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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V AIDS/ICAAP10:10차 아이캅

경찰폭력으로 얼룩진 제10차 아시아태평양 에이즈대회를 다녀와서

by 행성인 2011. 10. 14.

경찰폭력으로 얼룩진 제10차 아시아태평양 에이즈대회를 다녀와서

27일 경찰폭력 전 벡스코 1층 로비에서 열린 No FTA 반대행진


8월27일 오후2시가 가까워지면서 벡스코 1층 로비는 신나는 음악이 흘러넘치기 시작했다.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여기저기서 사진 플래시가 터졌다. 아름다운 옷을 입고 등장한 인도의 히즈라는 열정적인 춤사위로 우리를 매료시켰고 No FTA 시위에 참석하기 위해 모인 사람들은 박수로 화답했다. 레이디 가가의 Born this way 음악이 나오면서 HIV/AIDS감염인들과 지지자들의 FTA 반대행진이 시작되었다. 8월27일은 제10차 아시아 태평양 에이즈 대회 기간 중 유일하게 행사장 내에서 행진이 있었던 날이었다. 1층 로비에서 2층으로. 2층에서 3층. 다시 1층으로 내려와 각 국의 행사부스가 마련되어 있는 APV 중앙무대 앞에서 행사를 마무리하자는 계획이었다. 하지만 행진은 우리 뜻대로 마무리되지 않았다.


26일 5시 : “당신은 우리를 환영할 자격이 없습니다”


개막식장은 제10차 아시아 태평양 에이즈 대회를 축하하기 위해 모인 참석자들로 매우 붐볐다. 족히 천명은 넘어 보였다. HIV/AIDS감염인은 물론 LGBT, 청소년, 이주민, 성노동자 등으로 구성된 한국 참가단들도 그 중 일부였다. 하지만 우리는 개막식이 시작하면서부터 긴장하기 시작했고 우리가 계획된 대로 행동할 시간을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조명환 조직위원장의 연설,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의 환영사 대독을 지나 진수희 전 보건복지부 장관이 환영사를 하기 위해 연단 위에 올랐다. 우리가 계획한 행동을 보여 줄 시간이 되었다. 진수희 전 장관은 우리의 예상대로 참여자들을 향해 “환영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더 이상의 환영사를 이어가지 못했다. 한국 참가단들은 의자위에 올라 준비해 온 구호가 잘 보일 수 있게 펼쳤다. 진수희 전 장관을 향해 참여자들에게 사과하라고 요구했다. 형형색색의 피켓에는 “한국정부의 사과, (성소수자, 성노동자, 이주민) 차별반대, 한미FTA반대, 이주민 HIV/AIDS 감염인의 인권보장” 등이 적혀 있었다.


한국정부는 “환영”이라는 말을 감히 말할 자격이 없었다. 오히려 참가자들을 모욕하는 일이었다. 적어도 특별한 이유 없이 비자발급이 취소되거나 공항에서 모욕적인 발언을 들어야 했던 트랜스젠더, 성노동자들에게 사과를 하고 시작했어야 했다. 해외 활동가들도 자신들이 준비한 피켓을 함께 펼치며 지지를 보내줬다. 5분정도 발언은 중단되었고 급기야 진수희 전 장관은 한국 참가단들이 퇴장한 뒤에야 비로소 발언을 시작할 수 있었다. (피지 대통령 보호라는 명목으로) 보안요원들의 무리한 진압은 눈살을 찌푸리게 했고 이 때문에 몇 명의 활동가들이 다쳤다. 하지만 용기있는 한국 참가단들의 행동은 참가자들로부터 많은 박수를 받았다. 아마 당일 예정되어 있던 JYJ의 공연 다음으로 박수를 많이 받았을 것이다. 뒤 늦게 들은 말이지만 아시아 태평양 에이즈 대회 역사상 발언을 5분 이상 중단시킨 대회가 처음이라고 했다. HIV/AIDS 감염인들도 함께 동참했고 이들은 NGO참가단과 함께 퇴장했는데 감사하다는 말을 계속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성공적인 개막식 행동을 마쳤지만 만족하고 있을 수 없었다. 바로 다음 날 감염인들이 건강하게 살 권리를 망칠 수도 있는 한미FTA, 인도EU FTA 반대행진을 준비해야 했기 때문이다. 27일 행동을 기획하기 위한 회의를 개최했다. 인도, 프랑스, 태국, 호주, 일본에서 온 10여명의 해외활동가들과 국내활동가들이 참여했다. 우리가 기획한 행진은 벡스코 밖을 나가지 않고 심포지엄과 다양한 포럼이 열리는 행사장 1,2,3층 로비를 행진하는 것이었다. 이 행진은 국제 에이즈 대회에서는 늘 있어왔던 퍼포먼스였고, 조직위원회 역시 그렇게 생각했다. 오히려 우리는 이러한 행동을 퍼포먼스쯤으로 치부했던 조직위원회의 태도에 문제의식을 갖고 있을 정도였다. 특별한 문제가 발생할 것이라는 생각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다만 심포지엄이 열릴 장소 앞에서는 확성기 소리를 줄이거나 조용히 말할 필요가 있었다.


