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04.09 늦은 밤
아직은 쌀쌀한 봄날의 어두운 밤, 종로 골목 안 어느 곳엔가 숨어 있어서 간판뿐만 아니라 입구조차도 어딘지 잘 보이지 않는, 그러나 동성애자들에게는 선뜻 발을 들여 놓을 수 있는 작은 술집. 소주한잔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숨기고 살아가야 하는 고단한 동성애자들에게는 며칠을 버티게 하는 힘이 되는 특별한 공간이 있다. 작지만 아주 편안한 문을 열어놓고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그루에 갔다. 늘 그렇듯이 토마스 사장님은 우리를 반갑게 맞이해주었다.
정숙 : 오랜만에 뵈요. 2주 만에... (일동웃음)
욜 : 2주 만에 왔나? 한 주 쉬었을 뿐인데, 왜 이렇게 오랜만에 온 것 같지? 오늘은 인터뷰 때문에 왔으니, 조용히 있어야지... (일동웃음)
정숙 : 다른 직업을 선택할 수 있었을 텐데, 종로에서 게이바를 하게 된 이유가 뭔가요?
토마스 : 동대문의류상가에서 택배 일을 하다가 부상을 당해 두 달 동안 입원을 했었어. 입원해있는 동안 앞으로의 미래에 대해서 생각해보니, 나이도 있고 여러 가지 선택의 폭이 좁은 상황에서 내가 좋아하는 것을 한 번 해보자 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지.
처음엔 제빵 기술 같은 것도 배워보려고 했는데, 새로운 것에 도전하기보다는 내가 좋아하고 잘하는 걸 하고 싶었어. 그러다 보니 우선 내가 게이이고, 물론 남들보다 내가 게이 프라이드를 더 많이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만, 다시 태어나서 나를 다시 선택할 수 있다면, ‘난 또 게이로 살고 싶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의 프라이드는 있는 거 같아서.
종로라는 곳이 게이들의 만남의 장소이고 익숙한 곳이다 보니, 자연스럽게 종로라는 장소를 선택하게 되었어. 게이들이 좋고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좋아했기 때문에 선택하게 된 거지.
정숙 : 정말 사람을 좋아해야 할 수 있는 직업인 것 같아요.
토마스 : 밤낮이 바뀐 거 말고는 사람들과 함께 어울리는 게 즐거워. 물론 상식이 통하지 않는 손님들도 있어, 극히 소수지만. 다수의 많은 손님들은 또 괜찮아.
욜 : 그런 손님들은 어디나 있는 거 같아요. 기억에 남는 진상 손님이 있다면? (웃음)
토마스 : 물론 진상 손님이 오면 어떻게 대처를 해야 하나 걱정이 들고 힘들기도 해.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면 너무 외로워서 그러는구나라는 생각에 그들을 그냥 이해하려 해.
정우 : 그런 손님들을 대하려면 바다와 같은 넓은 마음이 있어야 될 것 같아요. (일동웃음)
정숙 : 여기가 게이바인 줄 모르고 오는 손님들도 많죠?
토마스 : 모르고 오는 외국인 손님들이 많고, 이성애자들도 많이 와. 가끔 이성애자 손님들이 오는데, 게이들이 우리들 표현으로 끼 떠는 걸 보면 자기네들 끼리 ‘여기 게이바인가 봐’ 라고 하는 거 같아. 불편해하면 나가는 손님들도 있는데, 대부분은 그냥 재밌게 놀다가.
정숙 : 다른 자영업은 불특정 다수를 상대로 장사를 하지만, 게이 바는 사장님과 손님이 특정한 그룹을 형성하잖아요. 예전에 다른 장사를 하셨을 때와는 많이 다를 것 같아요.
토마스 : 사장과 손님의 관계는 어디든 똑같은 것 같아. 하지만 내가 게이이고 손님들도 게이이다 보니 그들의 까다로운 취향이라든지 (물론 개인차가 있지만), 사소하고 예민한 분위기까지 빨리 파악할 수 있으니, 장사에 도움이 되는 거 같아. 장점이지.
