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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소수자와 노동

응답하라, 1997! - 2012년의 우리가 여전히 노동자 투쟁에 응답하는 이유

by 행성인 2012. 11. 6.


곽이경(동성애자인권연대)


비정규직이 된다는 것. 놀랍게도 내가 처음 대학에 들어가던 IMF 직후 만해도 비정규직이라는 말은 아직 생소했다. 오히려 그때 나는 명예퇴직이나 정리해고 때문에 일터에서 내쫓기는 아버지들이 이 경제위기의 최대 희생자라는 생각을 했었다. 그 이후 15년, 나는 고등학교 졸업과 함께 지금까지 줄곧 신자유주의와 노동유연화가 빚어낸 대량해고와 비정규직화의 시대에 살고 있다. 옛날 이야기를 꺼낸 데에는 이유가 있다. 정리해고제나 변형근로가 본격적으로 도입되는 것을 막고자 벌어진 96~97년의 노동법․안기부법 개악 저지 총파업 참여가 동인련의 시작이라는 것은 현재 동인련의 실천을 보더라도 의미 있는 방향을 가리킨다. 동인련은 왜 노동자 투쟁에 나갔을까?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이것이 왜 동인련의 중요한 실천 중 하나일까?


1997년부터 2012년까지, 동인련의 실천과 노동자투쟁


1997년 노동자 총파업에 무지개 깃발을 들고 나갔던 활동가들은 당시 대부분 20대 초중반의 대학생들이었다. 당시 배포한 유인물을 보거나 경험을 들어보면 집회에 나가는 몇 가지 이유들이 있었다. 물론 성소수자로서 모습을 드러내고 연대하는 것이 중요했다. 바깥 세상에 나를 드러내는 것은 얼마나 즐거운 일인가? 동성애라고 하면 온갖 편견으로 바라보는 노동자들에게 동성애자들이 자신들의 싸움에 연대하러 왔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변화를 일으키는가? 실제로 당시 몇몇 노동조합 활동가들이 동성애자들을 초청하여 간담회를 열었다고도 한다. 모든 것이 우리가 그 자리에 나서지 않는다면 바뀌지 않는 것들이다.

그런데 왜 총파업 참여에 그렇게 열심이었던 것일까? 나를 드러낼 수 있는 다른 자리도 많은데 말이다. 당연하게도 성소수자들은 ‘정리해고’를 막으려고 나갔다. 차별 받는 사람들이 먼저 경제위기의 희생양이 될 것이라고 주장했고 그것은 성소수자들에게 자기 문제였다. 당시 실제로 부부가 근무하는 직장에서는 여성들이 먼저 잘려나갔고 많은 회사들은 가장이라도 돈을 벌어야 하니 여성들은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했다. 한 회사의 인사책임자는 ‘동성애? 바람만 피워도 문제인데 동성애도 해고사유로 충분하다’는 이야기도 했다. 그때는 내보낼 이유만 찾으면 내보냈다. 지금도 성소수자들은 직장에서 커밍아웃 하지 못하는데, 그건 동성애자를 해고하는 규정이 있어서가 아니라, 지독한 편견과 차별 때문에 회사를 결국 나가야한다는 것을 스스로 잘 알기 때문이다.

그럼 아빠들은 살아남았을까? 이미 그 시기를 살아본 우리들은 잘 아는 이야기이지만, 신자유주의와 노동유연화는 모든 사람들의 노동권을 완전히 물렁하게 만들어 버렸다. 그 이후 여성 비정규직은 폭증했고 임금 차별은 더 심해졌다. 남성들도 그 이전보다 더 많이 비정규직이 되었고 일자리의 질은 함께 떨어졌다. 이제는 ‘정규직’ 일자리였던 쌍용자동차, 한진중공업 등 대기업 노동자들이 거리로 내몰린다. 이들은 기업들의 해외매각 놀음이나 동남아시아에서 다른 나라 노동자들의 고혈을 빨아먹겠다고 한국 노동자들을 내다버리는 신자유주의 때문에 일터를 빼앗기고 있다. 이제 새로 일자리를 얻는 다수는 비정규직으로 시작해서 비정규직 일자리를 계속 옮겨 다니며 산다.



노동자들의 집회에 함께한 동성애자인권연대 깃발


노동자가 세상을 바꾼다고?


