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인련 HIV/AIDS인권팀은 2014년 4월부터 매달 1회씩 세미나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그 첫 번째 주제는 ‘동성애와 에이즈 혐오’입니다. 세미나는 두 개의 발제와 논의들로 구성됩니다. 먼저 웅의 <혐오의 논리-동성애와 에이즈>는 동성애와 에이즈를 두루 엮는 혐오의 논리를 개관합니다. 그리고 재성의 <호모포비아 광고에서 발견되는 혐오 수사와 그 정점의 AIDS>는 근래 한국사회 에이즈와 동성애혐오발언과 캠페인을 바탕으로 분석을 시도합니다. 여기에 두 편의 발제문을 다듬어 기고합니다.


웅(동성애자인권연대 HIV/AIDS 인권팀)


질병의 은유

 

HIV/AIDS는 발견되기 직후부터 과장된 단어들로 수식되어왔다. 단적인 예가 ‘숙명론’적인 묘사이다. 이른바 의학이 역병을 지배할 수 있는 완성단계에 이르기 직전 에이즈가 창궐했다는 것이다. 또는 스톤월항쟁 이후 정치적 역량을 키워온 성소수자 커뮤니티에서 차별반대법안을 상정하기 직전 에이즈 위기가 도래했다는 서사도 드물지 않다. 한마디로 에이즈는 ‘근대의 정점’에 등장한 현대사회의 재앙이고 징벌로 인식되어왔다.

 

특정 질병에 대한 정보가 부재하고 연구가 더딜수록 질병은 그 자체의 독해 범주를 넘어서게 된다. 이 경우 질병은 오염이고 전염이자 비정상성을 표상하기 쉽다. 사회에 침략하는 적으로서 무찔러야하는 존재, 그것이 질병에 입혀지는 또 다른 이름이다. 이는 88년 에이즈와 은유에서 수잔 손탁이 지적한 바이기도 하다. 그의 논의는 사회를 신체에 비유하고 질병을 침투하는 적으로 비유함으로써 불필요한 의미들을 양산하고 질병에 대한 배타성을 강화한다는 것을 요지로 한다.

 

질병에 대한 공포와 두려움은 질병의 부정적인 의미를 만들고, 다시금 과잉된 의미는 공포와 두려움을 재생산한다. 이렇게 생성된 공포와 두려움은 사회의 관계를 단속하는 도구가 된다. 그중 하나의 전략이 발병가능성이 높은 집단을 ‘위험집단’(risk group)으로 부르고 사회로부터 분리시키는 것이다. HIV/AIDS의 경우 발병률이 높은 남성 동성애자의 항문성교와 다자적 성관계를 문란하고 병적인 것으로 지탄한다. 질병에 대한 배타적인 대처는 특정집단이 질병에 노출될 수밖에 없는 환경에 대한 사회구조적 접근 대신 집단의 특정 행위만을 부각시켜 질병이 그 집단에게만 해당되는 것이라는 인식을 심어준다. 나아가 질병당사자에게 자기관리에 실패한 자로 끌어내리고 질병을 그에게 주어진 벌처럼 질병에 대한 책임을 전가한다. 발병률이 높은 집단들은 질병의 표상이 되어 대중의 공포와 두려움의 표적이 되며, 질병과 집단에 대한 편견과 혐오가 배가되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에이즈와 동성애 Ⅰ

 

손탁의 에세이에서 에이즈와 동성애의 연관성은 간략하게 드러날 뿐이다. 하지만 알다시피 둘 사이의 협착은 에이즈의 등장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고질적이다. 미국의 경우, 에이즈는 발견 초기 ‘동성애자 암’, ‘동성애자 역병’으로 불렸다. 사람의 몸에서 몸으로 전파되는 바이러스가 수면에 오르고, 특히 게이들의 항문성교가 주된 감염로로 알려짐에 따라 에이즈는 동성애자의 성교에 직결되었다. 주된 감염경로가 성교라는 점은 도덕적 규범을 들이댈 수 있는 공격의 동기를 제공한다. 동성결혼·결합을 비롯한 사회인정제도들이 부재하는 상황에서 동성애는 사람들에게 문란한 성문화로 일컬어질 수밖에 없고, 동성애자들의 성(性)문화가 공격타깃이 되었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에이즈의 등장은 동성애를 공격할 수 있는 최적의 수사였다. 동성애를 전염과 오염의 필터로 여과시키기에 에이즈는 맞춤형 질병이었던 셈이다. ‘문란한’ 동성애자들은 바이러스를 옮기는 존재이고 바이러스 그 자체로 인식되어졌다. 바이러스가 사회에 잠복하지만 언제고 사회에 전파된다는 식의 활유법적인 수사는 문란한 성을 전파하는 암적인 존재로 동성애자를 설명하는 것과 쌍을 이룬다.

