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스(행동하는성소수자인권연대)
여기에 오기까지
불과 2년 전까지만 해도 한국 사회가 요구하는 '정상성'에 맞추지 않는 삶을 살아가는 것에 대해 깊이 고민하고 방황하는 시기를 겪었다. 미래를 상상할 때 무엇이 있을지 도저히 그릴 수 없었다.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내가 무얼 하고 싶은지도 몰랐고 삶의 목적도 없었다. 초중고, 대학, 취업, 결혼, 육아… 사회가 제시하는 인생의 ‘올바른 길’은 끔찍하게만 느껴졌다. 그렇다고 해서 그 길을 벗어난 앞날에는 무엇이 있을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눈앞이 캄캄했다. 생각도 모르겠기에 닥친 문제와 걱정에서 멀어져 적당히 살아만 있고 싶다는 생각도 많이 했다.
그러다 어느 날 나와 전혀 다르지만 비슷한 삶을 살아온 ‘퀴어’한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친구를 우연히 만나고부터 이렇게 살 수만은 없겠다고 느꼈다. 정체화할 때부터 벽장에서 꼭꼭 숨어 살아오다가 ‘어쩌면 나와 비슷할지도 모르는’ 사람을 마주하니 더 이상 나를 숨기고 싶지 않았다. 두렵지만 용기를 내보기로 했다. 각 잡고 시간을 내어 이야기했다. 다행히도 나의 (거의) 첫 커밍아웃은 성공적이었다.
“그런데 네 이야기를 듣고 보니 나도 너랑 비슷한 것 같아.” 첫 커밍아웃에 대한 대답이었다. 그 말이 큰 깨달음을 주었다. 내도 친구의 이야기를 들었다. 얼마나 반가웠는지, 나는 혼자가 아니구나. 나 같은 사람들, 퀴어들이 얼마나 많이 있을까? 이성애중심주의, 연애정상성에 의문을 품고 지정받은 성별과 불화하는 사람이 얼마나 더 있을까. 이후로 캄캄해 보이기만 했던 길을 찾을 수 있을 것 같다는 믿음이 차츰차츰 생겼다.
더 이상 공허하게 살고 싶지 않았다. 사회가 요구하는 틀 안에 맞추기보다는, 그 틀을 변화시키고 싶다는 마음이 커졌다. 그것이 바라는 것이자 하고 싶은 일이었다. 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들과 교류하고 싶었다. 첫 시작은 온라인에서, 오프라인까지 뻗어 나가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2017년부터 종종 서울퀴어문화축제에 참여할 때마다 그날 만큼은 정말 자유로웠다. 오늘 하루 여기만큼은 나를 숨기지 않아도 되고, 얼마든지 드러내도 된다는 행복감과 자유의 느낌을 생생히 기억한다. 그리고 해가 저물며 집에 돌아가는 길에 하루동안 나의 “자부심”이 되어주었던 무지개 깃발과 뱃지, 팔찌들을 가방 속에 보이지 않도록 다시 감춰야만 했던 서러움도. 이제는 당당해지고 싶었다.
2023년 5월, 국제 성소수자 혐오 반대의 날(IDAHOBIT)을 맞아 혜화역에서 열린 투쟁대회에 참가했다. 그날은 서울퀴퍼 외에 벽장 밖으로 나가 다른 성소수자 관련 오프라인 활동에 참여한 첫 번째 날이었다. 수많은 깃발들, “성소수자 운동 30년 열정을 잇는 우리들, 변화는 멈추지 않는다” 피켓을 들고 도로에 서 있는 사람들. 같은 목표를 가지고 이 자리에 선 사람들의 존재가 마음을 가득 채웠다. 나도 나를 드러내고자 소심하게나마 들고 다니는 에코백에 붙여둔 무지개 뱃지들을 남들에게 내보이고 싶었다. 깃발을 들고, 피켓을 들고 도로로 나가고 싶었다.
그때 행성인 부스가 눈에 띄었다. 행동하는성소수자인권연대. 퀴퍼를 다니면서 이미 옛날부터 알고 있던 익숙한 이름이었다. 나는 이미 더 나은 미래를 만들기 위해 직접 “행동하는 성소수자”가 되고자 마음을 먹고 이 자리에 나왔다. 조금 부담스러웠지만, 정기후원을 시작하고 회원으로 가입하는 것으로 첫발을 내디뎠다.