동인련이 거쳐온 지난 15년은 더 많은 사람들이 ‘자본주의’가 정말 어쩔 수 없는 것인지 되묻기 시작한 시기다. 물론 구소련이 무너진 1990년대 초중반 자본주의 ‘다음’은 없을 것이라는 회의도 컸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1999년 시애틀로부터 시작된 ‘반세계화 운동’부터 가장 최근 뉴욕 월가에서 시작된 ‘점령하라(오큐파이)’ 운동까지, 자본주의가 매긴 우선순위를 더 이상 견딜 수 없는 사람들이 자본주의 이후의 대안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나는 계급으로 나뉜 세계는 여전히 견고하며 자본주의 사회의 세력관계와 우선순위를 바꾸려면 노동계급의 힘이 중요하다고 여긴다. 당연한 것이지만 이 세상은 우리가 일하기 때문에 돌아가고 있는 거니까. 96~97년 민주노총 총파업 대열에 함께했던 성소수자들에게 그 힘은 더욱 실질적으로 느껴졌을 것이다. 이것은 동인련이 처음 생기던 때에 노동자 투쟁에 참여하는 중요한 이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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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노동계급이 세상을 바꾼다고 해서 성소수자에게 좋을 것이 뭐가 있겠는가? 노동자들 사이에는 동성애자가 있기라도 한가? 이런 질문들에 답할 수 없다면 계급이 왜 중요한지는 잘 설득되지 않을 것이다. 지난 기간 동안 성소수자와 노동계급은 멀리 떨어진 것처럼 보이는 것이 당연했다. 세상을 바꿀 주역들로 이름을 올리는 노동자들은 하나같이 남성, 비장애인, 이성애자, 한국인, 정규직, 조직 노동자인 경우가 대부분이었으니까. 내 주변에는 하나같이 노동을 해서 먹고사는 성소수자들 뿐인데, 이 사람들은 ‘노동계급’의 일부라는 생각을 스스로도 안하고 ‘노동운동’하는 분들도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노동운동이 실천에 있어서 성소수자 노동자들의 문제를 반영하지 않는다면 성소수자들은 노동계급 속에 자신이 속한다고 여기기 어려울 것이다.

내가 동인련에서 노동권을 가지고 활동해보자고 생각한 것은 위와 같은 고민들 때문이었다. 노동계급은 억압받는 사람들의 호민관이 되어야한다고들 이야기하는데, 왜 내가 현실에서 만나는 대부분의 노동자들은 편견에 절어 있고, “성소수자 노동자는 현장에서 만나본 적도 없는데”라고만 이야기할까? 노동자들이 만드는 세상이 성소수자들에게도 좋으려면 그 과정에서 성소수자가 대표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단지 우리가 더 많이 드러내기 위해 여기 있자고 하는 것은 아니다. 노동계급에게 세상을 바꿀 힘이 있다면 성소수자도 스스로 세상을 바꾸는 힘의 일부가 되자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노동권팀은 오히려 동인련이 계급에 대해 추상적으로 생각하던 것을 구체적인 실천으로 옮기고 노동자들의 변화를 이끌기 위한 적극적인 개입을 위해 만들어졌다고 볼 수 있다.


“성소수자는 노동자다”를 위한 세 가지 실천


아래는 성소수자 노동권팀이 해왔던 실천들과 앞으로 필요하다고 여기는 부분을 세 가지 정도로 나누어 정리해본 것이다.


첫째, 운동에 대한 ‘공감과 분노’를 모아 ‘드러내기’를 이끄는 것이다. 우리가 집회에 무지개 깃발을 들고 나가는 모든 실천은 일단 드러내기를 위한 것들이다. 물론 우리는 크고 작은 노동자집회 뿐만 아니라 강정마을에도 가고 철거민투쟁, ‘점령하라-오큐파이 서울’, 한미FTA에 반대하는 집회 등에도 열심히 나가는데 그것은 우리가 이 체제가 만들어낸 전쟁과 심각한 불평등에도 반대하기 때문이다. 나는 때때로 성소수자가 다른 쟁점에 정성을 쏟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2003년에 열심이었던 전쟁에 반대하는 동성애자들의 공동행동이 그랬다. 이라크 전쟁에 반대하기 위해 매번 수십 명의 성소수자들이 함께 모여 거리로 나갔고, 나는 전쟁에 분노하는 성소수자들이 이렇게나 많다는 것을 알고는 정말 놀랐다. 이들이 집회에 나올 수 있도록 연락을 하고 모금을 하는 과정에서 ‘드러내기’도 가능해졌다. 노동권팀이 지난 겨울과 봄 동안 ‘연대한바퀴’를 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전쟁 반대를 외치는 무지개 걸개. 동성애자/성소수자들은 한국 반전 운동의 중요한 일부였다. 사진출처:참세상



