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CAAP10 국제연대, 7일 동안의 기적적인 진화에 대한 이야기
2011년 8월 24일부터 30일까지 있었던 부산 아이캅(ICAAP10: The 10th International Congress on AIDS in Asia and the Pacific, 제10회 아시아태평양 에이즈대회)에서 외국 활동가와 만난 어느 동성애자인권연대 활동가의 이야기이다. 변호사에 대해 이야기하던 이 활동가는 Lawyer(로여, 뜻: 변호사)를 Liar(라이어, 뜻: 거짓말쟁이)라고 발음하는 실수를 저질렀다. 변호사를 거짓말쟁이로 둔갑시킨 이 사소한 해프닝. 이런 크고 작은 영어에 관한 재미난 실수담들 정도가 우리가 처음 아이캅에서 기대했던 국제연대의 성과가 아니었을까.
예상과는 달리 아이캅을 통해 얻어진 국제연대 판은 생각보다 커졌다. 이 글에서 나는 지난 여름의 끝자락에서 부산 벡스코를 배경으로 7일 동안 몰아닥쳤던 국제연대의 진화에 대해 이야기해보겠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국제연대의 경험은 우리와 다른 곳에 살고 다른 말을 하는 이들에 대한 또 하나의 포비아를 극복하는 과정이지 않았나 싶다.
첫번째 연대: 읽기
아이캅을 준비하면서 소위 통역담당인 나에게 떨어진 첫 번째 과제는 유엔에이즈에서 나온 게팅투제로(Getting to Zero)라는 소책자를 번역하는 것이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해서 소책자 가운데에서도 아주 일부인 5-6페이지의 요약본을 번역하는 것이었다.
이 게팅투제로로 말하자면, 유엔에이즈가 2011년부터 2015년까지 전 세계적으로 이루고자하는 방향과 목표를 담은 글이다. 전략적 방향 세 가지는 (1) 사회운동을 통해 에이즈 예방정책을 개혁하고, (2) 감염인의 치료, 보호, 지원을 위해 사회보장정책을 확대하고, (3) 인권과 성평등을 증진하자는 것. 이에 따른 비전과 목표 세 가지는 (1) 신규 감염을 제로로, (2) 에이즈로 인한 사망률을 제로로, (3) 에이즈 감염인에 대한 차별을 제로로 만들자는 것이다. (더 자세한 내용이 궁금하신 분들이 있겠지만, 지면상 여기서는 대강의 그림만 그리고 넘어가도록 하겠다.)
앞 문단의 설명이 복잡하다면 몇 가지 키워드에 관심을 가지시라. 사회운동, 보장제도, 그리고 차별금지와 인권. 이 얼마나 반가운 말들인지. 가끔은 우리가 매일 하는 이야기를 어디선가 다른 사람이 떠드는 것을 듣기만 해도 반가운데, 이렇게 유엔 "씩"이나에서 만든 공식 문서에서, 그것도 상당히 구체적인 목표를 가지고 재정을 쏟으면서 무언가 활동을 하고 있다니 감동하지 않을 수 없다. 이대로만 되면 얼마나 좋을까?
이 5-6페이지의 글은 말하자면 아이캅을 위한 오리엔테이션 같은 것이었다. 적어도 이 대회를 주최하고 참가하는 사람들이 모두 공통적으로 지향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확인하는 것이니까. 말이 통하지 않아도 몇 가지 키워드를 던질 수는 있고, 별다른 설명없이도 연대할 수 있는 기반이었다. 같은 꿈을 가진 사람들의 만남이라니 이 얼마나 벅찬 감격의 장이었던가.
두 번째 연대: 듣기
꿈은 꿈, 이미 이루어졌다면 꾸지도 않을 것임을 우리는 현실을 통해 배운다. 게팅투제로는 비전이며 우리가 이루고 싶은 지향이지만, 그 과정에서 우리는 참으로 못난 현실을 직면해야 한다. 그 못난 현실은 아이캅 첫날부터 시작되었다.
우리가 해외활동가들에게 듣기 시작한 이야기는 활동가들이 입국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 이유를 물으니, 어떤 경우는 한국대사관이 비자발급을 공식적으로 거절해서, 어떤 경우는 한국대사관이 여러 번에 걸쳐 비자심사를 미루어 결국 아이캅이 시작될 때까지 처리를 하지 않아서, 어떤 경우는 해외 감염인이 에이즈 치료를 위해 사용하는 약물이 한국에서는 불법으로 금지되어서 등등의 이유였다. 입국하지 못한 사람들 가운데에는 학술발표에서 발표자로 예정된 분들도 있었고, 대부분 이미 대회등록비를 부담하고 비행기와 호텔도 예약한 상태였다.
