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덟 번째 편지

Posted at 2013.09.05 23:44// Posted in 회원 이야기/재경의편지조작단

 

넌 옆에서 잠을 자고 있어. 나는 지금 술에 취해 있고, 네가 자는 모습을 보면서 다시 맥주 한잔을 마시고 있어. 난 네가 짐을 싸서 나가버렸을 거라고 생각하고, 혼자 남은 집에 돌아오기 싫어서 이렇게 밖에서 술에 취하지 못해 안간힘을 썼는데 말이야. 미안해, 지금 네 머리에 놓인 베개를 치우고, 내 팔을 베게 하고 싶지만, 술 냄새가 너무 많이 나서 네가 깨버릴거야. 게다가 잠투정이 심한 너는 아마 다시 화를 내버릴지도 몰라. 화를 내지 않는 지금의 너를, 조금 더 보고 싶어.

 

넌 사흘째 나에게 말을 하지 않고 있어. 처음에는 네가 짐을 싸서 나가버리는 건 아닌가 걱정을 했다가, 나중에는 답답해서 내가 도망가버리거나 큰 실수를 저지를까봐 걱정했어. 혼자 안절부절하다가 밖으로 나가버린거였어.


미안해, 난 말이지, 너와 함께 한 모든 게 처음이었어. 함께 아침을 먹는 것도, 새벽에 잠결에 누군가의 숨소리를 들으며 다시 잠이 드는 것도. 이렇게 말하면 넌 웃겠지. 하지만 진짜야. 이상한 버릇 때문이야. 좋아하는 사람에게 좋아한다고 말하지 못하는, 그리고 그 말 대신, 헤어지자고 말해버리는. 그 말을 했을 때 떠나지 않은 건 네가 처음이었거든. 대부분은 나를 떠났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었어. 슬프고, 외로웠어.


한 소설가가 남해의 작은 섬을 둘러보고 육지로 돌아오는 길이었대. 배에서 아주머니들이 갑판에 나와서 춤을 추고 있었다고 했지. 음악을 틀어놓고 말이야. 그때 한 아저씨가 춤을 추면서 아주머니들 사이로 들어왔는데, 아주머니들은 그 아저씨를 쫓아냈대. 한참후에 아저씨가 새우깡과 소주를 들고 왔다지. 그제야 아주머니들은 아저씨와 함께 춤을 추면서 놀았다고 해. 소설가는 사랑이라는 것은 어떤 것이길래, 아저씨에게 소주를 사오게 했을까, 라고 적어놨어. 그 소설의 내용은 하나도 생각나지 않는데, 딱 그 구절만은 기억이 남았어. 네가 우리집에 찾아와서 망설이고 있던 날, 난 그 소설가의 말을 생각했어. 사랑이 어떤것이길래, 지금 나에게 너의 눈을 보고 서 있게 하는 거였을까.


이상하다고 생각했어. 네가 처음 나의 눈에 들어오던 날, 그저 귀여운 아이라고만 생각했거든. 정말 그게 다였어. 그런데 갑자기 너는 우리집에 있었고, 같이 있고 싶다고 했어. 난 누구와 함께 있는 걸 좋아하지 않으니, 집으로 돌아가라는 말을 하던 날도 그랬어. 추운 날이었는데, 너는 집앞을 서성이고 있었어. 귀찮은 내색도 너에게는 상관없었어. 화를 내자 그제야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손에 든 봉지를 내밀었어.


딸기가, 들어있었어. 집으로 가려고 하는데, 너와 나의 집은 동쪽 끝에서 서쪽 끝인데, 퇴근하고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는데, 갑자기 나와 이게 먹고 싶어졌다고. 과일가게에서 비싼 값을 주고 사서, 지하철에서 봉지를 무릎위에 올려놓고, 나를 생각했다고 했어. 딸기향이 코에 확 풍겨왔어. 딸기가 든 봉지 대신 네 손을 잡았어. 손이 꽁꽁 얼어 있었어. 입김으로 네 손을 녹여주고 싶다고 생각했어. 네 손을 입가로 가져갔어. 넌 천천히 나에게 안겨왔었어. 딸기가 든 봉지가 부스럭거렸어. 네 품은 따뜻했어.


실은, 사람들을 밀어낸 이유가 있었어. 네 말처럼 나는 아직도 소녀인지도 모르지. 내가 몇 번이고 돌려보았던 미국 드라마에서 이런 일이 있어. 이성애자와 게이가 친구인데, 그 게이 아이는, 자신의 친구가 풀잎을 엮어서 만든 반지를 받고 남자친구와 결혼하고 집으로 돌아오자 불같이 화를 내. 나에게 결혼식이라는 것은 네가 하는 결혼식밖에 없다는 걸 알면서, 어떻게 함부로 결혼을 할 수가 있냐고 말이야. 그 드라마가 진지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난 울었어.


그게 내 스무살때야. 처음으로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었어. 그리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과는 절대 결혼식을 올리지도, 부모님께 소개시켜주지도 못할 거라는 걸 알았어. 축복받지 못한 삶, 이라는 것. 어쩌면 평생 혼자 살아야 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가득했어. 그래서 아무에게도 사랑한다고, 옆에 있어 달라고 말하지 못했어. 아니, 않았어.


샤워를 하고 나와서 젖은 머리를 털면서, 티브이를 보거나, 컴퓨터 앞에 쪼그리고 앉아서 인터넷을 하거나, 침대에 드러누워서 만화를 보며 키득대는 네 모습을 보면, 갑자기 궁금해져. 넌 언제까지 아름다울까? 언제까지 이렇게 눈이 부실까? 그 언제까지를 옆에서 지켜보고 싶어.


그게 한번도 말하지 못한 내 마음이야. 그러니까 왜 나에게 아무 말도 해주지 않느냐고, 너는 어떤 마음으로 나와 함께 잠이 드는 거냐고, 속상해 하지 마. 이제 도망가지 않을게. 네 옆에 있을게. 계속계속 옆에 있어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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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나령
    2013.09.06 09:29 신고 [Edit/Del] [Reply]
    이런편지 받아보고 싶당~^^
  2. 2013.09.06 09:49 신고 [Edit/Del] [Reply]
    딸기 감동이요ㅜㅡ!!
  3. 고랭
    2013.09.06 10:38 신고 [Edit/Del] [Reply]
    소설같다 ㅠ 아름답네~
  4. 기지
    2013.09.10 16:12 신고 [Edit/Del] [Reply]
    마음 한켠이 찡- 곁에 있어달라고 말할 수 있길. 외롭지 않길.
  5. 망치
    2013.09.10 16:50 신고 [Edit/Del] [Reply]
    오늘따라 이런 편지를 받고 싶네요. 하아. 날씨 탓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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