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GBT HIV/AIDS 운동의 새바람 : <LGBT & AIDS, 그 달관의 경지> 소개와 준비과정, 그리고 프로젝트의 의미
드디어 HIV/AIDS 인권팀 프로젝트 <LGBT & AIDS, 그 달관의 경지>의 백미인 전시가 10월 20일부터 이태원 ‘대안공간 꿀’ 에서 시작된다. 아름다운 재단으로부터 후원을 받아 일 년 가까이 준비해온 사업이 이제 결실을 맺게 된 셈이다.
프로젝트는 국내 LGBT커뮤니티 내부에서 그동안 거의 단절되다시피 했던 PL(People Living with HIV/AIDS)과 LGBT 사이에 발생하는 불신을 개선하려는 의도로 계획되었다. 이는 성적 소수자들이 줄곧 에이즈의 주범이라는 꼬리표를 달아야 했던 한국 사회에서 성소수자 감염인들의 목소리를 공유할 수 있는 과정의 한 걸음이다.
성소수자, 특히 남성 동성애자들은 사회의 주변적 위치와 포개어지면서 지금에 이르기까지 에이즈의 주범으로 공격의 대상이 되곤 한다. 이제 성소수자의 존재는 사람들에게 익숙해졌지만, 게이 감염인, 트랜스젠더 에이즈환자는 이성애자들 뿐 아니라 성소수자들에게도 여전히 생소하고 부정적인 이방인으로 취급된다.
특히 에이즈예방만을 강조하는 ‘착한 캠페인’의 홍수 속에서 감염인들이 운신할 수 있는 폭은 좁아질 수밖에 없다. 더구나 성소수자 감염인의 경우 감염되었다는 사실은 이중의 낙인으로 돌아온다. 특히 성소수자는 취급도 하지 않는 한국사회에 서로를 지켜주고 지지해온 사랑하는 연인과 친구들과의 관계를 끊어야 할 뿐 아니라, 종로와 이태원 등의 한정된 공간에서 감염사실이 소문나면 발을 들여놓기 어려워지는 현실은 그 상처를 배가 시킨다. 성소수자들의 자기검열 속에서 감염은 그 자체로 당사자들의 삶에 치명적인 덫이 된다.
상황이 이러하니 성소수자 감염인들이 자신의 목소리를 제대로 낼 수 있는 통로가 많지 않음은 당연한 사실로 받아들여진다. 자신들이 감염되었다는 노출에 부담을 갖는 것은 아마도 우리가 생각하는 커밍아웃에 대한 부담보다 더 무겁고 힘들 수밖에 없다.
이에 우리는 감염인들이 좀 더 자유롭고 안전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보다 많은 사람들이 들을 수 있는 통로를 만들고 싶었다. 감염인들의 목소리를 독려하고 새로운 형식으로 만들어 공감할 수 있는 자리를 만들고 싶었다. 커뮤니티 내부에 자성의 분위기를 만들고 싶었고, 성소수자 커뮤니티의 구성원들이 같은 소수자의 감수성으로 서로의 치부에 귀 기울일 수 있는 언어들을 만들고 싶었다. 질병에 대한 무조건적인 혐오와 감염인에 대한 부정적인 묘사를 다르게 그리고 싶었다.
여기에는 정치적인 구호를 직설적으로 전달하는 건조한 방식보다 소수자의 감수성을 공유할 수 있는 언어들을 생산해보자는 팀 내부의 ‘다짐’ 이 있었다. 울 때 울고 분노할 때 분노하더라도 너무 무겁지만은 않은 분위기를 조성해보자는 합의도 있었다. 무엇보다 감염인 당사자들이 즐길 수 있는 프로젝트가 되기를 바랐다.
누구라도 자신이 애지중지하던 커뮤니티 내부에서마저 이런 혐오와 배제를 당하고 나면 인생의 바닥을 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고, 이런 분위기 속에서 감염인 당사자들은 원치 않게 세상을 달관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 라는 이야기도 나눴다. 이 농담 같은 이야기는 이번 프로젝트의 주제 <LGBT & AIDS, 그 달관의 경지>가 만들어지게 된 계기가 되었다.