정숙 : 주말에 게이 바에 와서 끼를 떠는 게이들을 보면 어떤 생각이 들어요? 나는 게이들이 끼를 떨면 너무 재밌던데, 그들 스스로 해방감 같은 것도 느낄 것 같고.
토마스 : 게이들 대부분 가정이나 회사에서 억압을 느끼며 살다가, 우물 안같이 좁은 곳이지만 자신을 들어낼 수 있는 공간이 있다는 것이, 게이들에게는 정말 해방구와 같은 곳일 거란 생각이 들어. 나도 예전엔 끼를 넘어선 기갈을 부리면서 종로를 다녔지. 우리들에게 이런 공간은 중요하고, 기갈을 부리는 것도 당연하다고 생각해.
정숙 : 맞는 말인 것 같아요. 사실, 우리들끼리 다른 술집에 가면 동성애라는 단어를 쓸데도 옆 테이블의 눈치를 보게 되요. 우리들의 이야기를 맘껏 할 수 있는 공간은 매우 중요한 것 같아요. 특히 종로는 게이들에게는 해방구와 같은 공간인 게 맞는 말인 것 같아요.
정욜 : 동인련 같은 경우를 보면 우리들의 억압받는 현실에 대한 문제점을 느끼고 동인련에 가입하는 회원들이 많아요. 종로에 나오는 게이들이 모두 그런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지는 않지만 더 많은 사람들이 인권이라는 문제에 관심을 가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요. 형이 게이 바를 하면서 인권에 관심이 있는 게이들도 있고, 또 없는 게이들도 많이 보실 텐데, 그들에게 우리가 어떻게 다가갔으면 좋겠어요?
토마스 : 내가 동성애자인권연대(동인련) 회원들을 많이 만나기 때문에 가끔 손님들에게 동인련 이야기를 해.
일동 : 고마우셔라.
토마스 : 그럼 대부분 세 가지 정도의 생각들로 나뉘는 거 같아. 한 부류는 인권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는 게이들, 또 다른 부류는 인권활동을 지지하는 게이들, 또 한 부류는 인권운동이 우리 커뮤니티를 아웃팅 시킨다는 부정적인 생각을 가진 게이들도 있어.
정숙 : 인권활동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많은가요?
토마스 : 많아. 직접 집회에 나가지는 않지만, 우리들의 인권을 위해 싸우는 사람들이 있어서 우리들의 삶이 좋아진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아.
정숙 : 와~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소수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많다는 게 놀랍네요.
정숙 : 또, 오빠는 여러 모임의 운영자이시기도 한데. 5월로 100번째 모임을 갖는 ‘양반67모임’과 얼마 전 10주년 기념미사를 드린 천주교 이반모임 ‘안개마을’의 초대 회장님이시기도 했잖아요. 활동력과 조직력이 대단하신 거 같아요. (일동 부러움의 짝짝짝)
토마스 : 양띠들이라 잘 모이는 것 같아. 양들이 떼로 몰려다니잖아. 개띠들이 개떼처럼 모 여 다니듯이. (웃음)
정숙 : 종교를 가지고 있는 동성애자들이 자신의 정체성을 깨닫고 나면 동성애에 배타적인 종교를 멀리하게 되는 거 같아요. 저도 정체성을 깨달은 후에 냉담하기 시작했는데, 오빠는 오히려 천주교 이반모임을 만들어서 활동을 하셨잖아요. 종교와의 갈등은 없었어요?
토마스 : 나는 정체성을 먼저 알고 나서 나중에 종교를 가지게 된 케이스라서. 동성애자로 살면서 잘못된 동성애문화에 젖어 뭔가 회개를 하고 싶었어. 그래서 집 앞에 있는 성당을 찾아가서 세례를 받았어. 그 뒤에 가톨릭신자였던 친구와 큰 기대를 갖지 않고 카페를 개설했는데, 정말 나 같은 사람이 많았는지 회원 수가 한 달 사이에 급격히 늘더라고. 그래서 나는 이 많은 친구들과 뭔가를 해보고 싶었어. 카페를 개설할 당시 우린 둘 다 컴맹이었는데, 이것저것 해보다 보니 친구는 나중에는 쇼핑몰까지 운영하는 컴퓨터 도사가 되더라고.