이런 국제적 또는 외교적인 이야기를 들을 때 우리의 생각은 혼란스러워진다. 이런 일이 말도 안 된다고 불쑥 화가 나기도 하고, 누구를 원망해야 하는 건지 헷갈리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원래 어떻게 되어야 하는 건지 몰라 이렇다 저렇다 말도 못한다. 이런 입국의 문제는 우리가 생각조차 못했던 일이기도 하고,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모르는 미지의 영역 때문이기도 하다. 국제 혹은 외교의 문제는 어쩐지 우리의 역량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슬프지만 눈감을 수밖에 없는 남의 이야기라는 생각이 불쑥 스치기도 하는 걸 어쩌랴.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엔 달랐다. 우리 바로 옆에 서있는 해외활동가가 부산에 들어오지 못하고 있는 다른 활동가의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 그 이야기의 무게는 달랐다. 누구를 원망해야 할지 확실하지는 않지만, 일단 이 사실을 다른 참가자들에게 알려야하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우리가 무언가 해야 한다는 책임감이 발동했다.
연대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어쩌다 보니 우리가 당연히 있는 자리에 누군가는 참석하지 못했고, 우리는 그 참석하지 못한 이들의 이야기를 전달해야 했다. 국제사회에서 우리의 위치에 관한 새로운 발견—우리도 해외에 있는 누군가를 옹호하는 활동가이어야 했다. 그 시작은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 데서 시작되었다.
세번째 연대: 말하기
경찰폭력사건 후 국내외 활동가들이 APV에 모여 대응방안에 대해 논의하고 있다. (마이크 : 통역자, 통역자 옆 조명환 조직위원장)
아이캅 기간 동안 해외활동가들 앞에서 우리가 리더십을 발휘하게 될지 어디 상상이나 했을까. 활동가들 가운데에는 그저 그런 국제회의를 예상하고 일찍 회의장을 떠난 분들도 있었다. 나라고 별반 다르지 않았다. 몇 가지 학술발표장에 들어가서 듣고 기록하고 그 내용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것이 나의 역할이라고 생각했다. 한국말로 제대로 통역을 안 해주는 이 국제대회에서 국내활동가들이 뭘 더 이상 기대할 수 있었으랴.
아이러니하게도 27일에 있었던 경찰의 불법채증과 감시, 그리고 이로부터 이어진 경찰폭력 사건은 국내활동가와 해외활동가들의 관계를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함께 해결해야 할 문제를 맞닥뜨렸을 때, 언어의 벽이고 뭐고 불편하지만 어떻게든 극복해야 할 것이 되었다. 외국인이라면 일단 피하고 보았을만한 국내활동가들이 모여들었고, 한국인에 별 관심도 없었던 외국인들도 한 자리에 모였다. 시간이 두 배나 걸리는 통역의 지루함을 견디며 서로 의사소통을 하여 해결점을 찾으려는 그 노력이란, 서로에 대한 존중 그 이상의 연대였다.
이 평범하게 생긴 해외활동가들이 모였을 때 무엇을 할 수 있는지 그 능력을 목격한 것은, 어찌 보면 내가 아이캅에서 얻은 가장 큰 배움이 아닐까 싶다. 경찰폭력 사건이 있은 후 하루가 지나도 조직위원회의 대응이 미온적이자 해외활동가들은 이를 해결하기 위해 28일 저녁 다시 자발적으로 모여들었다. 홍콩에서 온 저널리스트는 다음날 아이캅 신문에 나올 기사를 쓰고, 인도의 변호사는 유엔특별보고관에게 보낼 항의서를 쓰고, 태국에서 온 활동가는 사진을 넣고 신문지면을 편집하고, 스리랑카 활동가는 성명서를 쓰고, 호주에서 온 한국계 활동가는 한국 활동가를 위해 통역을 해주며 다음날 오전 전체세션에서 있을 행동을 함께 계획했다. 이 활동에 필요한 재정문제도 한 기관의 지원으로 해결되었다. 해외활동가들과 함께 한 토론과 활동준비는 그날 저녁7시에 시작하여 새벽 1시 30분까지 계속되었다.
물론 이 모든 활동이 해외활동가들만의 작업은 아니었다. 국내활동가들은 요구사항을 구체화하고, 작성된 문서를 검토하고, 한국어로 번역하는 작업까지 끝까지 남아 마무리해야 했다. 가장 중요하게는 해외활동가들을 포함한 전체 아이캅 참가단 대표로서 조직위원회를 만나 요구사항을 전달하고 옹호활동을 하는 일이 국내활동가들에게 남아있었다.
연대, 공동의 지향과 공동의 행동
국내외 활동가들이 경찰폭력 항의의 의미로 침묵시위를 함께하고 있다.
