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웅(행동하는성소수자인권연대)
2015
새로 이사할 공간을 찾기 위해 오랜 시간 적지 않은 품을 들여 눈에 잡히는 공간들을 검색하고 연락해서 임방하고 이곳저곳 비교하지만 마음에 드는 공간은 느닷없이 찾아온다. 대흥동이 그랬다. 아니, 정확히 얘기하자. 마음에 드는 공간이기보다는 행성인의 장소 기준에 겨우 턱걸이할 수 있는 공간이 나왔다.
마포구 일대를 비비며 이전 사무실보다 넓고 저렴하며 엘리베이터가 있고 독립된 화장실이 있는 공간을 찾았다. 하지만 인권단체에 서울은 코웃음 치듯 문턱과 공용(남녀)화장실을 연이어 보여줬다. 검색에 걸린 장소들을 둘러보지만 비슷한 체급의 보증금과 월세로 나온 공간은 손바닥만 했고, 그나마 조건이 맞아도 엘리베이터가 있는 건물은 하나같이 비쌌다. 그렇게 찾은 동네가 대흥동이고 카리스장원빌딩이었다. 어지간하면 갈 일 없는 서강대 후문, 기사식당이 가득한 거리, 아래 파리바게트가 있고 지하철역에서 걸어오는 길에 꽃집이 있어 처음 방문하는 이들이라면 십중팔구 롤케이크를 사오고 일부는 화분을 들고 꾸역꾸역 찾아오는 그 동네에 지금의 행성인이 둥지를 틀었다. 동성애자인권연대가 이름을 바꾸고 이사한 행동하는성소수자인권연대의 첫 공간이었다. 청소년 성소수자 위기지원센터 띵동 인큐베이팅을 성공적으로 이뤄내고 옮긴 공간이고, 행성인 첫 공동운영위원장 체제가 시작된 곳이기도 하다. 대흥동 시대라고 부르는 건 좀 거창하지만, 이래저래 단체는 도전과 변화를 마주했다.
이사하고 2년 정도는 4층만 썼다. 교회였던 공간에는 단상이 있고 큼직한 십자가가 붙어 있었다. 창마다 붙은 플라스틱 스테인글라스 스티커를 떼기 어려워 예쁜데 그냥 붙여두면 안 되겠느냐는 완곡한 요청을 거절하고 떼어달라 웃으며 이야기할 때, ‘오 주여’ 탄식을 내뱉은 건물주는 그래도 8년 동안 월세 한번 올리지 않고 코로나 당시 살짝 깎아주기도 했더랬다.
지금의 소회의실은 이사 당시 사무실로 사용했다. 행성인 첫 상임활동가 병권이 그만두고 나라가 상임 활동을 시작하면서 두 명의 상임활동가 체제를 이어가고, 이윽고 새로운 상임활동가가 활동을 시작했다. 지금은 어엿한 사무국장 직함을 가진 오소리가 첫 상근을 시작하면서 어설픈 사수 노릇을 했던 기억. 당시 행성인 소모임이었던 부모모임이 조금씩 덩치를 키우면서 독립을 준비하던 시절이다.
2017
2017년 20주년 사업으로 기대했던 수익 대신 남은 건 어마어마한 술 상자들이었다. 교육장 앞에 가득 쌓인 맥주와 소주 박스는 한동안 방문자들을 기겁하게 만들었지만, 회의가 끝나고 뒤풀이를 할 때면 마르지 않는 샘물이 되었다.
당시 공동운영위원장이었던 호림이 미국을 가면서 활동가 충원이 필요한 상황과 맞물려 20주년 기세를 몰아 상임활동가를 더 충원하자고 결의했다. 평소 상임활동가처럼 제 활동 역량을 쏟았던 모리가 상임 활동을 시작하기로 했고, 활동가들이 바깥 활동을 하는 동안 단체 곳간을 관리할 재목도 필요하다는 판단에 지오가 들어왔다. 현재 지오는 운영위원장직을 맡으며 '대흥동 소찬휘'라는 어마한 부캐와 함께 단체 안팎으로 열 일 중이다.
다섯 명을 충원하기에 4층 사무실은 턱없이 좁았다. 그렇게 여기저기 찾아다니다가 때마침 같은 건물 8층이 비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나쁘지 않은 조건이었고 층이 달라도 왔다갔다 하면 된다는 생각에 어렵지 않게 결정했다.