 

물론 바이러스의 은유는 정반대의 의미로 전유되기도 한다. 가령 퀴어 이론의 주장들 중에서는 이성애규범을 해체하고 동시에 배제 없는 열린 규칙, 다양한 관계가능성을 직조해나간다는 점에서 바이러스를 ‘파괴적인 생산자’로 재해석하고 주체화해온 시도들도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파괴적인 생산자의 위치를 점하기 위해서는 사회로부터 편견 짙은 위험과 오염의 누명을 감수해야만 한다. 특히 여기에 질병이 개입할 경우 증식하는 바이러스에 대한 생산적 의미부여는 무시되기 쉽다. 더구나 에이즈와 동성애처럼 혐오의 은유가 이중 삼중으로 결부될 때 둘에 대한 혐오는 배가된다. 사회인정과 지지기반이 부재하는 가운데 당사자들의 위축과 상실은 불 보듯 뻔하며, 그런 가운데 정치적 가능성을 모색하기 위해서는 크나큰 고통을 감수해야만 한다.

 

외부의 눈총과 배제 속에서 자기단속과 검열을 높이게 된 것은 동성애자 자신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특히 커뮤니티 내부에 압력이 되었던 주된 요인은 질병에 의한 눈덩이 같은 사망자수 만큼, 혹은 그보다 질병을 도구삼아 커뮤니티에 자행된 공격들이었다. 커뮤니티 내부에서는 에이즈를 막기 위해 일대일 섹스파트너를 가져야한다거나 금욕적인 생활을 해야 한다는 자성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하지만 이러한 요구들은 사실 동성애를 대하는 보수진영의 주장이기도 했다. (비록 이들이 ‘에이즈는 동성애자들에 대한 복수/형벌’이라는 강경한 공격에 비해 온건할지라도 말이다.) 질병을 사회검열과 단속의 수단으로 삼는 것은 보수기득권이 대중들에게 취하는 기본적인 전략이기도 하다.

 

질병이 가져온 충격과 더불어 안팎의 공격과 압력에 대항하여 커뮤니티는 정책에 대한 요구 뿐 아니라 질병에 대한 인식변화의 노력을 수반해야 했다. 동시에 커뮤니티 내부에서 당사자의 목소리를 높이고 이에 대한 지지기반을 조성하는 과제도 수행해야 했다. 미국의 경우 게이 커뮤니티는 에이즈환자에 대한 돌봄 및 의료서비스가 가능한 자조모임을 구축하고 예방과 의약품연구를 촉구하는 목소리를 조직했다. 이들은 HIV/AIDS를 자신의 문제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동료들이 질병으로 쓰러지고, 에이즈공포가 동성애혐오로 이어지는 사회분위기 속에서 이들은 기민하게 활동을 조직하고 질병과 질병당사자에 부정적인 사회에 대처했다. 6,70년대 민권운동을 성장시켰던 역량을 발판삼아 구호를 만들고 세력을 조직했던 에이즈 운동은 질병에 대한 인식변화와 제도마련에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다.

 

 

에이즈와 동성애 Ⅱ- 한국의 예

 

그렇다면 한국의 상황은 어땠을까. 조병희교수의 저서 『섹슈얼리티와 위험연구』는 에이즈가 창궐할 당시 차별의 대상이 구체화되지 않았던 한국의 상황을 적시한다. 다시 말해 한국과 미국을 비교하는 중요한 척도로 삼는 것 중 하나는 동성애자커뮤니티의 유무이다.