27일 2시 : “FTA는 곧 생명포기각서와 같습니다”


행진이 시작되었다. 우리는 Life not for Sale (생명은 상품이 아니다!) Hands off our medicine (우리들의 약에서 손때!) Stop FTA (FTA를 멈춰라!)와 같은 공통의 구호가 있었지만 100여명의 행진 참여자들은 자유롭게 자신들이 외치고 싶은 구호를 외쳤다. 인상 깊었던 장면은 한국 참가단보다 인도의 여성들이 행진대열의 맨 앞에 서서 대열을 주도했다는 것이고 우리는 안전하게 행진이 마칠 수 있도록 안내자 역할을 했다. 로비를 지나는 많은 사람들은 행진에 함께 하거나 박수로 화답해주었다. 3층에서 벡스코 시큐리티와의 작은 갈등이 있었지만 큰 문제는 아니었다. 약 40분 정도 되는 짧은 행진을 마치고 APV 행사장으로 들어왔다. 마지막 발언을 준비하고 있을 무렵 APV 입구 쪽에서 소동이 일어났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APV 입구는 벡스코 앞 광장이 아니라 행사가 열리는 로비, 그것도 행사장 안이었다.


27일 3시 : “일어나서는 안 될 일이 있어났습니다”

강제연행에 항의하며 경찰차를 막고 있는 ICAAP 참가들

 

일부는 소동이 일어난 곳에 가서 중재하려고 했지만 결국 집회참석자들이 모두 그곳으로 이동했다. 이름과 신분을 밝히지 않은 경찰 한 사람이 조직위원회 실무팀과 고성이 오가는 다툼이 있었고 그 이유는 시위참석자들을 채증하려는 시도에 있었다는 것이었다. 행진 참여자들은 경찰이 행사장 안에 있었다는 말도 안 되는 상황에 강력히 항의했다. 몇 분이 지났을까. 신원을 알 수 없는 사람들이 행사장 안으로 들어오더니 정당하고 적법한 항의를 하는 한국 참가자들을 대상으로 연행을 시도했다. 결국 인권변호사 한명이 연행이 됐다. 하지만 경찰이송이 쉽지 않았다. 걷잡을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분노한 수십 명의 사람들은 경찰차를 에워싸고 한국경찰을 규탄하기 시작했다. 온 몸으로 경찰차 앞에 눕고 항의했다. 사실 해외에서 참여하기 위해 온 사람들은 자칫 자국으로 돌아가는 과정에서 문제가 생길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지원 나온 전경들에 의해 강제로 끌려나오기 전까지 해외활동가들은 30분이 넘는 시간동안 온 몸으로 저항했다. 경찰이 행사장에 들어와 참가자들을 연행하려고 시도한 현실을 납득하지 못했고 이는 지금도 이해가 가지 않는다. 연행된 변호사는 참고인 조서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경찰로부터 왜 오셨나는 어처구니없는 말만 듣고 귀가조치를 받았다. 행사장에서는 공개적인 긴급회의가 열렸고 행사주최인 아시아 태평양 에이즈 학회, 제10차 아시아 태평양 에이즈 대회 조직위원회, UNAIDS는 활동가들로부터 강력한 항의를 받았다. 이들은 대회가 마칠 때까지 오전 전체포럼이 열리는 자리에서 공개사과를 계속할 수밖에 없었다.