같은 건물에 층을 하나 더 넓히는 이사인지라 바깥에 인력을 부르기도 조금 어중간했지만, 실질적으로는 예산이 부족해 몸을 갈아넣을 판이었다. 단체의 도움요청에 회원들이 찾아와 청소와 도배부터 전기, 조명, 이사까지 척척 진행했다. 8층으로 사무공간을 확장하지만 어째서 엘리베이터는 7층까지 있어서 모든 짐은 7층에 내려 계단으로 올려야 했다. 필지 건물의 옥탑방이라 사다리차는 애당초 기대를 접었다. 8층은 마루를 새로 깔았다. 부모모임 라라님의 지도로 다들 쪼그려 앉아 풀을 바르고 마루 타일을 깔았다. 누군가는 벽에 페인트칠을 하고 새로 조명을 달기도 했다. 행성인 활동이 회원들의 참여로 만들어진다는 건 그저 상징적이거나 허황된 이야기가 아니다. 먼지를 뒤집어쓰고 사지에 쥐가 나고 허리가 나가도록 무거운 짐을 옮기고 철거작업과 걸레질을 했다. 교육장을 넓게 쓰기로 하고 4층 단상과 창고 가벽을 없앴다. 벽을 부수는 행위에 감화된 순진한 이들은 당시 혐오 인사들의 얼굴을 붙여 의식을 치르듯 벽을 부쉈는데, 이후 저들에게 고소의 빌미가 되기도 했다.
2018
2018년 3월이었다. 5인 체제로 재편된 지 얼마 가지 않아 단체 내 성폭력 문제가 제기되었다. 사건 하나를 해결한다고 갈음할 상황이 아니라는 건 다들 직감하고 있었다. 사건 조사뿐 아니라 조직 점검의 필요를 느껴 운영위원회가 사퇴하고 비상대책위원회로 체제를 개편했다. 상임활동가는 오소리와 지오, 그리고 나까지 3명으로 줄었다. 사람들이 많이 떠났다. 활동이 여의치 않은 상황에서 당시 소모임이었던 성소수자부모모임은 예정보다 빠르게 독립 단체로 나갔다. 나는 그때부터 화분에 애착을 좀 더 가지게 된 것 같다. 이게 행성인의 미래라고 얘기하며 애지중지 키웠다. 그때의 식물들은 지금 없지만, 마음은 그랬다.
8층을 옮긴 그해 여름, 엄청난 비가 쏟아지고 서울 곳곳이 침수되었다. 그리고 옥탑방 사무실도 침수되었다. 지붕 곳곳 틈새마다 물이 떨어지고 벽을 타고 흘러내렸다. 벽지가 너덜너덜해지고 책상에 물이 고였다. 전선에 물이 생길 때에는 몸이 쭈뼛해졌다. 4층 소회의실도 어디서 물이 새는지 종종 바닥에 물이 한가득 고여있었다. 행성인 사무실은 기후 위기의 한복판에 있다는 걸 새삼 느꼈다. 매년 지붕공사를 해도 그때뿐이었다. 이사의 기운이 드리우고 있었다.
2019 -
행성인은 여의도에서 가깝고 신촌과 홍대도 지근에 있다. 교통의 요충지는 아닌데 어쩌다 보니 노른자 땅들 사이에 어중간하게 끼어 있다. 해서 외부 회의나 대관이 적지 않게 있었다. 2019년부터 다시 활동을 재개하고 참여한 차별금지법 운동은 유난히 여의도와 인연이 깊어 국회를 찾아다니고 국회 앞에서 농성을 한다. 운동이 커지면 사람이 많아지고 짐도 많아진다. 무지개텃밭은 회원들이 마음 놓고 드나들 수 있는 공간을 표방했지만, 사방에서 짐들까지 마음 놓고 들어올 줄은 몰랐다. 회원들은 드나들기라도 하지, 짐들은 들어오고 나갈 생각이 없어 보였다. 선전 물품과 자료집과 뭔지 모를 박스들이 야금야금 교육장 사방 벽을 포위한다. 단체마다 돌아가며 담당하기로 한 앰프는 어느샌가 행성인 붙박이가 되었다. 여의도에서 제일 가깝다는 명분이었고, 다른 단체들에 비해 비교적 넓은 공간이 있다는 것이 또 다른 이유라면 이유겠다. 교통의 요지들 사이에서 행성인은 꾸역꾸역 유사 캠프와 창고 역할까지 해내고 있었다. 하지만 누가 무슨 짐을 가져다 놓았는지 일일이 확인하기는 어려웠다. 상임활동가들은 대개 8층에 상주하기 때문이다.
8층 사무실은 섬 같은 공간이다. 4층에 일부러 내려가지 않는 이상 누가 방문했는지 알 수 없다. 교육장을 찾은 이들이 간간이 담배 피우러 옥상에 올라오지만, 사무실 문을 열지 않는 이상 8층의 활동가들과 인사를 나눌 일은 별로 없다. 옥탑방의 침수가 불안으로 다가왔다면, 두 층을 나눠 쓰는 상황은 활동가들에게 분리의 감각으로 남았다. 아무튼 이사 갈 때가 되었다. 이 말도 소모적으로 반복되기 전에 드디어 실행에 옮긴다.