프로젝트는 텍스트 공모전과 미술 전시로 구성된다. 텍스트 공모전에서 선정된 글을 바탕으로 작가가 작업을 하고 전시하는 과정을 거치는 것이다. 먼저 텍스트 공모전 <이중의 억압, 달관의 계기>는 성소수자 커뮤니티 내부 PL을 둘러싼 일상을 주제로 5월 한 달 간 진행되었다. 사실 감염인 텍스트는 기존의 에이즈 수기나 감염인 커뮤니티 내부 게시판의 자기고백만으로도 부족함이 없다. 하지만 우리는 성소수자 커뮤니티 내부에서 열린 형식을 표방하며 새로운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 또한 중요한 의미를 가질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 공모전을 해보자!
대신 우리는 형식상에 변화를 줬다. 먼저 주제를 정해놓고 공모대상을 PL과 비감염인 모두에게 열어놓았다. 장르와 분량도 한정을 두지 않았다. 다만 주제는 성소수자 커뮤니티 내부의 HIV/AIDS 이슈들로 한정을 지었다. 공모기간동안 과연 몇 편의 글들이 들어올지, 선정 개수를 넘길 수는 있을지 조마조마했던 팀원들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다.
다행히 공모전에는 적지 않은 글들이 들어왔다. 그 형식도 시부터 비평, 팬픽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장르의 재미있고 감동적인 글들이 응모되었다. 더불어 기존에 존재하는 글들과도 연계하기 위해 우리는 감염인 커뮤니티에 양해를 구해 주제에 부합하는 몇 편의 글을 가져왔다. 이후 HIV/AIDS 인권팀 내부에서 ‘빡센’ 워크샵을 통해 10여 편의 글을 선정했다.
이제 문제는 전시. 사실 국내의 미술계나 대중문화는 에이즈 이슈의 불모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드라마 중에도 어린이 감염인을 주제로 한 예들이 있긴 하지만, 그건 ‘착한 감염인’의 표본일 테고, 우리같이 두 번 낙인찍힌 성소수자 감염인의 재현은 찾아보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따라서 동인련은 맨땅에 헤딩하듯 새로운 작가를 발굴하고 새로운 언어를 만들어내야 하는 과제의 부담을 안아야 했다.
전시주제는 <Zaps for PL>, PL을 위해 사회적 편견에 한방 날려보자, 정도의 뜻을 갖는다. 새로운 비전을 만들어가는 프로젝트의 이념상 공개적인 공모를 통해 많은 작가를 선정하여 이미지를 다양화하고 싶었지만, 조건상의 한계로 우리는 단독작가를 두어 기획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전시의 성격을 잡게 되었다. 마침 평소 소수자 언어에 관심을 가지고 작업을 해온 김나리는 인권팀에도 적극적으로 활동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참여 작가로 손색이 없었다.
상반기동안의 준비는 큰 어려움이 없었다. 기획서는 일사천리로 만들어졌고 공모전도 큰 하자 없이 진행되었다. 무엇보다 ‘복합문화공간 꿀ggooll’ 은 일 년 치 전시스케줄이 꽉 찼음에도 불구하고 흔쾌히 전시공간을 제공해 주었다. 가난한 단체에게 2주가량의 시간을 내어줄 장소는 흔치 않기에, 장소를 물색하는 작업은 가장 막막했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꿀 측의 배려 덕분에 우리는 주말저녁 전시를 보고 밤이면 이태원 클럽에 가서 놀 수 있는 동선(!)까지 확보할 수 있게 되었다.
상반기의 작업들이 텍스트와 물밑작업이 주를 이뤘다면 하반기의 준비는 대부분 전시비용과 전시 내용 등 실무에 관련된 것들이다. 준비과정 중에 작가는 국내 이반바의 풍경을 그대로 차용해 전시공간을 채우는 컨셉을 밝힌 바 있다. 이를 가시화하기 위해서는 수많은 이반바들을 돌아다니면서 장소의 이미지들을 데이터화하는 작업이 전제되어야 하며, 그에 앞서 이반바 관계자들로부터 장소를 제공받기 위한 충분한 설득작업이 필요하다. 업소관계자라면 이쪽 손님들에 신경을 써야 하니 질병에 대한 인식에 민감할 수밖에 없을 텐데, 과연 HIV/AIDS를 주제로 하는 전시를 업소들이 허락해줄까? 하지만 우려와는 달리 바 사장님들은 흔쾌히 장소이미지를 허락해주셨다. (업소 관계자분들께 감사를.) 여기에는 작가의 부지런함과, 평일과 주말을 가리지 않고 종로/이태원/홍대에 출석도장을 찍었던 동인련 회원들의 ‘기동력’이 혁혁했다.(게이총각과 해와, 감성청년에게 박수를.)