 

공동체는 공격에 저항할 수 있는 지지기반을 의미하기도 한다. 에이즈의 도래 이전 동성애자 공동체가 있었던 미국의 경우, 백인 중산층 게이에 치중되었을지라도 이들 중에는 정치운동의 경험이 있는 구성원들이 주축이 되어 에이즈운동을 조직할 수 있었다. (물론 미국의 에이즈운동을 구성했던 인종적 편중은 현재에 이르러 유색인종 HIV감염률의 문제에 연결된다.) 반면 한국은 동성애자커뮤니티가 가시화되지 않았을 뿐더러 조직되지도 않은 상황이었다. ‘문란한 동성애’, ‘동성애가 에이즈의 원흉’이라는 문구는 대개 해외 가십을 소개하는 기사들에서나 찾아볼 수 있었다. 이런 가운데 에이즈는 발견초기 미군이나 미군을 상대하는 성판매 여성, 외항선원이나 해외노동자들이 걸리는 ‘외부의 질병’으로 인식된다. 일련의 논점들은 외국의 문란한 성문화가 유입되는 것을 경계하는 보수주의 진영이나 ‘미군 out!’을 외치는 민족주의 좌파들이 에이즈에 있어서는 결과적으로 서로 입장을 공조하는 결과를 낳는다.

 

질병당사자의 목소리가 가시화될 수 없는 상황에서 정부의 에이즈정책은 친화적인 예방보다는 질병당사자에 대한 관리와 검열, 감시와 방역으로만 접근되었다. 말 그대로 질병은 사회구성원들을 단속하는 도구인 것이다. 대중친화적인 정책보다 공포를 심어주고 위험집단을 분리하는 방식을 생산하는 행위는 비단 정책 뿐 아니라 질병을 설명하고 그려내는 언론과 대중문화도 크게 일조했다. 대표적으로 소나무재선충과 같은 재해가 ‘소나무에이즈’, ‘에이즈ㅇㅇㅇ’으로 번역되는 경우나, 신종 전염병이 발견될 때면 항시 에이즈에 비교했던 것처럼 HIV/AIDS는 전염병의 전형으로 자리 잡는다. 여기에 덧붙여 감염인들이 바이러스를 전파시킨다는 공포가 질병당사자들을 암묵적인 범죄자로 만들어냄으로써 질병과 질병당사자에 대한 혐오를 배가한다.

 

질병을 통해 위기와 공포를 환기하는 전략은 대중들로 하여금 외부로부터 자신들을 단속하고 끊임없이 경계할 것을 주입한다. 예의 해악은 위험집단으로 지목되는 당사자들에게도 작용한다. 조병희교수의 연구에는 다뤄지지 않지만, 에이즈에 대한 위험성 짙은 선전들은 동성애자를 문란함과 질병의 원흉으로 연결시킴으로써 커뮤니티가 수면에 오르는데 자기검열이라는 피할 수 없는 기제를 작동시켜왔다. 게토 안에서 에이즈는 불문에 부쳐지거나 위험한 화두로 자리매김했다. ‘누가 감염되었다’는 소문은 발 없는 말에 실려 그의 관계를 단절시키고 이곳에 발붙이지 못하도록 작용했다. 동성애자들의 자기검열은 인권운동의 구호에도 영향을 미친다. 초기 동성애자 인권운동은 대중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불식시키기 위해 에이즈가 자신들의 질병이 아니라는 구호를 생산하며 동성애와 에이즈 엮기를 거부했던 것이다.

 

 

시대착오적이지만 여전히 유효한 혐오의 (무)논리

 

질병을 부정적으로 묘사하고 질병당사자를 부당하게 대우하고 사회적 타자로 몰아낼수록 질병에 대한 접근은 그 자체로 공포가 된다. 하지만 공포를 동반한 캠페인은 (위험성을 인지시킬지는 몰라도) 사람들에게 공감을 얻기 어렵다. 질병에 대한 위기와 공포의 은유는 추상적인 정서이기에 구체적인 일상과는 거리가 생길 수밖에 없으며, 질병을 나와 무관한 것으로 분리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질병에 대한 공포는 질병에 대한 무지를 은폐할 뿐이다. 더불어 질병이 나와 무관하다는 인식을 키우고 특정집단에 대한 기존의 편견을 강화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질병에 대한 의식 환기와 예방효과를 감소시킨다. 자연히 그에 대한 검사조차 편견과 두려움으로 꺼려지게 되며 결과적으로 공중보건은 요원해질 수밖에 없다.

