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pping for Act, Mapping for Us!
-동성애자 인권연대 HIV/AIDS 인권팀 포럼 “우리는 여기에 있었다” 후기
이 모든 게 한편의 영화 때문이었다.
올해 초, 나는 서울LGBT영화제의 프로그램 코디네이터로 활동을 시작했다. 프로그램팀의 일이란 많은 영화를 보고, 그 해 영화제에 상영할 영화를 찾는 것이다. 영화를 보는 일은 행복하지만 상영작을 고르는 건은 까다롭다. 한정된 자원으로 준비하는 작은 영화제인지라, 맘에 든 모든 작품을 틀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보자마자 꼭 틀고 싶다는 마음이 드는 영화를 만나기는 더 어렵기 때문이다.
딱 한편의 영화가 있었다. 보자마자, ‘이 작품은 아무리 비싸더라도 꼭 틀어야 한다.’는 마음을 갖게 한 영화가. 자막도 없이 노트북으로 본 스크리너만으로도 눈물이 났던, 꼭 내가 번역을 맡겠다며 겁 없이 나섰던, 내가 ICAAP10에 가게 된 계기도, 동인련 HIV/AIDS 인권팀과 나누리+에서 활동하게 이끈 것도 이 영화다. 지난 26일 서강대학교 아담샬관에서 진행된 동인련 HIV/AIDS 인권팀 포럼의 제목이기도 한, <우리는 여기에 있었다>. 요즘도 가끔 생각한다. ‘이 모든 게, 바로 그 영화 때문이라고’
에이즈 30년, 한국의 26년, 그리고 HIV/AIDS 인권팀의 1년
동인련 HIV/AIDS 인권팀이 만들어진지 1년 남짓의 시간이 흘렀다. 활동을 막 시작한 나는 이제 겨우 '문제의 ICAAP10'의 충격에서 벗어나, HIV/AIDS에 관련한 이슈를 공부하는 중이지만, 그 동안 동인련 HIV/AIDS 인권팀은 세미나를 하고, ICAAP에 참여하고, 얼마 전 <Zaps for PL> 이라는 주제로 전시회를 갖기도 했다. 그리고 지난 11월 26일, 서강대학교 아담샬관에서 “Mapping for Act", <우리는 여기에 있었다>라는 제목으로 포럼을 개최했다. 지난 활동을 되돌아보고, 앞으로 동인련 HIV/AIDS 인권팀이 집중해야할 고민거리를 탐색하는 자리였다. 1
포럼은 크게 세 가지 층위의 역사를 다른 방식으로 훑는다. 미국의 게이 커뮤니티에서 에이즈가 처음 발견된 이후의 “에이즈 30년”은 시각예술에서 남성 동성애자와 HIV/AIDS가 표현되어온 방식을 중심으로 추적한다. 그리고 지난 26년간 한국사회에서 PL과 LGBT의 관계에 대한 고민과 앞으로의 연대를 모색하고, 마지막으로 동인련 HIV/AIDS 인권팀 1년의 활동을 정리하며 새롭게 등장하는 이슈인 국제연대와 청소년 PL에 대한 논의를 함께 나눈다.
각각 별개의 포럼을 해도 될 만큼, 세 가지 모두 덩어리가 큰 주제였다. 생각할 거리도 많고 함께 나눌 이야기도 많았다. 오전에 시작해서 점심을 함께 먹고 저녁까지 진행 된 긴 포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간이 지날수록 많은 분들이 모였고, 더 많은 질문과 토론이 이어졌다. (참 진부한 표현이지만 사실이다!)
우리는 여기에 있었다
첫 번째 발제를 맡은 웅은 "동성애자 에이즈 재현에 관련된 논의“라는 제목으로, 에이즈 위기부터 오늘의 한국사회까지 시각예술에서 동성애자, AIDS가 표현되어 온 역사에 대해 이야기를 해 주었다. 신체적 변형에 집착한 언론의 재현이 어떻게 휴머니즘적 접근으로 변화했는지, 이에 대항하는 액트업과 그랑퓨리의 활동이 어떻게 전개되었는지, 그리고 커뮤니티의 애도로서 큰 인상을 남긴 에이즈 메모리얼 퀼트와 개인적인 상실의 경험을 작품의 주제로 삼은 펠릭스 곤잘레스 토레스의 작품들. 조금은 낯설었던 PL의 ‘파즈 앤 프라우드 문화’와 한국의 사례로는 올해 초 김준수 작가의 사진전 <Hello, Gabriel~>까지 30년의 역사를 성실하게 다룬 밀도 있는 발제였다. (웅의 발제문은 소논문의 형식으로 인천문화재단의 2011년 제4회 플랫폼 문화비평상 당선작이기도 하다.) PPT를 통해 작품을 보며 이야기를 듣는 동안, 내가 알고 있던/새롭게 접한 작품들이 하나의 흐름으로 정리되었다. 공공성과 공공미술의 관계에 대해, 한국사회에서의 재현의 문제에 대해 질문이 있었다. 어떻게 재현할 것인가의 문제는 운동의 측면에서도 다양한 상상력이 필요하다는 웅의 정리발언으로 첫 번째 순서가 마무리 되었다.
포럼을 기획하며, 가장 힘들 것이라 예상했던 주제가 “한국사회 PL과 LGBT 접점 찾기”였다. 동인련을 기반으로 하는 HIV/AIDS 운동을 하고 있는 인권팀의 본질적인 문제의식이면서도 여전히 모두가 어렵다고 느끼는 주제였기 때문이다.
