펠릭스(행동하는성소수자인권연대)
나… 왜 여기있지..?
2024년 9월 7일 토요일, 오후 4시 전후 즈음.. 나는 어쩌다가 충북 단양의 산 속에 있게 되었더라? 시간을 더 감아보면 나는 어쩌다가 행성인의 문을 두드리고, 어쩌다가 오픈리 퀴어로 살아가야겠다고 생각했더라? 나는 왜 항상 답답해하고 화가 나 있었을까? 아니 다 필요없고 그래서 행성인 캠프에서 대체 뭘했지? 산발되어있는 기억들을 실타래를 풀 듯 다시 쫙쫙 펴가면서 이야기를 정리해보려고 한다.
지금부터, 서로 (행성인을) 자랑해라.
행성인 캠프. 내가 가본 캠프 혹은 그 비스무리한 거라고는 대학교 때 술이나 푸지게 마시고 다들 떡이 되어 돌아다니던 OT 혹은 동아리 MT 밖에 없었으니 비슷한 것이 아니려나 라는 생각을 먼저 했다. 그래도 열의를 가지고 발을 담가보고 싶은 마음이었으니 일정도 미리 비워두고 좀 열심히 해보자는 생각으로 캠프에 참석하게 되었다. (지금에 와서 하는 이야기지만 속이 꽉 차다 못해 터질 것 같은 김밥 옆구리처럼 너무 알찬 캠프였다. 준비했던 모두에게 박수를… 짝짝…)
캠프의 목적이 행성인 회원으로서의 소속감, 좀 더 나아가서는 자긍심을 끌어올리기 위한 것이라는 짐작에 부합하게 퀴즈나 팀 미션, UCC(세상에 UCC라니) 등의 다양한 프로그램이 진행되었다. 그 중 프로그램 가운데 즈음에 있었던 <천하제일 행성인 자랑대회>는 이름에 걸맞게 서로 행성인의 일원이 된 각자의 사연을 이야기하고, 외부에 행성인을 어떻게 자랑하고 홍보할지 고민하고 아이디어를 도출해보는 시간이었다.
어떤 팀의 아이디어는 영상 광고물이나 포스터와 같이 카피를 기반으로 한 임팩트 있는 방향이었고, 어떤 팀은 기존 활동 네트워크 안에서의 행성인의 위치와 이미지를 기반으로 방법을 모색하기도 했다. 팀을 구성한 팀원들이 누구인지에 따라 비슷하면서도 다른 전략을 고민하고 있었던 게 흥미로웠다. 그리고 우리 팀의 차례가 되었다.
왜 행성인에 오고, 무엇을 하고 싶어할까?
우리 팀의 방향은 행성인이 가진 커뮤니티라는 정체성을 기반으로 자연스러운 문턱 낮추기 홍보 전략을 고민했다. 위원회나 팀 단위의 활동 베이스보다는 접근성이 높은 소모임, 그 중 대중적인 선호가 높은 운동(큐리블), 보드게임(큐플레이) 소모임을 중심으로 행성인 외부의 손님들을 자연스럽게 유입시키는 방향을 도출했다. 그 외에도 오프라인/온라인 접점에 우리의 아이덴티티를 노출하는 동시에 홍보 접점을 늘리는 전략도 함께 생각해냈다.
전략의 출발점은 사실 이것이었다. 회원들은 왜 행성인에 오게 된 걸까, 와서 무엇을 하고 싶어할까, 우리는 행성인의 무엇이 좋고 무엇에서 만족감을 느낄까? 다른 것보다 나는 왜 행성인에 들어오게 됐지? 고민이 꼬리를 물면서 과거로 과거로 내 이야기를 반추해보았다.
더 이상 답답하게 살고 싶지 않아서였지. 직장 안에서 더 이상 헛소리를 듣고 싶지 않아서, 거짓말을 하고 싶지 않아서, 소수자의 위치 혹은 연대자의 위치에서 더 이상 가만히 있지 않고 같이 싸우고 싶어서였지. 대학을 졸업한 후 33세가 될 때까지 바쁠 때엔 새벽 3, 4시까지 이어지는 철야 근무를 하면서도 성장을 지향하는 회사 안에서 내 자리를 사수하겠다고 열심히 일했다. 그게 나의 경제적, 심적으로 안정감을 줄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고 그러면 나의 정체성과 더 친해지고 나를 잘 안고 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사실은 그렇지만도 않은데 말이지. 일은 너무 괴로웠고, 다른 퀴어들과의 접점이 없다보니 아는 퀴어라곤 전 애인, 전전 애인, 전에 몇 번 잤던 남자 밖에 없는 답답한 인간관계 안에 갇혀있는 것만 같았다.