둘째, ‘연대를 통한 변화’이다. 연대는 동일한 입장을 가지고 함께 하는 것인데, 우리는 동일한 입장을 가지고 함께 투쟁하는 속에서 우리 안의 차이를 발견할 수 있기를 바란다. 때때로 편견 섞인 충돌이 빚어지기도 한다. 노동자집회에서 어떤 노동자들은 동성애자들에게 욕을 하기도 하고, 강정마을 주민 중 일부는 함께 싸우는 강정지킴이 중 누군가가 레즈비언인 것을 문제 삼기도 한다. 똑같은 이유로 집회에 나왔지만 학생인권조례에 성적지향 차별금지를 지켜달라는 요청에는 서명을 거부하는 시민들도 있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어느 한 가지에 대해 이미 공통의 입장을 가지고 이 자리에 나왔고, 그것은 변화를 위한 좋은 전제가 된다. 사람들의 인식이 바뀌지 않는다면 우리는 언제나 차별과 편견 속에 살게 되겠지만 다행히도 사람들은 변한다. 입장의 동일함을 가지고 싸울 때 더 쉽게 변하는 것은 물론이다.


셋째, 함께 싸우는 이유를 찾는 것, 즉, 공통점을 찾는 것이다. 다행히도 요즘 공통분모는 더욱 커지는 것 같다. 어떤 부분에서는 우리가 왜 희망버스를 타야하고, 쌍용차 노동자들의 죽음의 행렬을 막아야하냐는 등의 이야기를 할 필요도 없이, 선뜻 버스에 오르고 대한문으로 향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너 나 할 것 없이 불안정한 고용과 보장되지 않은 미래, 끝이 보이지 않는 절망감 등이 우리의 공통분모다. 그런데 성소수자들이 겪는 차별에 대해서는 성적 지향을 떠나 공통분모를 찾기 어려운 걸까? 나는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노동권팀은 여러 명의 성소수자 노동자들을 인터뷰하고 이들의 이야기를 기록했다. 이런 이야기를 읽고 공감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기를 바랬고, 자신이 차별당한 경험에 비추어 성소수자들이 겪는 차별에 공감하는 사람들도 만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나는 여기서 조금 더 나아갔으면 하는 생각에서 ‘정상가족 이데올로기’와 ‘가족제도’에 도전하는 것이 노동계급의 앞으로 과제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제안해본다.


희망버스 운동에 함께한 성소수자들이 만든 퀴어버스 걸개



공통점 찾기 - 정상가족 이데올로기가 노동자들에게 요구하는 것


그동안 성소수자 노동자를 만나며 공통으로 겪는 어려움을 들어보았는데, 거의 모든 차별은 ‘정상가족’에서 배제될 수 밖에 없는 현실과 맞닿아 있었다. 특히 20대 초중반 성소수자들은 “미래를 어떻게 살아야 하는건지, 성소수자 역할 모델이 없다”고 한다. 잘 사는 성소수자들을 보여 달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이성애 중심적인 사회에서 성소수자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삶의 방식과 생애주기 등 모든 것이 이성애자의 삶과 다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수년의 교육기간과 취업 시기를 거친 후에는 결혼을 하고 출산을 하며 육아와 자녀 교육을 책임지고 퇴직 후 노후를 준비하는 것이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삶이라면, 적어도 성소수자들은 결혼과 출산부터 노후까지를 완전히 개척해야 하는 상황에 놓인 것이다. 그런데 우리에게 어떤 다른 삶이 가능한지 한 번도 제시된 적이 없었다. 이 불공평한 상황에서 가장 걱정되는 바는 미래에 대한 불안과 외롭고 가난한 노후에 대한 두려움이다. 취업 후 가족을 만들지 못하는 삶은 성소수자에게는 선택이 아니라 우리가 처한 조건이다.