 

지금도 HIV/AIDS는 역병의 대명사로 언급된다. 물론 이는 질병에 대한 의학적 성과들에 대해서는 귀를 닫은 목소리일 뿐이다. 근래 들어 서구의 에이즈담론은 치료보다 예방과 검진에 비중이 실리는 추세이다. 감염되었더라도 약만 잘 먹으면 30년 이상을 살 수 있다는 연구결과가 나왔으며, 안전하지 않은 환경에 노출되더라도 전이나 후에 약을 복용하면 감염을 피할 수 있는 사전/사후 예방약이 나올 만큼 치료제에 대한 개발은 일정수준에 올라 있다.[각주:1]

 

HIV/AIDS의약품 연구가 성과를 보이고, 인식변화와 제도마련을 촉구하는 질병당사자와 활동가들의 노력이 가시화되면서 국내의 에이즈를 둘러싼 담론과 사회 환경은 공포에서 예방과 검사로, 죽음의 병에서 관리 가능한 만성질환으로 변화할 수 있었다. 상황이 이럴진대, 보수진영의 반대주장은 에이즈가 동성애를 공격하기 위해 위험한 질병으로 ‘남아야만’ 하는 우스운 모습을 피할 수 없다.

 

동성애가 에이즈의 원흉이라는 해묵은 공격은 오늘날 성소수자운동에 대해 맞설 논리가 부재하는 난처한 입장을 보여준다. 성소수자커뮤니티가 가시화되고 이들의 목소리가 정치적 역량을 갖게 되면서 공격대상은 구체적이게 되었지만, 역설적이게도 그들의 일관된 논리가 기댈 참조점은 극히 적다. 단적으로 성경의 배타적 교리주의 해석에 의존하는 보수개신교의 강경한 반대 입장은 동성애에 대한 편견이 허상일 뿐임을 입증하는 수많은 과학적 성과와 변화들을 외면한다. 외려 이들의 무리한 (무)논리는 대형교회의 비리와 불신을 은폐하기위한 연막이 아니냐는 비아냥을 듣기도 한다.[각주:2] 이성애 가족을 모범적인 사회모델로 삼는 것 역시 이면의 가정폭력과 높은 이혼율, 가정 내 노동 불균형 등의 사회적 문제들을 묵인한 채 미화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여기서 같은 질문을 다시 던지게 된다. 혐오의 논리가 빈약한데도 동성애를 공격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성소수자들이 삶의 가치를 위협하기라도 한다는 말일까? 커뮤니티가 성장하고 목소리를 높이며 정책입안에 개입하고 기존 정책에 대한 수정을 요구할 만큼 위상이 높아진 데 대한 두려움은 성별이분법과 이성애중심의 가족주의가 위협받고 있다는 위기감을 반영한다. 경계의 벽은 바깥에서 두드려오는 목소리들에 무너질 위기에 노출된 셈이다. 혹은 반대로 일련의 가치관들이 그동안 억압되었던 목소리들, 그림자처럼 숨어 지내온 존재들의 출몰에 놀라 뒤늦게 벽을 세워 해묵은 논리들을 그러모으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우리는 이를 질병에 대한 공포를 진정시킬 수 있는 예방정책과 치료제보급 및 연구에 대한 논의가 소개되고 전달되지 않는 악조건 속에서 대중들의 불안과 불만이 대상 집단에게 투사되는 것으로 분석해볼 수 있다. 좀 더 가까운 맥락을 찾아본다면 개개의 삶을 지지하는 복지제도나 사회안전망들을 축소 또는 폐지하고 시장지상주의로 수렴시켜버리는 오늘날 한국사회의 풍경을 마주할 수도 있다. 신자유주의의 도래 이후 삶을 지지해줄 장치들을 상실한 사회구성원들의 위축된 정서와 삶의 위협, 사회에 대한 불안과 분노는 제도와 자원을 관장하는 국가나 정부와 같은 상위 그룹보다 구체적인 대상들, 주변의 이웃들, 특히 사회적 소수자들에게 낙인을 찍고 부정과 배제를 수행함으로써 소수자들의 목소리가 공명하고 사회적으로 가시화될 수 있는 가능성을 가로막는다. 보수세력들은 일련의 악질적인 사회 생태계를 조장하고, 이를 '비정상의 정상화' 따위의 기조로 여과하여 사회적 소수자를 반대하는 동력으로  활용한다.

