웅(동성애자인권연대 HIV/AIDS 인권팀)
“너희 문제도 아니면서 이 운동을 왜 하니?”
감염인이 비감염 활동가들에게 던지는 질문은, 같은 물음을 던지는 다른 비감염인들에게 답하는 것만큼이나 어렵다. 나는 두 질문들 사이에서 ‘줄 탄다’고 말하며 비감염인으로서 HIV에이즈 운동의 어려움을 자조하곤 한다.
아니나 다를까, 지난 토론회 발제가 끝나고 곧바로 “비감염인이세요?” 라는 다소 노골적인 질문을 받았다. 한두 번 듣는 질문도 아닌지라 당황의 정도는 크지 않았지만, 이렇다 할 답을 구해놓은 것도 아니었다. 바로 마이크를 붙잡고 대답을 준비하지만 답은 느리게 나올 수밖에 없었고, 결국 난 준비된 것처럼 ‘형식적인’ 언급으로 수습했다.
하지만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묻는다. “감염도 안 된 당신들이 우리 입장을 어떻게 알아?” 라는 배타적인 문장 뒤에는 어떤 심정과 경험이 감춰져 있을까. 당신의 비호의적인 입장에 대해 “처지를 생각한다면 당신의 그 부정적 질문쯤 이해할 수 있어.” 라고 자조하는 건 온당한 반응일까? 감염인으로써 갖는 당신의 정서와 경험을 아픔, 고통, 좌절, 분노, 분리라는 단어 안에 격리시켜 이해하는 건 일종의 편의적인 위선과 기만이 아닐까? 꼬리를 무는 물음표는 기어이 나의 심사를 뒤틀리게 만들며 투정에 가까운 반응을 이끌어낸다. 난 언제까지 당신의 삶을 이해해야만 하는 역할에 머물러야 하나? 비감염인의 에이즈 운동은 단순히 ‘서포트’에 그쳐야만 하는 건가?
질문자의 공격적인 발언에 이어 바로 다른 감염인 활동가의 대꾸가 가볍게 흘러들었다. “그동안 우리(감염인)가 못한 걸 반성해야지.”
자성의 의도가 다분했던 그의 언급은 호의적이었지만 문장에 숨어있는 칼날은 절대 비켜가지 않는다. 어쨌든 그에게도 비감염 활동가는 일정 경계에 다다르면 ‘우리’가 아닌 ‘너희들’로 정리되고, 질병에 관한한 ‘제한적인 당사자’에 머물 것이기 때문이다. 한편으로는 그의 대꾸에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나는 계속 자문해야 했다. - 정말로 비감염 활동가는 감염인이 직접 나설 수 없는 상황에서 운동을 ‘대신’ 하는 역할에 지나지 않을까? 나는 비감염인이기 때문에 당사자 운동에 개입할 수 없는 걸까? 질문은 목젖까지 올라왔지만, 막상 터뜨릴 수는 없었다.
HIV에이즈에 대해 갖는 두려움이 질병/당사자에 대한 배제와 분리로 수렴되고, 더불어 감염인을 사회의 수동적이고 비가시적인 구성원으로 만드는 환경은 분명 HIV에이즈 문제가 비감염인에게도 해당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비감염인은 감염가능성에 대해 항상 인식하고 예방을 게을리 해선 안 되지만, 동시에 질병당사자들을 둘러싼 환경과 관계를 묵인하는 것은 방관에 지나지 않는다. 하물며 에이즈의 주범으로 지목되는 동시에 다른 집단보다 감염(인)비율이 높은 동성(연)애자, 그리고 트랜스젠더는 말할 것도 없다. 우리 주변에 말하지 못하고 있는 감염인들은 친구, 형(언니)·동생, 파트너의 모습으로 보다 가까이 있을지 모르지만, 그들은 질병사실이 알려지게 되면 절교를 강요받거나 소문과 가십의 대상이 되면서 잊혀지곤 한다. 적어도 이것이 지금 에이즈가 단순한 질병으로 이해될 수 없는 이유이며, 동시에 내가 비감염인 동성애자로서 에이즈 이슈에 응하는 당위이다.
십 년 전 나누리+가 만들어진 당시 감염인을 만난다는 생각조차 막연했고 조심스러웠다는 회고를 듣다보면, 문제의식을 갖고 활동 중인 여러 감염인단체 또는 감염인들과의 관계를 생각하고 있는 현재의 지점은 느릴지라도 장족의 발전을 해왔다고 평가할 수 있다. 하지만 여전히 비감염인으로서 에이즈 운동을 한다는 것은 벽에 부딪힐 수밖에 없는 상황을 내포한다. 감염인에 대한 배제와 분리는 거꾸로 비감염인에 대한 감염인 자신들의 경계와 분리로 대응되면서 비감염 활동가들에게 “이건 당신들의 문제가 아니오.” 라는 배타적인 답으로, 또는 “대신 활동해줘서 감사합니다.” 라는 거리를 둔 감사로 반복된다. 그들의 환대에 비감염인 활동가들은 송구해하지만 한편으로는 씁쓸한 웃음을 짓는다. 비감염인과 감염인으로 나뉘는 분리 속에서 비감염인 활동가는 언제고 에이즈운동 속에서 비당사자로 경계 지어지는 순간에 직면하게 되며, 그 순간 나의 문제는 결국 당신의 문제이고 나는 여기 제한적으로 가담하고 있을 뿐이라는 인식을 강요받게 된다. 왜 그런 배타성에 멈칫해야 하는 건지 활동가들은 고민을 놓지 못한다. 하지만 동시에 활동가들은 자신의 불만과 회의가 같은 활동을 하는 동료들과 당사자들에게 칼날이 되어 상처를 주거나 서로 적대하지 않도록 조심스러운 긴장의 고삐를 놓을 수도 없고, 놓아서도 안 된다.
에이즈 운동은 나의 문제로 각인되어 있지만, 현재로선 언제고 개입에 제한성을 느낄 수밖에 없다. 너와 나, 타자와 주체, 감염인과 비감염인으로 나뉘어 양자의 상호 관계가 온갖 사회적 위계 속에서 첨예해질 수밖에 없는 가운데, ‘연대’를 ‘서로의 어려움을 이해하고 지지하는 노력’ 정도의 단순추상적인 수준에 머물러 이해하는 것은 외려 책임방기에 가깝다. 나의 일방적인 이해와 지지는 그들에게 상처를 줄 수 있지만, 그들에게 조력자로 남는 것만이 나의 역할은 아닐뿐더러 그들을 조력할 만큼의 능력이 갖고 있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개입필요성과 동시에 한계의 딜레마에 봉착해 있는 지금으로선 단어를 섬세하게 다듬는 것, 더불어 귀를 여는 것과 그들과 말하는 것을 게을리하지 말 것을 스스로에게 주문한다, 일단은 이러한 방편들을 처세의 기술보다는 에이즈운동을 대하며 가져야할 태도로 받아들이고 있지만...
아무쪼록 어떻게 해결해야할지 모를 이 고민, 계속 가져가야만 할 것 같은 이 답답한 고민을 솔직한 심정으로 열어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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