우리는 왜 외롭고 가난할 것이라고 생각할까? 그건 ‘가족’에게 달렸다는 것이 명백하다. 지금의 청년세대를 일컬어 ‘삼포세대’라고 한다. 연애도, 결혼도, 출산도 포기한 세대. 삼포세대는 경제위기의 시대에 ‘안정된 미래’를 꿈꿀 수 없는 20~30대의 불안과 좌절을 반영하지만, 성소수자들의 삶을 설명해주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둘의 공통점은 크다. 첫째, 경제 위기 속에서 가족 밖에 놓이는 상황, 미래에 대한 불안을 성소수자 청년이나 이성애자 청년이나 공히 공유하고 있다는 점이다. 둘째, 보수적인 가족주의가 강력해지고 국가와 기업의 책임을 개별 노동자와 가족에게 떠넘기면서 사회보장을 깎아내는 지금 상황이 우리 모두의 삶을 좌절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청년 뿐만 아니라 다른 세대에도 마찬가지인, 날로 불평등을 심화시키는 자본주의 사회의 보편적인 문제다.


계급적 관점을 가지고 가족제도에 도전하기


가족주의가 강화된다는 것은 이성애중심, 동성애혐오적인 분위기가 강화된다는 뜻이다. 우익들이 여성의 낙태권과 동성애자들을 주로 공격하면서 하는 이야기를 예로 들어보자. 출산율이 떨어져서 다음 세대에 일할 사람들이 점점 부족해지며 소수의 젊은 세대가 많은 노인들을 부양해야할 것이라고 협박하는 것이다. 이처럼 결혼하지 않고 아이를 낳지 않는 사람들을 문제 삼을 때, 왜 노동자들은 그것이 자신을 공격하는 것이라고 생각지 않는가? 자본주의 사회가 지탱되는 방식의 핵심이 바로 결혼-출산-육아-노후 모든 것을 가족 내에서 해결하도록 만드는데 있기 때문이라는 것은 왜 강조되지 않았을까? 나라가 어려우니 여성들이 남편보다 먼저 일터를 떠나 ‘가정’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성차별 관념을 왜 많은 노동자들이 받아들였던 걸까?

물론 가족을 꾸리고 사는 많은 노동자들에게 가족 제도에 도전하자고 하는 것은 허황된 주장으로 들릴지도 모른다. 심지어 가족을 꾸리고 싶어하지만 뜻대로 할 수 없는 성소수자들에게도 마찬가지의 주장으로 들릴 것이다. 만약 남성 구직자 입장에서 보면 여성들을 잘 뽑지 않으려는 상황이 자신에게 도움 된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가족을 꾸린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왜 결혼도 하지 않은 사람에게 자기와 동등한 사회보장을 해줘야 하는지 이해가 안갈 것이다. 이주노동자의 자녀나 배우자가 한국에 들어오는 것은 세금을 좀 먹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한국인 노동자들도 많을 것이다. 장애인 부양의무제를 폐지하자는 주장에 대해서도 여전히 가족이 챙겨야 하는 것이 아니냐는 반론을 펼지도 모른다. 개별 노동자들의 입장에서만 보면 도무지 공통점이라고는 찾을 수 없을 정도로 서로가 다른 이해관계에 놓인 것처럼 보인다.

나는 이것이 이성애 중심, 정상가족 중심의 가족제도가 만들어내는 ‘차별’이라고 생각한다. 가족의 존재와는 상관없이 누구나 필요한 만큼의 사회 보장을 누리기 위해서는 우리 사회의 우선순위가 바뀌어야할 것이다. 노동계급이 기업이 부당하게 챙긴 이익들을 거두어들여 사회의 필요한 곳에 공정하게 분배하려고 마음 먹는다면 분명히 장애인, 이주민, 성소수자, 여성들이 평등하게 대우받을 수 있도록 해야할 것이다. 이들이 노동계급의 일부이기도 하지만, 혹여 그렇지 않더라도 노동계급의 일이 되어야 한다. 계급적 관점은 협소하게 ‘눈에 보이는 노동자의 일’만 중요하다고 여기는 관점이 아니기 때문에 자본주의 사회가 부당하게 갈취하고 왜곡한 것들을 원래대로 돌려놓는 모든 실천을 포함한다. 가족제도에서 차별과 고정관념을 걷어내는 것, 필요한 사람들이 협동과 평등에 기초한 가족을 꾸리는 것, 가족의 문제와는 상관없이 필요한 권리들을 누리는 것은 지금부터라도 노동운동이 자신의 과제로 여겨야할 것들이다. 예를 들어 1인 가구에 대한 지원 확대, 장애인 부양의무제 폐지, 동성결혼과 파트너십 인정, 임신중지(낙태)에 대한 여성의 권리 보장 등이 그에 해당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