 

이웃을 타자로 분리하고 반대하며 차별과 배제를 통해 사회로부터 잃어버린 삶의 지분을 구축하려는 이들이 내세우는 가치관은 퇴행적일 수밖에 없다. 동성애는 애초에 문란했고 사회적으로 인정될 수 없으며, 인정할 수 없기에 비도덕적이라는 논리상의 빈약한 순환은 언어를 결핍한 채 폭력을 양산한다. 이를테면 논리보다는 자극적이고 차별적인 가십이, 대화보다는 극단적인 반대가, 폭력적인 배제와 부정이 앞서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혐오가 무조건적이고 논리를 결핍했다고 해서 한순간의 비난이나 공격으로 끝나지 않음을 주목해야 한다. 동성애 반대가 논거를 결핍하고 있다는 사실은 그것이 어떻게 의미를 생산하는가를 따져본다면 쉽게 무시할 문제가 아니다. 가벼운 사례를 하나 들어보자. 최근 몇 주 전  인터넷상에 선보였던 Rp-Q의 ‘안돼는 건 안돼(동성애)’[각주:3] 가사를 살펴보면 반대 논리의 결핍이 그대로 노출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가사는 동성애를 근친상간, 수간 등에 비교하며 동성애를 반대할 수 있는 것도 '표현의 자유'라고 주장하지만, 결국 그 이유는 ‘안 되는 건 안된다’는 식의 전형적인 억지 주장으로 수렴한다. 한데 주목할 점은 (제목 상에 거슬리는 잘못된 맞춤법과 띄어쓰기는 차치하더라도) 반대 논리의 ‘이유 없음’이  그 자체 이유 없는 정상성으로, 무조건적인 진리로 탈바꿈한다는 것이다. 그의 막무가내식 태도를 전통적인 힙허세, 스웨그(swag)로 설명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의 이유 없는 뻔뻔함, 손발이 오그라들 자신감은 동성애 반대의 결핍된 논거가 소위 '정상성'을 비정상적으로 과잉생산하는데 따른 결과에 다름 아니다. 현실 속에서 근거 없거나 근거가 필요 없는 정상성에 대한 조건 없는 추종은 기존 이성애중심적 규범과 제도들을 비판적으로 성찰할 수 있는 여지를 가로막을 뿐 아니라, 다수의 논리 운운하며 성소수자의 발언권을 박탈하고 음지로 내모는 효과를 만들어낼 뿐이다. 


한편 이들의 (무)논리는 고리타분한 구호를 재차 생산하고 반복하는 것을 넘어 틀을 만들어 조직하기도 한다. 가령 동성애는 온갖 성병들의 주범이며, 질병처럼 사회를 오염시킨다는 식의 논리, 군대를 문란하게 만들어 사기를 꺾음으로써 국력 저하를 초래할 수 있다는 식의 서사가 소위 ‘종북게이’의 논리를 완성하는 것이다.[각주:4] 이는 동성애 반대주장에 부여되는 종교적 의미가 국가주의적 편협함과 정교일체 수준의 연합을 세력화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종교에서 금지된 동성애가 형이상학적이라면, 동성애가 국력을 쇠진시킨다는 논거는 정치적이다. 둘의 앙상블은 동성애의 병리화, 불우한 성장환경의 결과라는 논거나 에이즈를 비롯한 각종 성병들에 대해 발병가능성이 740배 높다는 신체적 위협과 같은 ‘물리적 징벌론’에 이르러 ‘혐오의 삼위일체’를 이룬다. 해묵은 논리가 공회전하고 있음에도 동성애 반대 주장이 유효해지려면 동성애자는 시종일관 '후천적으로 습득된 것'으로 주장되어야 한다. 그래야만 이성애규범에 딴지 걸 위험부담 없이 동성애자를 사회부적응자로 부를 수 있고,  색정광이나 우울증환자로 호명함으로써 치료 받아야할 대상으로, ‘정상화’되어야 하는 대상으로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에이즈를 비롯한 온갖 성병들이 ‘무시무시한’ 질병의 얼굴로 ‘문란한’ 동성애자들에게 달라붙는다. 에이즈는 동성애자들이 받는 고통을 가시화함으로써 동성애를 반대하는 논리의 맹점을 감출 수 있는 구실이 되는 것이다. 