한동안은 회원 모임에 깨작깨작 참여하면서 행성인과의 거리감을 좁혀갔다. 그러다 2024년 초에 아주 좋은 기회를 발견하고서는 참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캠페이너 양성 교육 프로그램 “세상을 바꾸는 퀴어” 세바퀴 시즌 3에 참여했다. 8회차 동안 성소수자 인권 의제와 캠페인 방법론에 관한 교육을 듣고, ‘트랜스 프렌들리 에티켓’ 캠페인을 팀으로 진행하면서 첫 캠페인을 성공적으로 마쳤다. 참여한 캠페인의 결과물이 실제로 나오고, 온/오프라인에 배포하는 과정까지 지켜보니 이렇게 뿌듯할 수가 없었다. 조금이나마 내가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수 있었을까. 캠페인 팀은 여기서 활동을 마쳤지만, 나는 여기서 끝마치고 싶지 않았다. 행성인에서 지속적으로 관련 활동을 하기 위해서 정식으로 “트랜스젠더퀴어인권팀”에 합류하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여기까지 왔다! 초심자의 열정을 불태우며 캠페인도 진행하고, 팀에도 가입하고, 소모임에도 기웃거리고, 매달 회원 모임에 참여하면서, 무려 8년 만에 열린 1박 2일 캠프에 어떻게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가 있겠나.
캠프에 가기까지: 기대와 불안 사이
이번 행성인 캠프는 무려 8년 만에 열린 1박 2일 오프라인 캠프였다. 몇 년 만에 돌아온 기회라니, 이제 막 활동을 시작한 나에게는 정말 매력적이었다. 세바퀴 프로그램에도 참여하고, 회원 모임에도 자주 나가며 이제는 팀에도 합류했지만 1년 반도 채 안되는 기간 동안 아직 경험해 보지 못한 일들도, 만나보지 못한 회원들도 정말 많았으니… 나처럼 비교적 신입인 회원에게는 다른 회원들과 더 많이 만나고 교류할 좋은 기회이기도 했다.
늦지 않게 캠프 참여 신청을 했다. 한편으로는 정말 들뜨고 기대가 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걱정되고 불안했다. 내가 모르는 사람이 많을 텐데 잘 다녀올 수 있을지 불안감이 들었다. 학창 시절의 안 좋은 기억들 때문이었다. ‘청소년수련관’에서 함께하는 ‘1박 2일’이라는 말이 나에게는 아직도 두렵게 느껴졌다. 수련회와 수학여행은 늘 가고 싶지 않은 곳이었다. 아무와도 어울리지 못하고, 아무 곳에도 끼어들지 못하고, 누구도 나를 반기지 않았던 기억들만이 가득했다. 즐거워 보이는 학생들 사이에서 혼자 빨리 집에 가기만을 바랐다. 나는 이제 더 이상 학생이 아니고, 내가 있을 곳을 찾았지만 그럼에도 마음속에는 아직도 여전히 구석에서 외롭게 혼자 앉아 있는 내 모습이 아른거렸다.
이런저런 생각들에 잠을 설친 채로 오전 9시에 사당역에서 출발하는 단체버스를 탔다. 도착지인 단양청소년수련원까지는 꽤 긴 여정이었고, 도중에 차도 많이 막혔다. 그래도 모자란 잠을 버스에서 채우는 동안 어느샌가 휴게소에 도착해있었다. 버스에서 내려 휴게소에 들르니 복잡한 도심을 떠나 여행을 가고 있다는 것이 실감나기 시작했다.
첫째 날 : 팀별 활동과 UCC 콘테스트
오후 2시경, 캠프에 도착하자마자 단양의 탁 트인 산이 우리를 맞이해주었다. 서울에서 자주 볼 수 없는 넓고 푸른 산을 코 앞에서 마주하니, 굉장히 마음이 맑아지는 기분이었다. 강의실로 들어가기 전까지 잠깐의 대기시간 동안 산을 바라보며 감탄하고 기념사진도 찍었다.