하지만 이후의 전시준비는 순탄치 않았다. 전시 성격과 구체적인 비용을 조율하는 것부터 전시 내용을 구성하는 데 있어 현실적인 차별의 맥락을 어떻게 담아낼 것인지에 대해 어려움이 따랐다. 무엇보다 성소수자 이슈, 특히 성소수자 당사자들도 다루기 꺼려하는 HIV/AIDS이슈를 텍스트와 이미지로 풀어내는 작업에는 차별의 불편한 현실을 담기 위한 ‘편하지 않은’ 논의과정이 필요했다. 한편으로는 우리가 모험을 한다는 생각도 들었다. 동인련에 맞지 않는 옷을 입는 것 같다는 목소리도 들렸고, 종종 작가와 활동가 사이에 충돌지점도 있었다. 입에는 ‘엎어버려’를 진담처럼 달고 다녔지만, 여기에 농담처럼 반복된 대답. ‘엎는 건 쉬워?’ 물론, 웃자고 하는 얘기다.
내부의 지적처럼 이런 성격의 프로젝트는 처음이고, 우리의 역량은 완벽할 수 없었다. 어쩌면 전시 이후에도 전시 내용에 대한 아쉬움이나 준비상의 소홀함이 지적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어려움 속에도 적지 않은 수확들도 분명 있었다. 전시공간에 우리의 프로젝트를 설득하고 사람들에게 후원을 호소하는 과정이, 더불어 준비과정 중에 이반바를 순회하며 전시의 취지를 설명하고 공간의 기록을 독려하는 과정은 사소할지라도 HIV/AIDS의 이슈를 새로운 방식으로 환기하고 문제의식을 공유하는 계기임이 분명했다. 이는 다양한 문화적 언어를 매개로 사회적 이슈들을 교감할 수 있는 가능성을, 나아가 다양한 방식의 참여가 구성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스스로 이렇게 평가한다면 뻔뻔해 보일 수 있겠으나, 우리의 시도는 쉽지 않은 이슈를 거부감 없이 다룰 수 있다는 일종의 ‘선례’ 로 남을 것이라는 점에 그 의의를 둘 수 있을 것이다. 비록 그 선례에 부족함이 있다 할지라도(!) 우리의 프로젝트는 이후 질병에 대해 막연함을 넘어서는 다양한 방식의 접근들에 동기부여가 될 것이며, 그것만으로도 우리는 큰 성과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무엇보다 우리는 이번 프로젝트가 성소수자 감염인과 성소수자 커뮤니티 사이의 증오와 불화를 종식하는 한 걸음으로 작용하기를 기대한다.
웹진이 발행될 이 시점에도 여전히 인권팀은 전시를 준비하고 있을 것이다. 포스터와 리플렛이 나오고, 이제 전시오프닝 이후의 프로그램들을 준비하고 있겠지. 우리가 마련한 프로그램들은 앞으로 어떻게 그림을 그려나갈까.
부족한 전시자금을 충당하기 위해 우리는 ‘텀블벅’(http://www.tumblbug.com)이라는 독립문화창작자 소셜펀딩회사에 프로젝트를 제안해 대내외적인 후원을 구하고 있다. 회원 뿐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이슈에 공감하고 참여할 수 있기를 바라는 뜻에서 선택한 것이지만, 한편으로는 참으로 낯선 시도들을 많이 ‘저지르고’ 있다는 불안감도 생긴다. 하지만 이것마저 우리에겐 프로젝트를 위해서라면 응당 치러야할 위험부담일 터, 더 이상 <달관의 경지> 프로젝트는, 성소수자 HIV/AIDS 이슈는 ‘우리’의 범주 안에만 머물러선 안 될 과제가 되어야 하며 또 그래야만 한다.
그러니, 이제 여러분의 소중한 관심과 후원을 아끼지 말자!
텀블벅’(http://www.tumblbug.com) 후원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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