 

동성애를 반대하는 위의 논거들은 사실여부의 시시비비에 있어서는 애초에 근거 없음이 드러난 지 오래이며, 사회적으로 유효성을 잃은 지도 오래다. 그렇다고 궁지에 몰린 성적 보수주의 세력들의 비논리적인 혐오를 무용지물로 치부하기에는 상황이 그리 가볍지 않다. 동성애를 반대하는 이들의 논리는 사실여부와 상관없이 아무렇지 않게 사용되고, 지금도 엉터리 통계들을 기정사실화하며 동성애가 에이즈의 원흉임을 재차 반복하기 때문이다. 이는 담론과 현실 간, 사실과 인식 간의 격차를 벌려놓는다. 가령 인터넷뉴스 등에서는 HIV/AIDS에 대한 해외의 의약학적 성과들을 소개하며 질병의 오랜 공포를 걷어내고 질병당사자들에게 건강한 삶의 가능성을 제시하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정부기관의 방관 속에 국내에 유일한 HIV/AIDS 요양병원이 비위생적인 환경과 환자의 자기결정권을 무시하며 잇속을 챙기는 횡포가 최근까지도 일어났던 것이다. 여기에 보수언론이 가세한다. 이들은 요양병원에 입원해있는 HIV/AIDS환자들에게 ‘항문파열’과 ‘성폭력’ 등의 자극적인 표현을 덧씌우고 HIV/AIDS유관 기관의 부조리를 은폐하여 독자들의 판단을 마비시키고 나아가 병원 측의 입장을 종교적 사명으로 미화함으로써 질병당사자에 대한 척박한 의료서비스 환경을 은폐한다. 이러한 상황들은 질병당사자들의 자긍심과 정치적 역량이 높아지는 현실과의 괴리를 보여줄 뿐 아니라, 최근 질병/당사자와의 관계모색은 물론 제도와 더불어 인식변화를 꾀하는 노력들에 찬물을 끼얹는 결과를 초래한다.[각주:5]

 

한편 반대논리가 그 자체로 힘을 잃은 상황에서 혐오표현은 폭력과 관용, 실재와 장난 사이의 구분을 애매하게 만들기도 한다. 단적으로 <일베저장소>(이하 일베)와 같은 온라인커뮤니티가 한 예이다. 일베에서 ‘게이’는 준공인된 호칭으로 통용되고 있다. 온갖 ‘가짜 게이’들이 판을 치는 사이트 안에서도 특히 성소수자게시판을 조금만 뒤져본다면 게토의 용어들이 난무하는 가운데 자극적인 소재로 작성된 글들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우리는 그것이 당사자가 직접 쓴 자기 비하와 조롱 유의 글인지, 호기심의 발로에서 작성된 잠입르포인지, 장난 섞인 비하인지, 저급한 혐오인지 명확하게 단정 짓기 어렵다. 하지만 그런 중에도 혐오와 차별은 온라인에서 그리 멀지 않은 현실 위에 있다. 동성 간 사랑이 국어사전에서 배제되고 군법에서는 동성애가 여전히 계간에 비견되며, 누군가는 학교나 직장에서 성소수자라는 사실이 아웃팅되어 집단으로부터 혐오공격과 강제퇴출에 노출되기도 하는 상황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나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들은 혐오가 발화되는 무게와 패턴이 다양한 방식으로 일어나고 있으며, 서로 교합하면서 규모를 키우고 있음을 보여준다.