2023
햇수로 8년을 지냈다. 대흥동은 단체 설립 이후 세를 전전하면서도 가장 오랫동안 한자리에 머문 장소다. 드나든 사람들만큼이나 동네도 변했다. 이 동네에서 행성인도 짬밥이 늘었다. 산동네였던 뒷동산은 대규모 아파트단지가 병풍처럼 세워졌고 서강대에도 새로운 건물들이 들어왔으며 인근 카페와 편의점, 술집들은 2-3년을 가지 못했다. 하나같이 사장이 불친절하다고 욕하던 편의점도 테이크아웃 카페로 바뀌었고, 사무실 가까이에 있어 자주 들렀던 오븐마루도 최근 문을 닫고 편의점이 들어섰다(불친절한 편의점 사장은 이제 없다. 하지만 그가 떠나고 생각해보니 그 양반은 오랜 기간 행성인 곁에서 알바도 거의 두지 않고 자기 업장에 상주한 이웃이었다).
동네에 많은 공간이 생기고 사라졌지만 기억나는 단골집을 고르라면 ‘팔공산 막걸리’를 꼽겠다. 아이샵 포스터가 화장실에 떡하니 붙어 이준기 닮은 남자 사장님을 살짝 의심했던 우리를 어여삐 봐준 그분들께 명함과 깃발 뱃지를 건넬 때는 장사를 정리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서였다. 막걸리집이 나간 자리에 업장이 두 번이 바꼈다. 사무실 근처에는 지역 기반 협동조합인 ‘우리동네 나무그늘’도 있었다. 교육장보다 조금 넓은 공간에서 행성인은 민주노총 김진숙 지도위원과 지금 라이더유니온에서 활동하는 박정훈 당시 알바노조위원장을 불러 〈전태일 평전을 읽는 밤〉(2016) 토크쇼를 하고 2015년 송년회 〈그런 기운이 오는 밤〉도 열었다. 인터뷰도 하고 오며 가며 인사도 나눴는데 건물주가 주거용 건물을 올리면서 나무그늘도 멀리 떠났다. (그런데 어쩌다 보니 나무그늘이 최근 새로 자리잡은 곳과 가까운 동네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
2023년 상반기 워크샵을 진행하고 이사 갈 장소가 확정 단계에 이를 즈음 살짝 기분이 울적해졌다. 이사 계획으로 분주한 다른 활동가들을 보면서 너네라도 신나게 부지런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건 진심이다.) 모두가 나처럼 침울하면 이사 분위기는 누가 띄우는가. 대흥동 지박령도 이젠 떼어낼 때가 됐다.
고운 정 미운 정 다 든 이 공간을 떠나는 건 조금 섭섭한 일이다. 그러고 보면 바뀐 풍경만큼이나 대흥동 행성인은 다른 행성인의 공간들보다도 많은 이들을 떠나보냈다. 당신들이 떠나고 남는건 유품이었다. 행성인에는 당신들의 유품박스가 하나 더 늘었고, 이제는 여러분을 기억하는 이들보다 모르는 이들이 더 많아졌다. 당신들과 또 다른 이들을, 그리고 새로운 행성인을 연결하는 것이 얼렁뚱땅 행성인 활동 20년차에 접어든 내 역할이 아닐까 생각한다. 앞으로 나아가면서도 뒤를 돌아보고 아래에 시선을 두며 이런 저런 관계가 만들어지고 역사가 써질 것이다. 이건 누가 홀로 담당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행성인 사무실을 함께 마련하는 것처럼 말이다.
살벌한 서울의 부동산시장에서 행성인은 약속을 많이도 했다. 턱이 없는 공간, 2층 위로 올라가면 휠체어가 들어갈 수 있는 엘리베이터가 있어야 하고 독립된 성중립 화장실을 운영할 수 있어야 할 것 등등. 서울의 높은 집값뿐 아니라 이 도시가 비장애 중심으로 구획되어 있다는 점을 처절하게 체감하고 있다. 그렇다고 이 단체의 약속이 주제넘다고 생각하고 싶지는 않다. 이사는 텅장에 가까운 예산으로 도시 개발과 부동산 문제를 몸으로 부딪히면서 이뤄지지만, 결국은 이런 문제들을 고민으로 이어가고 활동을 만들어내기 위한 장소를 마련하는 것이기도 하기에. 지금 행성인은 이사 갈 동네와 날짜를 헤아리며 조금씩 짐을 정리하는 중이다. 기존의 짐을 모두 담을 만큼 넓은 공간을 찾는 건 어렵지만, 이참에 묵은 짐을 가볍게 덜어낼 생각이다. 짐은 가벼워도 관계는 두텁게, 새 술은 새 부대에. 새로운 공간에도 이렇게 많은 이야기가 만들어지겠지...이번에도 여러분들과 함께 그 이야기를 만들 수 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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