짐승 (행성인)
때는 10월 후반, 활동하는 단체에서 성평등 교육을 준비하기 위해 뭔가 참고할 게 없는지 찾고 있었다. 성평등 교육을 처음 맡는데, 신입회원을 대상으로 진행하는지라 긴장되기도 했다. 마침 행성인에서 셰어랑 같이 플레저랩 성교육을 한다고 알림이 와서 바로 신청했다. 성교육과 성평등 교육이 같은 건 아니지만, 그래도 참고할 게 많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행성인 사무실에 갔더니 낯익은 강사분(타리님)께서 열심히 피피티 자료를 강의하고 있었고, 여기저기 아는 얼굴들이 있어 반가웠다. 공간에 가득 들어차있는 성소수들과 섹스 얘기를 할 거라고 생각하니 부끄럽지만 재밌을 것 같아서 살짝 신났다. 그러나 초심자처럼 티내고 싶진 않아서 가만히 있었다.
첫 프로그램은 '섹스 A to Z'를 각자 작성하고 같이 말하는 순서였다. 내가 상대와 성관계하거나 혼자서 성욕을 만족할 때 과정을 함수 그래프처럼 그리는 것이다. 그리다보면 내가 추구하는 섹스가 뭔지 생각하게 되는데, 실패한 섹스의 기억도 떠올라서 괴로웠지만 어찌저찌 그래프를 완성했다.
나는 긴장된 상태의 섹스보단 서로 장난치다가 자연스럽게 즐기고나서 편안하게 함께 자는 걸 좋아한다. 물론 성적 긴장이 있어야 섹스가 성립되긴 하는데, 각잡고 하면 경직되고 부담으로 느껴져서 잘 몰입하지 못하는 것 같다. 나의 이런 섹스관(?)에 기반해 내 섹스 과정을 써보면, [같이 놀면서 장난치기 → 뽀뽀와 가슴 자극 등 삽입 전 몸 풀어주기 → 외부 성기 만족시켜주기 → 상대가 괜찮으면 삽입하기 → 상대가 만족할 때까지 하기 → 껴안고 잠들기] 이다. 프로그램은 각 단계마다 만족도를 표시한다. 사람마다 각자 다양한 산등성이를 가진 그래프가 나오는데, 나의 경우는 마지막에 껴안고 잠들기 단계에서도 만족도가 높다. 그것까지 포함되어야 섹스의 완성이라 생각한다.
각자 완성한 그래프를 다른 사람들과 함께 나눌 시간이 되자, 강사분이 운을 뗄 사람을 애타게 찾았지만 역시 아무도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나도 눈을 피하고 있었는데 지인보너스로 딱 걸려서 섹스스토리텔링의 첫 주자가 되었다. 섹스 A to Z를 말하면서 '온깁부치'임을 밝힐 수밖에 없었는데, 요즘 부치탈락의 위기에 놓여있어 약간 찔리고 부끄러웠다. 내 발표가 끝난 후 강사분은 나에게 다음 타자에 대한 선택권을 주셨다. 내 앞에 계시던 세련된 중년부치분의 경험이 너무 궁금해서 지목했다. 그 분은 나와 반대로 계획형 타입이었고 상대와의 적극적인 피드백을 통해 다양한 성적 실천을 즐기시는 것 같았다. 반려가전(섹스토이)을 ‘친구’라 부르며 독일친구랑 많이 논다는 말이 인상깊었다. 강사분은 한술 더 떠서 일본친구를 소개시켜주는 등 화목한 분위기에서 모두가 번갈아가며 자신의 섹스그래프를 말했다.
두번째 순서는 플레져미터인데, 안전/만족/합의의 관점에서 최근 자신의 섹스를 측정해보는 것이다. 자기결정권, 동의, 의사소통 및 협상, 안전, 프라이버시, 자신감/자존감, 심신의 안정과 즐거움까지 총 7개의 기준이 있었다. 팔각형의 형태로 각 항목마다 0~10점 사이에서 점수를 내린다. 나는 대부분 8~9점대였고 자신감과 즐거움이 조금 낮았다. 아까 부치탈락 위기에 놓여있다고 했는데, 최근에 상대를 많이 만족시켜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부치에게 깁으로 얻는 상대의 만족은 그 자체로 자아실현인데, 상대의 만족을 얻질 못하니 내 만족과 자존감도 낮아진 상태였다. 원인으로는 서로 바쁘고 피곤해서 성생활의 빈도가 줄었고 숙련도도 떨어졌다고 판단했다. 보다시피 플레져미터는 자신의 성생활을 되돌아보게 만든다.
플레져미터도 각자의 것을 자유롭게 말하는 시간을 가졌다. 섹스 A to Z와는 다르게 최근 성생활에 대한 이야기다보니 다양한 소감과 고민도 많이 나왔다. 상대와 다른 욕망의 상이라거나, 환경과 시기에 따른 섹스 빈도의 변화 등은 많은 관계에서 겪는 보편적인 성적 고민들이다. 한 부치분은 전부 10점이었는데, 자신은 상대와의 성적 행위를 항상 원하는 상태이기 때문에 자기결정권과 동의가 10점이라고 했다. 너무 나랑 똑같고 부치스러워서 웃음이 나왔다. 강사분이 각 항목이 항상 높다고 무조건 좋은 건 아니라고 말한 점도 흥미로웠는데, 프라이버시가 완전히 보장되지 않거나 약간 불안전한 상황에서 섹스를 할 때 만족감이 훨씬 큰 경우를 예로 들었다. 도구를 이용한다거나 공간을 변형하는 등 색다른 섹스를 시도한 경험도 많이 들을 수 있었고 좋은 참고사항이 되었다.