 

 

結(결)

 

이 글에서 일관된 주장은 질병에 부과된 불필요한 의미들이 사회구성원들의 몸과 의식을 단속하고 경계토록 만든다는 것이었다. 대표적으로 HIV/AIDS는 발병률이 높은 집단들을 꼽을 수 있는 질병이다. 하지만 사회는 이들에게 서비스를 제공하고 사회활동을 위한 지지기반을 마련하기보다 질병에 부정적인 의미를 덧붙여 편견을 강화한다. 특히 ‘동성애가 에이즈의 원흉’이라는 구호는 동성애혐오 아래 에이즈를 죽음의 병으로 의미부여하는 이중의 혐오이다. 그것은 동성애를 병리화하는 한편 질병을 문란함과 범죄적 낙인으로 덧칠한다. 이는 동성애에 대한 사회적 혐오뿐 아니라 동성애커뮤니티 내부 질병당사자에 대한 차별을 초래하기도 한다. 그러나 혐오수사는 일방적인 혐오와 반대만을 주장한다는 점에서 애초에 논리가 빈약함을 노출한다. 하지만 해묵은 논리는 종교의 우산 아래 동성애 반대를 정치적으로 세력화하는가 하면 유머게시판을 통해 동성애 폭력적인 언사를 아무렇지 않게 소비하며 동성애혐오를 비-정치화한다. 혐오의 정치가 비-정치로 소비되고 비-정치가 정치적으로 세력화되는 가운데 어떻게 혐오세력들에 맞서고 혐오메시지에 현명하게 대응할 수 있을까? HIV/AIDS와 동성애를 아우르는 혐오가 조장하는 경계와 배제의 고리를 끊고 어떻게 상호 관계를 고민해나갈 수 있을까? 이는 여전히 우리에게 놓인 과제이다.



후일담- 논의를 정리하며

 

● 발제가 끝나고 논의시간에 처음 나온 한마디는 ‘에이즈가 없었다면 지금의 혐오가 가능했을까?’ 라는 것이었다. 기실 성소수자를 공격하는 혐오수사들의 상당부분은 질병, 특히 에이즈의 은유로부터 공급받고 있다. 더구나 에이즈위기가 없었다면 성소수자커뮤니티의 정치적 역량이 지금보다 빨리 많은 인정과 제도변화의 결실을 가져왔으리라는 짐작도 어렵지 않게 해볼 수 있다. 물론 이제 와서 이런 질문을 던지는 것이 부질없음을 모르지 않는다. 하지만 이는 동시에 우리가 에이즈의 역사, 동성애 혐오의 역사 위에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 논의 초반에 나온 이야기들은 과학적 통계에 대한 내용확인이었다. 동성애와 에이즈를 둘러싼 과잉된 의미들 사이에 제시되는 과학적 통계자료는 출처도 불분명할뿐더러 허무맹랑한 것들이 많다. 하지만 다양한 분야의 정보들을 규합한 동성애 반대논리는 그럴듯해 보이는 혐오서사의 틀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동성애와 에이즈, 근본주의 종교에 과학까지 결합한 혐오의 논리에 반박을 하려고 하면 어디부터 손을 대야할지 난감해진다.

 

● 이런 가운데 국내 뿐 아니라 국외의 상황에도 촉각을 세워야 한다는 의견은 두루 새길 만하다. 미국의 경우 동성애 반대주장을 양산하는 복음주의 교회들은 거의 문을 닫은 상황이다. 논의 중에는 이제 비슷한 상황이 머잖아 한국에도 찾아올 것이라는 예상이 나오기도 했다. 하지만 동성애 혐오를 품은 복음교회는 우간다 등지에 수출되어 이 지역의 동성애 혐오와 폭력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친다. 이른바 ‘본점’폐업과 ‘분점’ 활황의 현상이 동시에 일어나는 것이다.

 

● 하지만 에이즈담론의 변화는 혐오세력들도 간과할 수 없을 것이다. 그간 주옥같은 혐오기사들을 냈던 조선일보가 최근 에이즈 환자의 사회복귀를 돕자는 사설을 실은 것은 HIV/ADS가 더 이상 과거와 같은 배제의 대상, 혐오의 대명사로 남을 수 없음을 보여준다.

