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연대

무지개빛 메이데이: 성소수자+노동자, ‘연대의 끈’을 엮다.

by 행성인 2010. 5. 28.

무지개빛 메이데이: 성소수자+노동자, ‘연대의 끈’을 엮다.

2010. 120주년 메이데이 현장 캠페인 사진



메이데이, 라면 가장 강렬한 기억은, 2003년의 그 날이었을 것이다. 육우당이 4월 25일에 세상을 떠나고 슬퍼할 겨를도 없이 다가온 메이데이에 이 비극적이고 분노스런 진실을 알리기 위해 밤늦도록 유인물을 찍어내고 검은색 조기와 추모 플랑카드를 만들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우리는 비통한 심정으로 거리에 나섰고, 메이데이를 위해 모인 노동자들에게 정신없이 5천부의 유인물을 뿌렸다. 그리고 어쩌면 매우 뜬금없었을 검은 조기와 배너를 들고 행진에 합류했다. “한 동성애자의 죽음을 추모합니다.”라고 말이다.

참가자들은 우리 유인물을 정말 유심히 읽고 함께 애도했다. 당시 메이데이에 참가했던 낯 모르는 사람들도 우리 게시판에 들어와 추도의 글을 남겼고, 현장에서 함께 슬퍼해주었다는 이야기가 곳곳에서 들려왔다. 매우 비통했으나 그래도 바닥에서부터 솟아오르는 힘을 느꼈던 날로 기억한다.

그리고 우리는 매해 노동절 참가단도 꾸려보고, 홍보물도 만들어보며 다시 2010년을 맞았다. 여전히 무지개 깃발은 노동자 집회에서 낯설게 느껴진다. 2002년 대학생이었던 내가 메이데이집회에서 처음으로 무지개깃발 아래 앉은 동인련 활동가들을 만나고 매우 쭈볏대던 불편함과 같으리라.

그러나 올해는 달랐다. 우리는 작년 하반기부터 성소수자운동과 노동운동을 엮기 위한 활동을 시작했다. 작고 미미한 변화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어쨌거나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다. 민주노총에 처음으로 작업장에 성소수자가 있다는 당연한 사실을 홍보하기 시작했고, 작년 노동자대회와 올해 여성의 날에 성소수자가 언급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메이데이에 우리는 큰 부스를 차렸다.

부스는 무지개깃발과 애써 준비한 각종 전시물로 꾸며졌다. 전시물의 내용은 ‘당신의 작업장에도 성소수자 동료가 있다’거나, ‘직장에서 성소수자 동료를 존중하기 위해 필요한 태도’ 등에 대한 설명, 그리고 민주노총에 제안한 성소수자 차별을 개선하기 위한 ‘모범단협안’ 설명으로 채워졌다. 집회 참가자들에게 신선한 내용이었다고 생각한다.

전면에는 따로 테이블을 세워 군형법92조 탄원서 서명을 받았다. ‘노동이슈도 아닌데 왜 들고 나왔을까?’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반응은 좋았다. 300명이 넘는 사람들이 탄원에 동참했다. 스무명 정도의 동인련 회원들과 친구사이 활동가들도 합세하여 기가 막힌 동성애자 억압법에 대해 조곤조곤 설명하고 힘차게 주장도 펼쳤다. 물론 간혹가다 설명을 들은 분들 중에는 우리 주장에 동의하지 못하거나 논쟁을 하게 되는 경우도 있었다. 거의 처음 거리에서 서명을 받는 회원들도 있었기 때문에, 행여 상처를 받거나 힘들어하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역시 기우였다. 거리에서 사람들과 대면하며 우리의 이슈를 설득해내는 일은 어느새 자신감을 심어준다. 특히 우리처럼 세상에 있는 그대로를 드러내지 못하고 살아온 사람들에게 이런 경험은 무엇보다 값지고 뜨겁다.

한 편에서는 동성애자 고용차별에 대한 스티커 설문판을 세웠다. 모두가 정답에 투표하리란 우려(?)와는 달리, 성적지향에 따른 고용차별은 반대하지만 동성애자가 교사를 할 수는 없다고 생각하는 경우도 가끔씩(!) 발견되었다. 그렇다고 우리가 크게 상심하거나 절망할 일은 아니었다. 이러한 혼란은 어찌보면 (성소수자 권리를 지지하는 사람들에게도) 당연한 일이며, 인식을 확산시키고 우리의 권리를 구체화시킬 필요가 있음을 다시 한번 느끼게 되는 계기가 된다.