해외활동가들이 이렇게까지 참여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첫째는 그들도 경찰폭력의 피해자였기 때문이고, 둘째는 한국 경찰의 행태를 목격한 후 한국 참가자들의 향후 안전이 염려되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이러한 활동을 통해 국제사회에서 자신들의 역량을 보여주고 세력을 더욱 향상시키려는 각자의 이해관계가 깔려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이 큰 문제가 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문제를 해결하는 동시에 자신의 세력도 키우는 윈윈(win-win)의 관계는 인권활동을 성장시키고 궁극적으로 인권을 실현시키는 데 도움이 되는 긍정적인 동력이라고 개인적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윈윈—모두에게 도움이 되는—의 상태이기만 하다면 말이다.
또 해외활동가와 국내활동가가 이렇게 함께 활동한 것은, 무엇보다 공동의 문제의식과 목표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게팅투제로—에이즈 감염인과 동성애자, 성노동자, 약물사용자 등 관련 당사자들을 약자로 만들고 범죄인 취급하는 모든 낙인과 차별을 철폐하고 이들의 인권과 건강을 보장하는 사회를 만들려는 것이 바로 우리 모두를 부산에 모은 이유이기도 했다.
경찰이 참가자들의 안전을 돌보기보다는 이들을 잠재적인 범죄자로 취급하고, 조직위원회나 유엔에이즈 등 참가자들을 옹호할 수 있는 힘을 가진 이들이 참가자들의 피해를 방관하기만 하는 현실을 모두 함께 목격했을 때, 우리는 아주 자연스럽게 공동의 목표를 다시 한 번 상기하고 그 실현을 위해 움직이고 있었다.
네번째 연대: 쓰기
국제연대를 통해 우리는 무엇을 배웠을까? 조금 종교적인 표현을 써서 나는 그 배움을 나눔의 기적이라고 표현하고 싶다. 여러 가지 서로 다른 능력을 가진 활동가들이 모였을 때 만들어지는 기발한 상상과 표현들. 저 사람이 무얼 할 수 있을까, 나에게 어떤 도움이 될까, 별 기대를 갖지도 않고 질문도 하지 않았던 누군가에게 다가가 이야기하고 토론하기 시작했을 때 얻어지는 신기한 결과들.
물론 아이캅에서 우리의 연대활동이 얼마나 성공적이었는지에 대해 단순하게 평가하긴 어렵다. 무엇을 더 할 수 있었을까 생각해보면 아쉬운 점이 한둘이랴.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명한 것은 이제부터 시작되는 국제적인 활동에 더 이상 국내활동가들이 방관자는 아니라는 점이다. 자의든 타의든 아이캅이 끝난 후에도 우리는 계속해서 해외활동가들과 이메일을 주고 받으며 유엔에이즈와의 의사소통을 시도하고 있다.
아이캅에서 일어난 경찰감시와 폭력의 문제는 국내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이제 국제적으로 활동가와 유엔에이즈가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는 문제가 되기도 했다. 이 말은 그 해결도 단순히 한국에서의 경찰 문제를 해결하고 해외활동가가 이를 도와주는 차원을 넘어서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낙인과 차별의 문제가 우리만의 문제가 아니듯이, 경찰의 감시와 폭력의 문제도 우리만의 문제가 아니며, 특히 에이즈 감염인과 동성애자, 성노동자, 약물사용자가 겪는 이러한 어려움은 궁극적으로 모두가 함께 해결해야 할 문제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모른다, 우리의 국내 문제가 국제 활동을 통해 얼마나 해결될 수 있을지. 언어에 대한 불편과 해외활동가들에 대한 알 수 없는 불신이 또 스멀스멀 몰려오면, 또 언제든지 국내활동으로 우리의 영역을 좁혀 숨어들 수 있다.
이런 때 우리가 질문하고 결정해야 할 것은 아주 단순할 것이다—온갖 불확실성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손을 잡을 것인가 말 것인가. 그리고 이 질문은 우리가 늘 상 하는 질문과 다르지 않다—우리와 조금은 다른 상황과 처지에 있는 다른 사람들과 연대할 것인가 말 것인가.
내 생각에 그 대답은 비교적 명쾌하다: 지향이 같다면 연대할 수 있고 연대하는 것이 좋다. 낙인과 차별을 없애고 인권을 실현한다는 같은 지향을 공유한다면, 우리가 세계의 어디에서든 일어나는 일에 관심가지고 함께 활동하지 않을 이유가 별로 없다. 그 지향을 현실로 만들기 위해 누군가는 움직여야 하고, 그 세계적인 운동에 동참해서 감동을 같이 나누고 싶은 욕심도 가져볼 만하다.
이번 아이캅을 통한 국제연대의 마지막 단계로 우리는 현재 아이캅에서 있었던 일을 문서로 정리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이 정리는 다시 다음 아이캅을 준비하고 유엔에이즈의 활동과 방향에 영향력을 미치는 운동으로 이어질 것이다. 국내 에이즈 운동에서 국제연대는 이렇게 성장하고 있다.
김지혜_ 국제인권소식 "통", ICAAP참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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