야기나 궁금함이 생겨나지 않을까. 성정체성이나 장애 여부가 우리의 만남을 막아선 안 되겠지만, 우리가 서로에 대해서 알고자 하는 마음이 없다면 만나서 뭐 하나. 모두를 위한 공간이란 어쩌면 그 어떤 차별이나 비하 발언이 없는 곳이 아니라, 온갖 실수들이 난무하지만, 모두가 서로의 이야기를 듣고자 하는 공간에 가깝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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