나와 조직위원회 실무팀 한 명은 연행과정에서 타박상을 입어 병원으로 이송됐다. 사태파악을 전혀 하지 못한 해운대 경찰서 소속의 형사들은 병원까지 쫓아와 공무집행방해를 들먹이며 협박했다. 사건의 발단이 되었다고 판단한 실무팀 관계자는 피고인 조서를 받고 밤 9시가 넘어서야 귀가조치를 받았다.


경찰폭력으로 얼룩진 제10차 아시아태평양 에이즈 대회


한국의 에이즈 인권활동가들은 경찰폭력이 일어난 이후 폐막식이 예정되어 있던 30일 전 까지 끼니도 제대로 챙겨 먹지 못하고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한 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동분서주 바빴다. 대회가 끝난 후의 안전이 보장되지 못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바삐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ICAAP 조직위원회의 허울 좋은 사과와 미온적인 태도는 마지막 날까지 규탄의 대상이 되었다. 하지만 이 사건은 이미 예고된 일이었다. 피지 대통령 방한 때문에 보안이 강화되었다고 하지만, 이 사건의 빌미를 제공한 경찰은 ICAAP 조직위원회로부터 어떤 설명도 듣지 못했다고 한다. 조직위원회는 미리 고지되지 않은 참가단의 행진을 문제 삼았지만 그들은 이미 이런 행동이 있을 거라는 사실을 사전에 알고 있었고 이런 행동 역시 ICAAP 활동의 주요한 일부라고 인식했다. 그랬기 때문에 행진에 참여한 조직위원회 실무팀에서는 참석자 보호를 위해 채증하는 경찰에 강력히 항의했던 것이다. 만약 벡스코에 상주하고 있던 경찰에게 최소의 정보라도 줬더라면 불미스러운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경찰의 대응도 문제였다. 채증을 의심받던 경찰은 단순히 FTA를 반대한다는 구호를 외치는 것만으로도 정치적인 집회라고 자의적 판단을 내렸고 그래서 핸드폰으로 사진을 찍으려했다는 것이다.


시작부터 불협화음으로 삐걱되었던 제10차 아시아태평양 에이즈대회는 오점만 남긴 채 마무리되었다. 짧지만 긴 여운을 남긴 대회였다. 쉽게 경험해보지 못한 경찰폭력 문제를 외면하지 않고 적극 대응해 나갔던 한국 활동가들의 노력은 해외활동가들이 감탄한 것처럼 대단했다. 또 모든 상황을 목격하고 함께 경험했던 해외활동가들이 한국 참가단들의 안전과 보호를 위해 마지막까지 함께했다는 것도 의미로 남는다. 한국에서 어떤 것이 가장 기억이 남느냐는 질문에 “단지 벡스코”라고 답한 그들이었다. 해외활동가들은 이번 사태에 대해 묵묵부답으로 일관하고 어떤 해결책도 내 놓지 않은 UNAIDS에 요구안을 보내고 면담을 진행하고 있다. 국제 활동의 다양한 경험 없이는 불가능한 행동들이었는데 그들의 조직력과 현장대응력은 충분히 배울 만 했다. 예상치 못한 경찰폭력 문제로 28일부터 계획했던 많은 활동들을 하지 못하거나 대충 때우는듯하게 마무리되었다. 동성애자인권연대에서 준비한 부스는 거의 운영되지 못했다. 긴 시간 먼 걸음을 투자해 부산 벡스코까지 함께 와준 회원들과 소주 한잔 하지 못한 것이 여태껏 마음이 걸린다. 아쉬움. 앞으로의 기대가 얽혀져 있는 벡스코에서의 경험은 우리에게 많은 가능성을 제시해주었다.


다만 우리가 기억해야 할 점은 경찰폭력이 있던 27일 조차도 벡스코 밖 한국 사회는 조용하기만 했다는 것이다. 그것이 HIV/AIDS 감염인 인권의 현실이다.


정욜_ 동성애자인권연대 활동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