강의실에서 준비를 마치고 첫 번째 프로그램이 시작되었다. 노트북을 준비하고, PPT를 켜고, 낯익은 광경… 이번 캠프는 마냥 행성인 회원들끼리 모여서 놀고 떠들기만 하는 캠프가 아니었다! 낯선 캠프에서 익숙한 월간 회원 모임의 향기가 났다. 늘 잊지 않고 다 같이 약속문을 읽는 시작이 행성인 다웠다.
캠프 일정과 숙소 방배정을 소개하고, 소소한 아이스브레이킹 활동(의자 앉기 게임)을 통해 5개의 조로 나뉘었다. 이후 진행한 팀별 게임, UCC 콘테스트 등의 활동을 정해진 조와 함께하게 되었다. 모르는 사람들이 많아 어색해하거나 어울리지 못할까 봐 내심 겁먹던 차에 반가운 일이었다. 캠프에 참여한 30명 남짓의 인원들을 모두 알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같은 팀원들 정도는 충분히 소통하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으니 나 혼자 어색해하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에 긴장을 풀 수 있었다.
아이스 브레이킹과 팀별 게임까지 진행한 후, ‘UCC 콘테스트’라는 숙제를 남겨두고 쉬는 시간을 가지게 되었다. UCC(User Created Contents)라니! 2010년대 초반 이후로는 정말 오랜만에 들어보는 추억을 불러오는 단어였다. 그 시절에는 이렇게 휴대폰 하나만 덜렁 가지고서 영상 편집은 어림도 없었겠지만, 이제는 컷 편집과 자막 추가, 특수효과도 넣을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제한 시간은 저녁 식사 후 다음 프로그램 시작 전까지였다. 조별로 행성인과 단양과 관련된 단어가 담긴 제비뽑기에서 당첨된 키워드를 모두 담은 영상을 만들어야 했다. 내가 속한 3조의 키워드는 “행성인”, “트티켓”, “장기 자랑” 3가지였다. 키워드를 보고서 순간 어떻게 영상을 만들어야하나 걱정이 되었지만, 5조가 뽑은 “패러글라이딩”, “9월”, “성소수자 노동권”에 비하면 양반인 듯싶었다.
쉬는 시간 동안에는 수련관 내에 여기저기 숨겨져 있는 보물찾기 이벤트도 함께 진행했는데, 우리 조는 UCC 콘테스트 1등 제출을 목표로 작전회의에 나서느라 보물찾기 이벤트에 참여할 여력이 없었다. 키워드를 연관성 있게 잘 뽑은 덕분에 영상에 대한 아이디어를 내고 구체적인 내용을 정하는 것도 꽤나 빠르게 진행되었다. 영상은 행성인에서 진행한 ‘장기’자랑에 참여한다는 컨셉으로, 한 명씩 무대에 나와 자신의 자랑스러운 장기(몸)을 자랑하는 언어유희를 활용한 내용이었다. 마지막에 트랜스젠더 당사자가 머뭇거리며 나의 장기(몸)도 자랑해도 괜찮은지 묻고, 참여자들 모두가 환영해 주면서 트랜스-프렌들리한 분위기를 만들어 나가고자 하는 행성인의 메시지를 담았다. 짧은 시간동안 제작한 영상이라 한계는 있었지만, 그래도 나름대로 나 스스로도 타인에게도 부정 받기 십상인 트랜스젠더의 몸을 긍정하고, “자궁이 있어도 여성이 아닐 수 있고, 전립선이 있어도 여성일 수 있다”라는, 기존의 성별 이분법적이고 시스젠더중심적인 신체상에서 벗어나자는 이야기를 전달하고자 했다. 짧은 촬영 시간, 편집 없는 러프한 영상, 가벼운 유머도 꽤 그 시절 UCC 감성에 잘 어울리지 않나 싶다.
쉬는 시간을 마친 후에는 천하제일 행성인 자랑대회 프로그램이 있었다. 나에게 있어 “행성인 뽕이 차오르는 때”에 대해 생각해 보고, 행성인을 어떻게 더 많은 사람들에게 소개하고 다가갈 수 있을지 홍보 방법을 구상해 보는 시간이었다.
이후에 잠시 야외에 나가서 단체 사진을 찍는 시간을 가졌다. 마침 이날 907 기후정의행진 당일이어서 “기후가 아니라 세상을 바꾸자” 메시지와 함께 산을 배경으로 단체 사진을 찍었다. 기후정의행진과 겹치는 캠프 일정이 조금 아쉽게 느껴지기도 했는데, 비록 둘 다 참여하지는 못했지만 이렇게나마 함께하는 마음을 전달할 수 있어 좋았다.