더 시간을 돌려 20대 초반을 떠올리면 퀴어 동아리가 없는 지방대학에서, 나와 같은 퀴어라는 존재가 있겠거니 믿었지만 결국 거의 만나보지 못하고 4년의 시간이 흘러갔다. 술과 가무에만 돌아있는 헤테로 동기들과의 북적이는 시간 안에서 수많은 나의 모습 중 아주 일부만 서로 동기화하는 시간이었다고 해야하나. 그 시간 동안 너무 외로웠고, 어딘가 기대고 싶었지만 내 가까운 곳에는 기댈 곳이 보이지 않았다. 내가 고등학교 때 기대했던 건 이런 게 아니었는데.
고등학교 때 나는 대학에서 나와 상식의 기준이 맞는 사람들과 다양한 의제에 대해 이야기하고 논의하며 생각을 나누고 싶었다. 왜 용산에서 사람들이 죽었는데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지, 왜 일을 하고 백혈병에 걸렸는데 기업은 책임지지 않고 사실을 호도하는지, 왜 일자리는 구하기 점점 힘들어지는데 임금은 오르지 않고 집값만 오르는지, 그 집값이 오르는 것이 호재인 것처럼 보도하는지, 왜 사람이 사람답게 차별받지 않고 존중하며 살도록 법을 만들자는 당연한 이야기를 가로막는지. 결국 모든 생각을 돌이켜보면 나는 나와 닮은 사람들과 서로 기대고 힘든 세상에서 같이 싸우고 싶었던 것 같다.
그래서 내가 경험해본 행성인은 어땠지?
행성인은 운동 조직인 동시에 커뮤니티의 역할을 함께 하는 조직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조직이 나의 기댈 구석이 된다면, 나도 “나”로 살 수 있는 용기를 가질 수 있을 것 같았다. 감사하게도 밖에서 내가 기대하고 바라보던 행성인의 모습과 안에서의 행성인의 모습은 일치하는 부분이 많았고, 덕분에 나도 앞으로 오픈리 퀴어로 사회 안에서 살아가고 싶은 용기를 가질 수 있게 되었다.
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 재밌었던 부분은, 같은 팀이었던 호림님이 말을 빌어보자면 행성인 회원들은 “모두가 의견을 내고 싶어한다”는 점이었다. 그 누구도 망설임 없이 자신의 의견을 나누고 서로 협의하거나, 조율하려고 하는 자세를 갖추고 있는 분위기가 행성인 안에 있었다. 사회에서 만난 조직에서 많은 사람들이 몇몇의 조직원이나 대표자에게 역할을 미뤄두고 자발적인 활동은 소극적이었던 것을 돌이켜보면 신기한 부분이기도 했다.
그런 의미에서 행성인의 회원들은 사회에 목소리를 내고 싶은 사람들이 모여 서로 의지하며 결국 더 큰 운동을 위해 연대하고 투쟁하며 함께 나아가고 있는 것 같다. 우리가 서로 모여 에너지가 되고, 다시 에너지를 운동의 원동력으로 삼고. 그렇다면 나처럼 용기의 불씨가 필요한 사람들이 좀 더 쉽게 방문하고 이야기해볼 수 있도록 하면 어떨까? 우리 팀의 전략이 도출되기까지 이런 의견의 흐름들이 덧대어지고 모아졌다.
천하제일 행성인 자랑대회는 어쩌면 “같이 고민해요~” 정도의 프로그램일 수도 있었지만 결국 모두가 행성인과 나를 한 몸처럼 생각하고 의견을 낸 소통의 시간이었던 것 같다. 나만 너무 행성인 뽕에 차서 얘기하는 거라면 민망하지만… 적어도 내가 느끼기엔 그랬으니까.
Welcome to 행성인
1박 2일이 순식간에 흘러가고 집에 돌아와 이틀의 시간을 다시 떠올렸다. 가길 잘 했다. 다 다르고 생각보다 공통요소도 별로 없는 정체성과 요소를 가진 사람들이 뭉치고 섞이고 어울리는 시간. 그래서 앞으로 무엇을 같이 할지, 나는 무엇을 같이 하면 좋을지 고민하고 기대하는 시간. 그런 시간이었던 것 같다. 조금 오버하자면 동네방네 소문내고 싶은 마음도 들었고. 조금 다단계 같긴 하지만 나는 너무 좋아서 함께하고 싶으니까.
사회에 목소리를 낼 때 단체의 문을 두드리거나 집회에 참석하는 등, 보통 분노와 에너지가 충만한 젊은 시기에 뛰어드는 경우가 더 많은 것 같다. 그러다보니 내 주변도, 행성인 안에서도 이 사람은 어디 있다가 지금 나이에서야 나타난 사람인가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 같다. 그래서 이 글을 보는 회원, 혹은 비회원들에게 내 소개를 하며 마무리하고 싶다.
안녕하세요, 저는 92년생 폴리아모리 게이 펠릭스입니다. 우물쭈물 일만 하며 안정을 찾으려다 홧병만 얻고 탈진했다가 이제 다시 조금씩 살아나고 있습니다. 보드게임을 좋아하고, 광대 DNA를 가진 내향형 관종입니다. 그리고 행성인을 등받이 삼아 오픈리로 살아보고자 합니다. 어지럽고 외로운 시대에 같이 연대하고 행동합시다. 투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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