 

● 오히려 에이즈에 대한 낙인과 편견이 약발을 다해가는 가운데 혐오수사의 고리는 최근 은유 포인트를 다른 지점에, 일테면 ‘마약’과의 연결을 강화하는 것처럼 보인다. 얼마 전 신문에 도배된 ‘동성애자 마약파티’라는 기사카피는 ‘마약파티를 즐기며 문란한 성교를 즐기는 동성애자’라는 전형적인 혐오수사를 암시한다. 더불어 ‘항문성교’와 같은 특정행위는 여전히 동성애자를 나타내는 대유법적인 수식으로 사용되면서 동성애를 불온한 존재로 자리매김 시킨다. 설득력을 잃은 혐오의 수사들은 점차 바닥의 언어들을 파고든다.

 

● 일련의 혐오수사들에 정부가 특정한 대응을 하지 않는 것은 문제가 있다는 지적도 있었다. 특히 공중보건 뿐 아니라 질병당사자들을 상대해야 하는 질병관리본부가 에이즈의 편견과 혐오수사에 대해 수수방관하는 것이 지적되었다.

 

● 혐오수사의 폭이 다양하게 쓰이는데 대해 운동의 전략이 다양할 필요가 있다는 의견도 나왔다. 혐오표현은 폭력적일 수 있지만 조롱과 유머로 소비되기도 한다. 일련의 비합리적인 표현들에 이성적으로 일일이 대응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진지하고 무게 있는 대응부터 가볍고 재기발랄한 구호들도 다양한 채널을 통해 만들어질 수 있지 않을까.

 

● 동성애와 에이즈를 아우르는 혐오를 주제로 열었던 세미나는 올여름 인권팀 교육프로그램 <살롱 드 에이즈>의 새로운 프로그램을 준비하기 위한 첫 단추였다. 이후에 혐오에 관한 이야기들을 많은 사람들과 함께 나누면 좋겠다.




  1. 오늘날 HIV/AIDS의약품에 관한 논의는 2014년 3월 15일 《허핑턴포스트 코리아》에 게재된 제이슨 박의 텍스트 <에이즈는 예방될 수 있다>를 참고할 수 있다. [본문으로]
  2. 성경에서 논하는 동성애에 대한 분석은 임예인, <기독교는 왜 동성애에 이토록 민감한가?>, 《ㅍㅍㅅㅅ》(2014, 4, 15)를 참고했다. 링크: http://ppss.kr/archives/6969 [본문으로]
  3. 인용을 심하게 고민했지만, 혹시 보지 못한 독자들을 위해 올려둔다. <beatbox,rap,singing 등 1인 4역!! '안돼는건 안돼(동성애)'-Rp-Q(알피큐) > 링크: http://www.youtube.com/watch?v=ENfh932J_iI [본문으로]
  4. 동성애반대의 목소리가 드라마틱하게 망상을 키워가는 점은 2012년 당시 레이디가가 콘서트를 반대하며 제작된 동영상 <[무삭제] 레이디가가 내한 공연 반대, 그리고 동성애에 대한 의견>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링크: http://www.youtube.com/watch?v=zb5NJAM7Fqk [본문으로]
  5. 여기서 예를 든 HIV/AIDS요양병원 기사는 2013년 11월 30일자 조선일보, <다 꺼리는 에이즈환자… 병원 문 닫을 각오로 돌봐>이다. 한편 위의 기사가 실린 후 4월 9일자 같은 신문의 사설에서는 <[발언대] AIDS 정복된 시대, 환자 사회復歸 돕자>라는 글이 올라와 앞의 기사와 다른 논조를 보이기도 했다. 이와 같이 최근 HIV/AIDS에 접근하는 보수언론의 이중적 관점은 히스테리적인 인상을 주는데, 이는 추후에 논할 필요가 있다. 각각의 링크는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3/11/29/2013112902025.html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4/04/08/2014040804653.html [본문으로]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댓글을 남겨주세요

Name *

Password *

Link (Your Homepage or Blog)

Comment

Secret