강사분이 성교육을 제대로 진행하자면 최소 4시간은 잡아야한다며 급하게 진행한 것을 아쉬워했다. 실제로 한창 흥이 오를 때(?) 오후 10시가 다 되어서 끝내야 했기 때문에 다들 아쉬움을 뒤로 하고 집에 갔다. 학교가 아닌 곳에서 듣는 대안적 성교육은 이번이 처음이었는데, 시간이 가는 줄 모를 만큼 재밌게 참여했다.
섹스 A to Z는 나의 쾌락에 대해 알아가게 하고, 플레져미터의 평가 기준들은 우리가 어떤 걸 고려하면서 성적 관계를 맺어야 하는지 보여준다. 셰어의 성교육을 들으면서 내가 지금까지 해왔던 성적 실천과 관계에 대해 진지하게 고찰하는 시간을 가졌는데, 이것이 ‘위험에 대처하는 것에서 끝나지 않고 즐거움을 알아가는 성교육’을 지향하는 플레져랩의 의도라고 생각한다. 어릴 때 학교에서 이성애를 상정하고 가르치던 성교육은 별로 와닿지 않고 성적 행위를 장난처럼 취급하는 남학생들의 반응 때문에 묘한 불쾌함만 느꼈다. 그러나 셰어의 성교육은 성적 실천이 혼자만의 장난스러운 행위가 아니라 상대와 관계 맺는 과정이라는 걸 확실하게 알려준다는 생각이 들어서 좋았다.
사실 성평등/성교육 도서 검열에 대응하는 활동을 하면서 대안적 성교육이 필요하다고 어떻게 사람들에게 설득할 수 있을 것인지 활동가 동료들과 많이 고민했다. 포괄적 성교육이 실시되면 아이들이 ‘조기성애화’된다거나 ‘항문 성교’를 배워서 문란해지고 ‘올바른’ 성윤리를 배워해야 한다는 보수우파기독교의 주장은 그들이 안전한 성관계를 가르친다는 착각에 빠지게 만든다. 그들에게 성적 관계는 쌍방의 합의를 찾아가는 과정이 아니라 가족 재생산의 수단이기 때문에, 관계 맺는 주체를 지워버리고 의무로서의 성적 관계만 남아서 소통의 여지가 없어져버린다. 성적 행위에서 동의를 넘어 상대와의 합의 과정이 없는 것이 성폭력인데, 이런 점에서 보수우파기독교의 가족관이나 성관념은 오히려 성폭력이 발생하기 쉬운 환경을 조성한다.
그러나 보수우파기독교가 아니라 페미니즘을 배운 사람이라도 막상 자신의 성적 욕망에 대해서 말하게 되면 갑자기 ‘유교걸’이 되는 사람들이 많다. 부끄러움이 나쁘다고 말하려는 게 아니라, 사람들이 자신의 성적 실천을 어떻게 말해야할지 잘 모른다는 뜻이다. 관계로서의 성적 행위를 말할 때, 우리는 이걸 비밀스러운 것이나 장난으로 치부하지 않고 진지하게 다룰 수 있다. 최근 딥페이크나 n번방 등 10~20대 남성들의 성범죄는 갑자기 드러난 것처럼 보이지만, 과거에도 성폭력은 없지 않았고 오히려 드러나지 않은 성폭력이 훨씬 많았을 것이다. 지금 겪는 문제들은 과거로부터 이어져 온 사회적 관계 맺기의 실패이고, 그래서 중년과 노년 세대 역시 성교육이 필요하다. ‘성관계’인데 우리는 왜 상대와 어떤 관계를 맺을지 생각하지 않는걸까? 이성애중심 성별이분법의 가족 재생산 논리를 넘어 포괄적 성교육이 모두에게 필요한 이유는 여기에 있다.
다시 개인적 감상으로 돌아와서, 내 성적 쾌락에 대해 이렇게 심도 있는 고찰을 하게 된 자리는 처음이라 재밌었고 언젠가 애인이 동의한다면 함께 듣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서로의 생각을 공유하면서 성교육에 대한 각종 아이디어도 나왔는데, '온깁의 마음' 워크숍을 해야한다고 우스갯소리하는 등 창의적이고 알찬 시간이었다. 글쎄요, 온깁의 마음을 워크숍으로 하기엔 '깁'이 자아실현이라 워크숍을 듣는다고 사람들이 온깁의 마음을 배울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는데… 이번엔 여성, 퀴어, 섹스가 테마였는데 더 다양한 성별 혹은 연령대와 함께하는 자리도 재밌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플레져랩이 더 커져서 한국의 모든 공립학교에서 이런 성교육을 들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이상으로 성교육 후기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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