성소수자 노동권팀에서는 ‘성소수자 노동 문제’에 힘을 받으려면, 무엇보다 지지자를 많이 만나야 한다는 생각이 일치했다. 그 일환으로 ‘연대의 끈’ 엮기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우리 부스에 오시는 분들에게 방명록을 받았다. 이 방명록은 앞으로 성소수자 노동권 이슈를 전달하고 홍보하는데 사용될 것임을 일일이 설명했고, 많은 분들이 호응을 보내주었다. 막연한 연대에서 눈에 보이는 연대를 건설할 수 있는 희망이 느껴졌다. 뿐만 아니라 눈도장도 단단히 찍었다. 성소수자 노동권을 지지하는 사람들의 사진을 찍어서 모아두었다가 올해 노동자대회 때 멋들어진 ‘연대의 결실’로 재탄생시킬 계획이다. 우리가 다채롭게 준비한 구호를 적은 팻말이나 무지개 컨셉의 가면 등을 활용해 재미있는 사진들을 많이 찍었다. 흔쾌히 사진촬영에 응해준 분들에게 깊은 감사를 드린다.

나는 개인적으로 이번 메이데이 집회에서 여러 사람에게 커밍아웃을 했다. 대학원에서 같이 공부하는 동료들과 합창연습을 함께해온 전교조 서울지부의 교사들을 이 곳에서 우연히 만난 것이다. 왠지 부스에서 맞닥뜨리니 그렇게 당황스럽지도 않았고, 오히려 지지자를 만난 듯 반갑게 우리 활동을 설명했다. 다행히도 모두가 흔쾌히 지지금을 내거나 사진을 찍어주고 연락처를 남겨주었다. 전교조 선생님들은 학교에서 나누어주겠다며 청소년 성소수자에 대한 선전물을 더 챙겨가기도 했다.

우리에겐 힘이 있다. 다소 무겁고 딱딱한 주제마저 무지개처럼 다채롭고 핑크빛처럼 행복하게 승화시키는 즐거움이 바로 그 힘이다. 덕분에 메이데이 활동은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다. 메이데이에서 많은 노동자들을 만나며 우리는 조금 더 맷집을 키웠고, 조금 더 연대의 끈을 늘렸으며, 조금 더 단단해졌다. 성소수자+노동자. 이 두 가지를 어떻게 구체화하고 연결할지에 대해 보다 면밀히 살필 때이다.

우리는 이제 성소수자 노동자들을 더 많이 만나서 이야기를 듣기 위해 2차 면접조사를 기획하고 있으며, 당장에 탄압받는 교사, 공무원 노동자들을 적극적으로 방어하기 위한 활동을 논의하고 있다. 우리 성소수자들에게도 투쟁하는 노동자들과 함께할 것을 제안하고자 계획을 세우고 있다. 모든 사람이 평등한 일터를 만들어가는 한걸음마다 여러분과 함께 하고 싶다.

MBC파업을 지지하는 동성애자인권연대 깃발



마지막으로 이번 메이데이 집회에 참가한 분들에게 드렸던 글과 함께 마무리하겠다.

- 성소수자에 대한 고용 차별, 어떻게 생각하세요?
- 동성애자는 초등학교 교사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하세요?
- 동성애자가 성직자라면 어떨까요?
- 동성애자 상담원이 청소년에게 성정체성 상담을 할 수 있을까요?

한 조사결과를 볼까요?
성소수자에 대한 고용차별은 무려 90%가 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직장에서 커밍아웃하는 성소수자는 좀처럼 없습니다.
성소수자 고용차별을 반대하는 90%의 사람들 중 절반 가까이는
동성애자가 아이들을 가르치는 교사나 성직자, 상담원이 되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동성애자들은 이미 모든 직종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법적인 차별뿐만 아니라, 사회의 편견과 억압과도 동시에 대결하고 있습니다.
그냥 생각으로만 머물러 있지 마세요.
여러분의 일터에 함께 일하고 있는 동료 성소수자.
그 이가 홀로 부딪히는 거대한 편견과 억압의 벽을 함께 넘어주십시오.
그 벽 너머에는,
모든 노동자가 세상의 주인이 되는 새로운 세상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성소수자는 노동자의 일할 권리, 단결할 권리를 위해 함께 싸웁니다.
이명박 정권에 맞선 노동자들의 투쟁을 지지합니다!

이경 _ 동성애자인권연대 성소수자노동권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