첫째 날 : 캠프의 밤
두 번째 메인 프로그램까지 끝마치고, 저녁 식사 후 자유 시간을 가졌다. 일찍 조별 과제를 끝마친 우리 팀과는 달리 아직 UCC 콘테스트 영상을 찍고 있는 팀들도 있었다. 한쪽에서는 영상 제작에 관해 회의를 하는 팀도 있었고, 촬영 중이라 들어오면 안 된다며 입구에서 통제를 받기도 했다. 다른 팀에서는 어떤 작품들을 선보일지 내심 기대가 되었다.
대망의 UCC 콘테스트 상영회 시간에 드디어 실물을 마주하게 된 각 팀의 결과물은 기대 이상이었다. 짧은 시간 동안 스마트폰 하나만 가지고 만든 것임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제한된 공간을 활용하여 유머 감각과 센스를 뽐내며 메시지까지 담은 멋진 작품들을 만들어낸 것이 인상 깊었다. 정말 캠프에 참여한 사람들끼리만 보기에 아쉬운 영상들이었지만, 또 한편으로는 캠프에 참여하지 않았더라면 이해하지 못했을 포인트도 영상에 담겨있었기에 여기에서만 즐길 수 있었던 자체 제작 콘텐츠였던 셈이다.
빼곡했던 하루 일정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와 쉬는 시간을 가졌다. 사실 미리 공유된 일정표를 보고서 프로그램이 꽤 빡빡하게 준비되어 있구나 싶긴 했지만, 실제로 참여해 보니 4연속 회원 모임에 참여한 것 같은 느낌이었다. 단순히 놀기만 하지는 않는다는 점에서 참 행성인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평상시 회원 모임보다 더 많은 인원수와 시간, 공간이 있었으니 직접 영상을 만들어 UCC 콘테스트도 해보고, 돌아다니면서 각 조의 결과물을 직접 둘러보고 투표까지 하는 자리도 가질 수 있었다. 이번 캠프가 아니었으면 해보지 못했을 “한정” 프로그램이었다.
마무리: 다음을 기약하며!
둘째 날 아침, 늦잠을 잔 나는 주섬주섬 짐을 챙기고서는 숙소 밖으로 나가 마지막 프로그램에 참여했다. 각자 ‘나 사용법’을 적어 다른 사람에게 전달하는 것이었다. 심플하지만 이를 통해 함께 1박 2일 캠프의 마무리 인사를 나누며 다음에 또 만날 날을 만들고 기약했다.
서울로 돌아가는 버스를 타러 가기 전 준비시간 동안 잠시 계단 끝에 앉아 잠시 풀 냄새 가득한 공기를 마셨다. 마지막으로 단양의 넓고 푸른 산을 눈에 담았다. 복잡한 도시, 일상에서 잠시나마 해방감을 느낄 수 있었던 캠프의 풍경을 기억하고자 했다.
캠프는 그렇게 끝이 났고, 돌아가는 길에서 캠프에서의 즐거웠던 기억과 시간이 너무 빨리지나가 버린 것에 대한 아쉬움이 교차했다. 버스 창밖으로 스쳐 가는 풍경을 바라보며, 처음으로 만든 “수련회장”에서의 좋은 추억을 회상했다. 불과 이틀 전까지의 걱정은 더 이상 나를 움츠러들게 하지 않았다. 수십 명이 모이는 단체 활동도, 처음 만나는 사람들과 보내는 시간도 충분히 행복한 기억이 될 수 있다는 걸 마음속에 새겼다.
“행동하는 성소수자”가 되어 보고자 행성인의 문을 두드린 지 이제 막 1년 4개월. 이제는 나도 어느새 한 명의 회원이자 한 명의 활동가로 거듭나고 있지 않나. 그런 생각이 든다. 지금의 내가 존재할 수 있게끔 해준 행성인에서, 이번 캠프는 나에게 마치 웰컴 파티이자 새로운 시작점처럼 느껴졌다. 다음 캠프가 열릴 때 나는 어떤 모습이 되어있을지 미래를 한 번 그려본다. 그리고 그때까지도 함께하기를. 이제부터 시작, 앞으로도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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