서리는 지난 여름, ICAAP에서 있었던 에피소드로 발제를 시작했다. ICAAP이 열렸던 벡스코 밖에서 누군가가 서리에게 “감염인인가요?”라고 물었고, “그런데요”라는 답을 듣곤 바로 자리를 떠나버렸다는 이야기. 여기에서 시작된 서리의 물음은 인권팀 사람들이 공유하는 것이기도 했다. 당사자와 비당사자, 그 간극의 문제. 게이 커뮤니티에서 PL은 비가시적인 존재다. 게이 커뮤니티에서 감염여부를 드러낼 수 없는 건 사회에서 성소수자가 쉽게 커밍아웃을 하기 힘든 것과 유사하다. 서리는 동인련의 활동은 ‘감염인의 인권’을 위한 것, 제목 그대로 ‘LGBT와 PL의 접점을 찾기’위한 것이지만 여전히 명확히 설명되지 않는 상황에서, 앞으로 커뮤니티 내부의 에이즈 혐오와 배타적 관계를 구체적으로 드러내고 파악하는 작업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했다.
토론은 흥미로웠다. ‘게이와 레즈비언의 접점을 찾는 것도 어렵다’는 농반진반의 이야기가 나오기도 했고, 그동안 사회의 호모포비아에 대항해 게이 커뮤니티가 내세웠던 ‘에이즈는 게이의 질병이 아니다’라는 구호에 대한 비판과 대안을 같이 나누었다. 공통의 고민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모였음을 어느 때 보다 많이 느낄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마지막 순서는 ICAAP 이후, 인권팀의 주요한 이슈인 국제연대와 청소년에 대한 논의를 “HIV/AIDS 운동의 성과와 도전과제”라는 제목으로 진행했다. 발제는 각각, ICAAP10의 아이콘(!)인 재킴과 은찬이 맡았다.
재킴은 국제사회에서의 HIV/AIDS 이슈의 지형을 설명하고, 우리에게 왜 국제적 연대와 활동이 필요한 지에 대해, 그리고 국제 연대 활동에 발을 들이는 우리는 어떤 관점에서 어떤 방식의 운동을 펼쳐야 하는지에 대해 이야기 했다. 에이즈는 국지적 문제가 아니라 세계적인 이슈이며, 특히 다국적 기업의 특허권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의약품 접근성의 문제는 개별 국가나 단체, 개인이 감당할 수 없는 문제다. 그러나 그동안 한국에서 이루어진 국제연대 활동은 지속성을 가지기도 어려웠으며, 단단한 네트워크에 기반 한 것은 아니었다. 재킴은 장기적 관점을 가지고, 국내외의 더 넓은 네트워크를 증대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은찬은 ICAAP 이후, 청소년 소위원회에서 함께한 활동가들과 국내 Youth PL Community 알:R을 조직해 활동하고 있다. 은찬은 ICAAP에서의 경험을 통해 10대, 20대를 위한 커뮤니티를 한국에서 만드는 것이 시급하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한다. 국내에도 적지 않은 PL 커뮤니티가 존재하지만, 10대, 20대의 비율이 적기 때문에 이들이 서로 교류하고 케어 할 수 있는 공간이 필요했다는 이야기였다. “알”이라는 이름의 의미는 아직 껍질에 둘러싸인 알 안에 있지만, 가끔은 구멍을 뚫어 밖을 보기도 하는 공간, 알 안에서 함께 공감하고, 언젠가 그 껍질을 깨는 것에 대해 이야기 할 수 있는 곳이라고 했다. (“알”은 지난 12월 2일, 한국 감염인 연합회 발족식에서 그림과 문구가 적힌 귀여운 달걀을 참석자들에게 나누어 주기도 했다.)
Mapping for Act, Mapping for Us!
포럼의 후반부로 갈수록 어깨가 무거워졌다. 함께 훑어내려 온 세 층위의 역사, 세 가지의 주제는 앞으로의 활동을 모색하기 위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발제와 질문, 토론을 통해 손에 잡히는 답을 얻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물음을 얻는 과정이었다. 그렇기에, 앞으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라는 물음은 포럼에 참가한 모두의 머릿속에 여전히 물음표로 남아있으리라.
포럼의 소제목은 ‘Mapping for Act’, ‘활동을 위한 지도 만들기’였다. 좋은 지도를 그리기 위한 과정을 생각해본다. 지형을 멀리서 한번, 가까이에서 또 한 번 꼼꼼히 살피고, 알맞은 자로 재본 후에야 비로소 펜을 들 수 있을 것이다. 헤매지 않고 목적지를 찾아가기 위해선 살피고 측정하는 단계를 신중하게 여러 번 거쳐야 할 것이다. 그러고 보니, 동인련 HIV/AIDS 인권 팀의 이번 포럼은 아직 물음표가 많은, 우리가 서 있는 지형을 탐색하고, 점검하는 단계였다. 내년을 맞이하며 새로운 활동을 시작하려 준비하는 우리를 위한 지도를 그려나가기 위한. 에이즈 운동이라는 낯선 장소를 만난 지 얼마 안 된 나는 이 지도를 함께 만들어갈 시간을 잠시 떠올려본다. 어깨가 잠시 가벼워지는 것도 같다.
호림_ 동성애자인권연대 HIV/AIDS인권팀
- "경찰폭력으로 얼룩진 제10차 아시아•태평양 에이즈대회를 다녀와서 http://lgbtpride.tistory.com/366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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