정욜 : 활동이 컴맹을 컴도사로 만들었다. (웃음)
정숙 : 저도 안개마을에 가입을 했는데, 가입인사 질문 중에 “이반의 정체성을 깨닫고 신앙적인 갈등이 있었나요? 현재 본인의 마음은 어떤가요” 라는 질문이 인상적이면서도 묘하게 가슴이 아프더라고요. 많은 회원들의 답 글을 보니 저와 비슷한 마음이었던 거 같은데, 대표로서 갈등하고 있는 회원들에게 어떤 위로의 말을 해주셨나요?
토마스 : 예전에 이해인 수녀님이 섹스워커들을 찾아가서 했던 강론 중에, “우리는 하느님의 작품이다”라는 에페 서에 나오는 성서구절을 인용해 말씀을 하신 적이 있었어. 나같이 이 사회에서 소외받는 사람들에게 위로가 되는 말씀이었지. “그래, 우리는 하느님의 작품인데, 우리를 죄책감에 들게 하는 이 사회에서 위축되지 말자”라고 회원들에게 자신감을 줬어.
정숙 : 종교적 신념 때문에 갈등하고 있는 상황에서 많은 위로가 되었을 것 같아요.
정욜 : 앞에서도 물어봤었는데 동인련과 같이 인권운동 단체들에게 바라는 점이 있다면요?
토마스 : 나는 인권운동이라는 게 거창한 거라고 생각하지 않아. 내 가족을 사랑할 권리, 내 애인을 사랑할 권리 이런 게 인권이라고 생각해. 달팽군처럼 거리에 나가서 싸우다 잡혀가는 것이 아니고. (일동웃음 - 인터뷰한 이 날은 삼성반도체에서 근무하다 의문의 백혈병으로 사망한 박지연 씨의 죽음에 항의하다 연행되었던 달팽군이 경찰서에서 나온 날이었다.) 사람들은 인권이라 하면 자신을 드러내고 피켓을 들고 거리로 나가야 된다고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 같아. 물론 참여가 중요하지만, 먼저 그들의 인권 문제에 대한 관심을 높일 수 있는 활동들을 생각했으면 좋겠어. 인권활동가는 전위적이고 전투적일 거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인권이라는 것이 보편적인 것이잖아.
정욜 : 저는 거리로 나가는 게 힘이라고 생각해요. 한사람이 나가는 것 보다 열 명이 나가는 게 우리의 힘을 보여주는 거라고 생각해요. 재미도 있고.
정숙 : 그러면 마지막 질문. 오빠에게 종로란?
토마스 : 마음의 고향이지, 외로울 때 찾아가는 곳.
정숙 : 근데 그루가 무슨 뜻이야?
토마스 : 메뉴판에 써 있었는데, 안 봤구나?
정숙 : 안주만 보느라...
(일동웃음)
그루란?
풀이나 나무 또는 곡식 따위를 세는 단위. 그에 더해 ‘터기’란 접미사를 붙여서 쓰면 풀이나 곡식 또는 나무 따위를 베고 남은 밑 둥을 뜻하며, 초 따위의 쓰다 남은 밑 둥, 바탕이나 밑천을 뜻한다. 삶이 외로운 많은 사람들에게 이곳 ‘그루’가 허한 마음을 채울 수 있는 바탕, 삶을 행복하게 살아나갈 수 있게 하는 밑천이 되었으면 좋겠다. 혹독한 겨울이 지나고 봄이 될 때마다 한 그루, 두 그루 자라나는 새 나무들처럼 울님들의 행복도 한그루, 희망도 두그루 자라나길 바라며. 그루터기가.
인터뷰 정리 : 정숙 _ 동성애자인권연대 운영회원
인터뷰 참석 : 정숙, 정우, 정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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